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 작가의 기획으로 ‘이순신 장군과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 회원들과 함께 1박 2일(8/15-8/16)간 남해안 일대를 다녀왔다. 이틀간의 답사 코스는 첫날 경남 창원 진해구 웅천 – 칠천량해전기념공원 – 옥포대첩기념공원 – 견내량 – 미륵산 케이블카, 이튿날 통영여객선터미널 – 한산대첩기념비 – 제승당 – 착량묘 – 칠백의총 등 임진왜란 때 수군 및 의병의 전적지이다. 값진 여행의 감동을 글로 남겨본다.
2019년 8월 15일(목) 아침 8시, 서울 교대역 근처에 모인 일행 14명은 15인승 솔라티 렌트 차량에 올라탔다. 내려가는 내내 태풍 크로사의 영향으로 비바람이 거셌다. 1597년 음력 7월 15일, 칠천량전투가 벌어지던 그 날도 이랬단다. 공교롭게도 음력의 그 날이 같은 해 양력 8월 15일이었으니 우연의 일치일까, 바로 그날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4시간 반가량의 운행 끝에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동 <가야밀면> 집에 도착했다. 행정구역상 웅동으로 불리는 웅천(熊川)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본거지였다. 가덕도를 코앞에 두어 부산포 쪽이든 한려수도 쪽이든 드나들기 좋은 최적의 수군 기지였다. 한편 웅천은 내 외가가 있던 곳이라 개인적으로는 50여 년 만에 찾아보는 감격을 맛보았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던 어머니는 원폭투하 한 해 전에 운 좋게 배를 타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진해 시내에 살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였다. 어릴 적 외갓집을 찾던 때가 어렴풋이 떠오르자 일찍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간절했다.
점심을 끝내자마자 거가대교를 타고 가덕도를 가로질러 거제도 <칠천량해전공원>에 닿았다. 이순신이 통제사 직을 삭탈 당하고 한양으로 끌려간 사이 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끈 이곳에서의 전투는 120여 척 침몰, 1만여 조선수군 전사라는 세계 사상 유래없는 대패를 기록했던 치욕적인 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원균,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 또는 자결했다. 어이없게도 패배의 원인은 왜군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밤낮없이 사흘간 바다 이곳저곳을 떠돈 군사들의 피로후유증, 통제사 원균의 리더십(Leadership)과 부하 장수들 간의 팔로워십(Followship)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한마디로 무리수로 자초한 개죽음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었다면 어땠을까, 답은 현명한 여러분이 내리기 바란다. 이때 12척을 이끌고 도망간 배설 덕분(?)에 그 뒤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칠천량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고 이곳을 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한 달 즈음인 5월 7일, 조선 수군이 첫 출전했던 옥포대첩지를 찾았다. 옥포가 내다보이는 곳에 <옥포대첩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끈 전라좌수군과 판옥선 4척, 협선 2척을 이끈 경상우수군의 협공작전에 의해 왜선 26척이 격파된 첫 승리였다. 이때 우수사 원균과 달리 정예 수군을 여유롭게 투입한 좌수사 이순신의 의도는 조선 수군들에게 “확실한 승리를 통해 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연전연승의 기세를 갖추게 함”이었다. 그의 계산대로 이후 이순신 부대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하지 않았다.
통영(統營)으로 넘어가는 거제대교 근처에는 견내량(見乃梁)이 있다. 량(梁)은 들보나 다리를 뜻하는 한자어로서, 다리가 놓일 만큼 바닷길이 좁은 곳을 가리킨다. 미륵산 케이블카(통영 도남동 349-1)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올라보니 한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박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1592년 음력 7월 7일 견내량 일대에 집결해있던 적선을 미륵산 목동 김천손이 산 위에서 발견, 20km 거리를 달려와 당포에 정박 중이던 이순신 부대에 알린다. 이순신은 이억기 등과 회의를 거쳐 이튿날 아침 일찍 판옥선 5,6척을 견내량 가까이로 보내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는데 성공, 학익진으로 적선을 에워싸고 두 시간가량의 함포를 퍼부은 결과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총 59척을 격파하며 대승을 거뒀다. 400여 명이 한산도 산속으로 도망쳐 13일간 굶주리다가 겨우 육지로 탈출했다. 한산대첩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하여금 조선 침략에 대한 두려움 및 해전 회피령을 내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때 적선의 견내량 집결 사실을 알린 목동 김천손을 기념하여 ‘한려수도, 이순신이 싸운 바다(새로운사람들 출간)’라는 책을 펴낸 이봉수 씨가 ‘김천손마라톤 대회’를 열자고 제안한 바 있다.
미륵산을 내려와 숙소(캘리포니아 호텔)에 짐을 풀고 향토사학자 김병덕 선생이 추천한 자연산 장어구이집으로 향했다. 싱싱하고 고소한 장어, 입안에서 살살 녹는 멸치회무침, 시락국에 소맥을 말아먹는 호사를 누렸다. 통영의 밤바다는 그렇게 깊어가고 해안선을 따라 걷는 사이 휘영청 달이 떠올라 정박된 선박들이 마치 출전을 앞둔 군선처럼 비장하다. 누군가의 발의에 의해 전원이 통영 명물 ‘다찌’집으로 향했다. 일본어 다찌노미(立ち飮み)의 준말로 ‘서서 마신다’는 뜻으로 어부들을 위해 여러 가지 안주로 차려진 술상을 말한다. 일제 때의 잔재라서 광복절 날 다녀가는 게 꺼림칙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보란 듯이 돌아가며 왜군을 무찌르고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의 공적을 조정에 올린 장계를 소리 내어 읽었다. "신하 이, 삼가 붙잡고 벤 일을 보고합니다......우별도장 전 만호 송응민은 머리 2급을 베었습니다.. 유균1영장 손윤문은 왜 소선 2척에 포를 쏘고 쫓아가 산으로 갔습니다...죽을 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을 신이 직접 본 대로 차례로 나눠 결정해 마찬가지로 문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절도사 신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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