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당시 양력 12/16) 노량대첩에서 전사하였다. 422년 전 엊그제의 일이다. 장군의 전몰 422주년을 맞아 12월 19일 주말, 이순신연구가 박종평 작가가 이끄는 전몰추모 아산 참배답사에 함께 했다. 이날의 답사코스는 온양온천역-게바위(蟹巖)-장군 초장(初葬)묘소-현충사이다.
역전 비각(碑閣)
전철 1호선 천안아산역(온양온천)에 내린 시각이 오전 11시 남짓, 곧장 광장 건너 온양전통시장으로 달려가 제주용 정종과 간단한 제수 음식을 장만했다. 역 광장 오른편 집결 장소인 ‘李忠武公記念閣(이충무공기념각)’. 1951년 결성된 이충무공기념사업추진회가 국민 성금으로 세운 비각으로서 현판 글씨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 썼다. 일행을 기다리다 역사(驛舍)와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보니 행정상으로는 아산인데 천안과 접하고 있어서 앞에 ‘천안’을 붙이고, 가까운 곳에 온양온천이 있어서 뒤에 ‘(온양온천)’까지 붙였다 하니 충청인의 대단한 배려심(?)이 느껴진다. 12시 15분경, 8명의 일행은 2대의 택시로 나눠타고 장군 묘소로 직행했다.
백의종군(白衣從軍)
답사의 실마리는 장군의 백의종군에서부터 시작된다. 선조실록에 명시된 이순신의 죄는 이러했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주고 무찌르지 않아 나라를 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로를 빼앗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씌운 죄, 모든 걸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한 죄” 사헌부와 비변사가 국문할 것을 건의하자 의금부 도사 이결 일행이 한산도에 가서 음력 2월 26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 감옥에 구금한 날이 1597년 음력 3월 4일, 이때부터 28일간 한 차례의 문초(問招)와 형장(刑杖)을 받았으나 원균을 못 미더워했던 선조는 “스스로 정성을 다해 공로를 세우게 하라(立功自效)”며 백의종군을 명했다. 그리하여 장군은 음력 4월 1일(양력 5/16) 옥문(圓門)을 나서 남대문 밖 윤간의 사내종 집에서 난중일기를 남긴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했다. 비변사 낭청 이순지가 찾아왔다. 한숨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지사는 저녁을 먹은 뒤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마음으로 권하며 위로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마신 술로 취했다. 영의정(류성룡)은 사내종을 보내왔다.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이상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과 곽영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술에 취했고, 땀이 나 몸이 젖었다.” 다음날 필공(筆工)으로부터 사들인 붓을 동여매고, 사흘째 되던 음력 4월 3일 일찍 남쪽 길에 올라서 해 질 무렵 수원 경기 관찰사의 이름 모를 아병(牙兵)의 집에 머물렀다.
해암리 게바위 사모곡(思母曲)
게바위(蟹巖;인주면 해암리 197-2)는 긔해 또는 게해, 긔바위라고도 하는데, 1960년대까지는 긔해나루가 있었고, 서울 경기 사람들이 아산을 거쳐 내포로 가기 위해 지나던 교통로의 하나였다. 장군이 음력 4월 5일 이곳에 도착하여 머물던 중에 4월 13일 흥백 변존서의 집에서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이날의 일기에 “해정(海汀)길에 올라... 홍백의 집에 도착했다. 얼마 뒤 사내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했다. 하늘의 해도 까맣게 변했다. 곧바로 게바위로 달려갔더니 배는 이미 이르러 있었다. 길을 바라보니 서러움에 찢어지는 아픈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고 애통한 심정을 적고 있다. 이튿날 여수에서 어머니가 뱃길로 손수 싣고 온 관을 짜서 사흘째 날 늦게 입관했다. 궂은 비가 내리던 16일에는 영구(靈柩; 관)를 수레에 실어 본가로 돌아와 빈소를 차렸다. 상중에 의금부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찾아와서 갈 길을 재촉했지만, 뒷날에도 비가 계속 내려 빈소 앞에서 곡만 했다.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던 4월 19일 일기가 그 비통함을 드러낸다. “날이 개었다. 일찍 나와 길에 올랐다. 어머님 영연(靈筵)에 인사를 올리며 목놓아 울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간에 어찌 나 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리오. 일찌감치 죽느니만 못하구나...” 장군의 심정을 헤아려 ‘게바위 사모곡’으로 운을 떼 한 수 남긴다.
게 섰거라, 가던 길에 어머닐 뵙고 가자, 바로 코앞 두고서 부음을 전해 듣네, 위로의 말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불효
사무치는 원망을 통곡으로 쏟아내도 모친상 빈소마저 지키기 어렵나니 곡소리 하늘을 찔러 장대비나 뿌려주소
장군의 舊 금성산 묘소, 新 어라산 묘소
해를 넘겨 1598년 음력 11월 19일 노량대첩 중 관음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한 장군은 이듬해 음력 2월 11일에 고향 아산 금성산 아래 언덕에 초장(初葬) 묘가 마련된다. 장군의 부친 덕연군 이정 묘소에서 서쪽으로 1리에 위치하는데, 명나라 도독 진린이 상경하던 중에 막하의 두사충을 보내 잡아 준 곳(현 음봉면 산정리 95)이다. 참고로 명군은 출전 시 반드시 점쟁이·풍수가·화가를 대동하여 전쟁의 운세를 점치고 전쟁상황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현재 둘째 손자 이지석의 묘가 있다. 금성산 묘소 안장 때 노제를 지내고 누군가 바위 뒷면에 ’衛忠巖(위충암)‘이라 새긴 흔적이 남아있다. 16년 뒤인 1614년(광해군 6) 부친 묘소에서 북쪽으로 1리 자리인 어라산 임방(壬方‘ 정북에서 서쪽으로 15도 각도 방향)에 위치한 언덕으로 묘소(음봉면 삼거리 사 2-1)를 옮긴다. 이는 후손 이호빈의 아산읍지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에 따르면 이 지역의 이름난 풍수가인 박이인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장군 묘 입구에는 효종 때 김육이 쓴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뒤편 친족 묫자리를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중간쯤에 부친 이정과 모친 초계 변씨의 이장 묘가 나오고, 묫자리를 벗어나 산길을 걸어 내려와 10여 분 길 따라 오르면 소나무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장군의 묘가 나온다. 박 작가는 대뜸 계단을 오르는 입구의 잘못된 안내판 문구를 지적한다. 음·양력 구분도 없이 탄생일은 양력일로, 사망일은 음력일로 표기하고 있어 관리소에 수차례 수정을 요구해도 들은 척 만 척이란다. 문화재관리의 허술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장군의 묘소는 장군의 심성만큼 정갈했다. 오른쪽 비석이 두 개인 이유는 당초 좌의정으로 추증된 걸 정조가 영의정으로 승진 추증하는 바람에 하나 더 세워지게 되었다 한다. 일행은 준비해 간 술과 제수 음식을 꺼내 차례로 잔을 올리고 절하고 음복을 했다. 박 작가는 “장군 묘는 대개 사연 많은 사람들이 다녀갑니다. 장군께 기도를 드려 장군의 기(氣)를 받아가기 위해서지요”라며 각자 신축년 새해 소원 빌기를 제안한다. 나는 “원하는 일들이 많게 하고 가정과 사회, 국가가 두루 평안해지길” 빌었다. 묘소 왼편 아래로 걸어 내려오면 정조가 직접 지어 세운 신도비가 있다. 명군(名君)은 명신(名臣)을 알아보는 법이다.
충무공이순신기념관(忠武公李舜臣記念館)
1969년 충무공 이순신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졌으나, 2005년 현충사유적재정비사업을 통해 2008~2011년 3년간의 공사 끝에 지금의 신관이 세워졌다. 전시관, 교육관, 사무동 등 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난중일기(국보76호), 이충무공유물(보물326호), 이충무공관련고문서(보물1564호) 등 국보 9점, 보물 20점을 비롯하여 991점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전시된 화포(火砲)를 보면 창같이 생긴 포를 쏘아 적의 배를 파괴하는 가공 할 위력을 실감하게 되고, 펼쳐놓은 『임진장초(壬辰狀草)』를 보면 피난민들을 말을 기르던 섬으로 대피시켜 농사를 짓게 한 애민정신을 느끼게 되고, 펼쳐놓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는 ‘必死卽生 必生卽死’, 즉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장군의 친필을 대하게 된다. 장군의 용모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말들이 많지만 1594년 전란 중에 고상안이 “통제사는 말의 논리와 지혜로움은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였다”는 기록을 남겨 듣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당시 장군은 만연했던 돌림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때라서 수척할 대로 수척해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자주 얼굴을 대했던 유성룡은 “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은 단아하여 마치 수양하며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징비록(懲毖錄)』 중)”고 했고, 홍우원도 자신의 시에서 “팔 척 장신 키도 크고 팔도 길어라, 제비 턱 용의 수염 범의 눈썹”으로 묘사하여 전란의 상흔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안타까우면서도 당연하기도 한 점은 이곳에 안치되어있는 장우성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이 곧 교체된다는 소식이다. 장 화백은 대표적인 친일화가일뿐더러 영정 또한 사실에 기초한 인물화가 아니라는 점이다.(100원짜리 동전 참조)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이곳에 전시된 장검을 보고 집필하게 되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 2m 길이의 장검 손잡이 윗부분에 이런 검명(劍名)이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장군의 맹세는 평생 동안 일편단심 변함이 없었다.
현충사(顯忠祠)
1706년(숙종 32) 지방 유생들의 건의로 세워졌으며 이듬해 사액(賜額) ‘顯忠祠(현충사)’를 받았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일시 철폐되었고, 국권 피탈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20여 년간 향불이 끊겼다.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전 국민 모금으로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고 다시 영정을 모셨고, 1962년에는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 1966년박정희 정권 때 현충사 내부를 확대, 성역화하였는데, 67년에 준공하여 경내에 본전(本殿)·고택(古宅)··유물전시관 ·활터 등이 마련되었다. 이런 연고로 여기저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편액을 여럿 보게 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 정권 이후 재정비에 나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장을 사수하라, 잠시도 눈 못 떼고 충동질 노림수를 지략으로 펼쳤나니 사당의 영정 표정도 흔들림이 없었네
현충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있는 구 현충사에도 우당 정인보(1892~?) 선생이 충무공을 기려 지은 한시 ‘一誓海山立綱常於百代(바다와 산에 한 번 맹세하니 사람의 도리를 세워 100대에 전하였고~~ 補天浴日功德蓋於槿邦(대단한 공덕은 우리나라를 덮었도다!)’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의 장식 글귀)의 싯귀가 마음을 애틋하게 만든다. 충의문(忠義門)을 지나 본전에 들어서면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이순신이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를 보낸 고택 앞에는 충무정(忠武井)이 있다. 원래 아산 월곡(月谷)으로 불렸던 고택 자리는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의 집이었으나, 이순신이 외동딸인 상주 방씨를 아내로 맞이하다 보니 그 뒤로는 이순신의 가문이 상속을 이어가게 되었다. 가족묘 자리를 지나 언덕에 셋째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한 달쯤 뒤 장군은 새벽 2시경 ‘말을 달리다가 길 아래로 넘어지자 막내아들 면이 와 안는’ 꿈을 꾼다. 같은 날 낮에 둘째 열로부터 면이 왜놈과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은 “내가 죽을 것을 네가 대신 죽었구나”하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노량대첩, 당시의 기록
1598년 11월 18일, 남해, 사천, 고성 등에 흩어져 있던 왜군 500척이 남해 창선도에 집결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노량으로 모여든다. 밤 10시경 조명연합군은 순천 왜교성 부근 바다에서 2시간에 걸쳐 노량으로 이동하여 명나라 진린은 400여 척 배에 1만 9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좌협으로 사천 죽도 부근에, 조선 수군의 이순신은 80여 척 배에 7천3백 군사를 거느리고 우협으로 남해 관음포에 대기하였다. 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 왜군 500여 척 중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선봉군 300여 척이 노량 좌단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정오까지 약 10시간 교전이 벌어졌는데, 북서풍이 불었으므로 화공(火攻)으로 공격, 적선 200여 척을 불태우거나 파괴했고 아군은 명나라 2척, 조선 수군 4척이 파괴되었다. 『진경문』, 『예고진병일록』에 의하면, 해가 저물어 남해 앞바다에 왜군 전선이 출현한 것을 보고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좌우 복병을 거느리고 앞장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우리 수군은 노를 급히 저어 진군했고, 삼경(밤 11~01시)에 노량 앞바다에서 적선과 교전을 벌인다. 애석하게도 장군은 미오(未午; 낮 11~15시 사이)에 적의 철환을 맞아 전사하게 되지만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까 봐 사실을 발설하지 않은 채 해 질 때까지 싸워 크게 이겼다. 다음날 고니시가 부산포 쪽으로 줄행랑을 치면서 전투는 끝이 났다. 이날의 전과를 비교해 보면, 선봉에 섰던 조선 수군은 통제사 이순신을 비롯해 이영남 가리포첨사, 고득장 흥양현감, 방덕룡 낙안군수 세 장수를 포함해 23명이 죽었고(湖南節義錄호남절의록 기록), 명의 장수도 부총병 등자룡과 부장 도명재 2명이 죽었다. 왜군 측은 36명의 장수와 군사 수천 명이 죽고 도주한 배는 50여 척에 불과했다. 8일 뒤 좌의정 이덕형이 선조에게 노량대첩의 상황을 긴급보고했다. “이달 19일 사천 남해 고성에 있던 왜적 300여 척이 합세해 노량도에 도착했을 때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싸웠고, 명나라 군사 또한 합세해 나아가 싸웠습니다. 왜적은 크게 패해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셀 수가 없었고, 왜선 200여 척이 부서져 침몰했으며, 죽고 다친 자는 수천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판자, 무기, 의복 등이 바다를 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를 수 없었고, 바닷물이 다 붉었습니다. 전투 중에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이 철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왜적 100여 척은 남해로 물러나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던 왜적들도 남해 강 언덕에 쌓아놓은 양식 쌀마저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수치는 실상(조선 수군 사망 23명, 왜적 퇴각 50여 척)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그 날의 처절하고 절박했던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순신의 전몰과 관련한 기록은 『선조실록(宣祖實錄)』, 『징비록(懲毖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백사집(白沙集)』, 『난중잡록(亂中雜錄)』 등 여러 사료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전사하며 남긴 유언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말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무찔렀다(死舜臣 破生倭)”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내 죽음을 감춰라, 내 비록 죽더라도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아냈듯 음덕을 베풀고 싶다, 회야 완아 명심커라
을러대는 기세를 멈추지 말아다오 알아서 할 일은 죽어서도 해야 한다 리더십 변치 않음은 장수의 몫이니라
지나는 바람이 차 내 몸이 식어가도 마지막 승전 끝낸 뒤 내 눈을 감겨다오 라이벌 고니시에겐 얼씬 마라 전하고
장군의 심경으로 그날의 피격장면을 시로 옮겨보았다. 장군이 피격될 때 장군 곁에는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있었다고 한다. 철환이 뚫고 나간 옆구리와 등 자국이 겨울의 찬 바람에 식어가면서도 장군은 군사의 사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장군의 숭고한 전몰 422주년을 맞아 현충사 영정 앞에 묵념을 올리고 돌아섰다. 장군의 충정은 대대손손 전해져 조선을 통틀어 배출된 통제사 200여 명 중 12명이 덕수 이씨 집안에서 배출되었을 만큼 무인 명문 집안의 대를 이어갔다. 올해 역사기행의 막을 내리는 값지고 소중한 자리였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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