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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고③
사회보호운동은 왜 일어나는가?
 
김건아 군포이비지니스고 2년   기사입력  2021/03/29 [16:14]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살펴보면 어떤 이익집단의 속셈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회에 의해서, 온갖 계층, 계급, 집단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운동이 전개되었다고 칼 폴라니는 말한다. 저마다 사상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람들을 싸우게 만든 힘은 단일한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힘일 것이다. 내 생각에 그런 힘은 인간 존재의 기반이 위험에 처했을 때만 분출된다. 자기조정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확립되려했고, 어느 곳에서나 자기보호운동이 일어났다. 전 세계 사람들은 서로 문화나 생각이 다른데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인간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것들을 자기조정 시장이 부숴버리려고 했고, 그것들이 파괴될 경우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사회는 자기를 보호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 결과 어떤 조건에서든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이윤을 얻기 위해 자신을 운영하려는 사업체의 노력이 경제 전반에 걸쳐 좌절된 것이다. 이것은 곧 거대한 가격체계의 붕괴였고, 인간과 자연 같이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들은 사회 자신이 직접 자기의 방법으로 가격을 결정했다. 자기조정시장이 세워지기 위해서 반드시 상품, 즉 가격과 구매량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자연과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자 자기조정시장은 결국 세상에 빛 한번 못본채 유토피아나 집착으로 남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인간이 시장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가? 정규직은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그렇지 않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완전히 상품화 되었다. 많은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하여 임금은 최저임금이나 그 이하로 주고, 해고는 당연히 매우(상대적으로) 쉽다. 

 

  인간 상품화에 대해서 보호운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 법칙(과학법칙 같은)이 아니다. 보호운동도 결국은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개인들의 외침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이런 외침의 소리가 작아서 들리지 않거나, 소리가 커도 무시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아니면 노동자들이 아예 입을 열지 않거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노동시장이 상품화로부터 보호되는 부분과 보호되지 않는 부분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구조에선 책임이 묘하게도 개인에게 떠넘겨져 버린다. 50여년 전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했을 때만 해도 사회전체에 보호막을 씌우려고하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사회 한 구석에 애매하게 씌워진 보호막 속으로 들어가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전자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지만 후자는 개인의 자기보호 운동이다. 

 

  이른바 ‘사회적 보호막’은 똑똑하든 성실하든 무식하든 게으르든 모두에게 씌워져야한다. 이것이야 말로 현 시점에서의 실질적 경제성장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경제생활이란 사회의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행위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관계에 깊이 뭍혀있다. 사회구성원들에게 칭찬이나 인정을 받거나 이웃과 우애를 쌓거나 친분을 두텁게 하려는 것과 같이 사회적 행위의 수단으로써 경제활동이 수행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선물행위가 있다. 선물의 목적은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함이지만 결국은 누군가가 필요한 것을 얻는 경제활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시대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정의된다. 현재에 와서 노동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를 봤을 때 분명히 현재의 노동을 위와 같이 정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선 앞에서 말한, 공장노동자가 공장이라는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는 대목이 맞지 않을 수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말 그대로 돈만 벌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래도 경제생활이 사회생활에 뭍혀 있고, 이런 복합적 생활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것을 확신한다. 아무리 돈만 벌면서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일만하는 노동자라 할 지라도 분명 이런 본능적 욕구를 품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사회성원들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인정받음을 통해 한 사회에 자신이 아주 끈끈하게 ‘포함’되어 있음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깨닫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좋은 삶을 위한 좋은 경제생활이 아닐까? 내가 봤을 때 이것을 막고 있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상품화’ 인 것 같다. 상품화가 노동의 사회성을 무시하고 물질적 측면 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결국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시작은 ‘생각의 전환’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관념으로부터의 지배를 받는다. 분명 불행한 삶인데도 그것을 합리화하는(대부분 지배층의 그것) 관념에 지배되어 변화의 희망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바꼈다고 삶이 금방 바뀌진 않는다. 경제적 제약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변화는 혼자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관념의 변화가 중요한 이유도 어떤 한 사람의 변화라도 그것은 곧 새로운 집단을 탄생시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었을 때 재단사들의 조직이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생각의 변화, 전환이다. 그것의 물꼬를 터줄 중요한 질문이 있다. 진정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 사진=김건아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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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29 [16:14]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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