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호 지리적표시 농축산물-안동포 제45호 지리적표시 농축산물-보성 삼베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년 7월 15일 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 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 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둣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입으신 것이다(중략)
나희덕의 시 <삼베 두 조각> 전반부이다. 수의를 만들다 남은 삼베 두 조각으로 버선 대신 발을 감싸 드린 후반부까지 마저 읽다보면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나온다. 삼(Cannabis savita)과의 한해살이풀로서 온대와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삼의 껍질 안쪽 부분인 인피섬유로 만들어지는 삼베는 인류가 최초로 직조한 옷감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애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고조선 때부터 의복이나 침구 재료로 사용되어왔다. 원래 삼베는 두루마기나 홑저고리 등 서민층 남자들의 여름 옷감으로 주로 사용되던 것이 죄를 지었거나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수의(囚衣) 또는 상복(喪服)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가누지 못하고 삼베 누더기를 걸친 채 개골산(금강산)에 파묻혀 버리자, 이때부터 우리 조상들은 망자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하는 상제(喪祭) 때마다 삼베옷을 입는 풍습을 갖게 되었다.
수의(壽衣)로 삼베가 쓰이게 된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일제 시대 수의(壽衣)라는 용어의 탄생과 함께 간소화된 것인데,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장례 예법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하지만 삼베 수의로 매장한 결과, 항균 기능을 갖는 삼베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시신의 뼈가 땅속에서도 썩지 않고 건조되어 누런 황골(黃骨)로 발견되었다. 황골은 풍수지리에서 최상의 발복(發福)이 된다 하여 가문이 번창하고 가족이 장수한다고 믿었다.
경북 안동 지방에서 나는 삼베를 지칭하는 안동포는 제22호 지리적 표시제 등록상품이다. 기후와 토질이 원료인 대마의 재배에 적합하고 이곳 여인네들의 길쌈 솜씨가 뛰어나 신라 시대에는 화랑도의 옷감으로, 조선 시대 때는 궁중 진상품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문헌상으로는 19세기 초 발간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처음으로 언급되고, 1911년 일본인들이 발간한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에는 안동이 대마의 주산지로 소개되고 있다. 안동포는 섬유질이 우수한 생냉이(겉껍질을 제거한 속껍질을 생으로 길쌈하여 짜냄)에 천연염료인 치자열매로 염색을 하여 올이 가늘고 고우며 빛깔이 붉고 누렇다. 원단의 품질 면에서 일반 삼베인 익냉이(겉껍질 채로 물에 불린 상태로 화학 처리하고 익혀 짠 것)나 무삼(여러번 물속에 담가 올이 굵게 짜낸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올의 굵기를 나타내는 단위인 새(升; 되 승)로 비교해 보면 1폭당 생냉이가 10~11새, 익냉이가 7새, 무삼이 5새 정도이다. 여기서 1새는 삼베 가닥 80올에 해당하는데, 올 수가 많으면 그만큼 옷감의 결이 고와진다.
안동포의 제작 과정은 대략 여덟 과정으로 나뉜다. 1. 정선종 대마를 4월 초순에 파종한다. 2. 7월에 수확하는데 줄기 밑둥의 잎이 떨어지고 줄기가 황색을 띨 때가 적기. 3. 수확한 삼베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겨 말린다. 4. 말린 삼 껍질을 물로 적셔서 손과 삼톱으로 째고 훑어내려 가닥(실)을 만든다. 이 과정의 바래기와 삼째기가 안동포의 섬세함을 좌우한다. 5. 삼베를 짤 틀에 새로 만든 실을 잇는다. 6. 굵은 실과 가는 실을 결정한 다음 물레에 올려 날실 타래를 만든다. 7. 날실에 된장을 섞어 발라 좁쌀풀을 먹인다. 이래야 끈기가 오래 간다. 8. 틀의 실이 팽팽하도록 잡아당긴 후 베틀을 이용하여 직물을 짠다.
안동포 제조과정은 백여 번의 세세한 손질이 가는 힘든 과정이다. 장마철에 베를 찌고 말리고 째고 매고 삼고 실을 뽑아내는 과정은 막노동보다 고되고 여름 열기보다 뜨겁다. 이렇듯 손이 많이 가는 탓에 길이 22m 15새 1필(40자) 안동포는 가격이 1천만 원을 넘는다. 전국 생산량의 25%, 유통량 50%를 차지하는 대마의 집산지인 전남 보성도 제45호 지리적 표시 등록을 마쳤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1,000가구에 이르던 삼베 짜던 집들이 지금은 70가구 정도로 줄었다 하니 값싼 중국산의 공세 앞에 장인정신도 무색해지나 보다. 최근 보성군은 정통 보성포의 명맥을 잇고자 각종 대마 관련 문화산업을 장려하고 종자 개발 및 상품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하니 머잖아 옛 명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마 직물은 대마(Hemp; 삼베), 아마(Linen), 저마(Ramie; 모시), 황마(Jute) 등으로 나뉜다. 이 중 삼베는 자연섬유 중 섬유질이 가장 길고 강도가 일반 면사에 비해 10배 정도 강하여 직물 이외에 로프, 그물, 모기장 등 다용도로 이용된다. 하지만 삼의 줄기와 잎에는 테트라히드로카나비눌(THC)이라는 마취성 물질이 함유되어 있어 대마초 마리화나로 악용되는 폐단이 있어 우리 정부는 1976년 대마관리법을 통해 재배 및 취급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삼베에 대한 활용도를 높이고자 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 직물로서의 삼베. 목화는 세계 경작지의 4% 정도에서 재배되고 있으나 거기에 뿌려지는 살충제의 양은 전체의 50%를 차지할 정도다. 반면 삼베는 재배에서 직물이 나오기까지 살충제나 화학적인 처리 없이 만들어져 ‘Green fabric’으로 불린다. 전통 방식의 거칠고 딱딱한 직물도 최근 방적기술의 발달로 면처럼 부드러운 직물로 탈바꿈하고 있다. 2. 종이 펄프로서의 삼. 목재 펄프로 종이 1톤을 생산하는 데는 20년 수령의 나무 12그루가 필요하다. 고작 100일 정도 경작하는 삼 펄프를 활용한다면 1에이커당 목재 펄프보다 4배 정도의 생산효율을 가져올 수 있다. 삼 펄프 종이는 7~8번의 재활용이 가능해 3~4번에 불과한 목재 펄프보다 재활용 면에서도 매우 효율적이다. 3. 화장품 원료로서의 삼. 마약 성분인 THC는 줄기나 씨앗에는 거의 없고 잎이나 꽃잎에만 극소량(약 0.03%) 함유되어 있다. 삼 씨앗으로 만들어지는 오일에는 달맞이꽃보다 4배가 많은 감마리놀렌산(GLA)과 오메가 지방산이 함유되어 있어 노화 방지와 건성 피부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4. 산업재로서의 삼. 삼은 자연섬유 중 최고의 섬유질을 갖고 있다. 삼은 내피(70%)뿐만 아니라 표피(40%)에도 Cellulose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가볍고 내구성 있는 산업재 원료, 예를 들어 썩는 플라스틱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5. 의약품으로서의 삼. 대마초는 매우 위험스럽고 유해하다. 그러나 대마초는 진통 환자, 구토나 구역질 환자, 불면증 환자, 녹내장 환자, 암 환자, 식욕저하 환자, AIDS 환자 등에 효능이 있어 의사의 엄격한 처방에 의해 이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추세다. 암 환자나 AIDS 환자의 경우 심한 구토 증세로 받는 고통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이때 대마초는 구토 증세를 저하시키고 식욕을 왕성하게 해주어 생명 연장에 큰 도움을 준다.
미국 개척 초기의 성조기가 삼베로 만들어졌고 미국 독립선언문이 삼 종이에 기초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삼의 쓰임새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대변한다. 흙으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리 앞에 가장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주는 삼베옷이 망자의 옷으로 입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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