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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연천 유적 답사를 다녀와서...
 
신완섭 기자   기사입력  2020/07/20 [10:36]

7월 19일 일요일 (사)자연과함께하는사람들(대표 이금순)의 교사 모임인 참자연교사회(대표 김현복)가 주관하는 답사행사에 동참했다. 행선지는 경기 북부 연천군. 중부권에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대로 집 밖을 나서자 억수 같은 비가 퍼붓는다. 종종걸음으로 출발장소인 군포시청 앞에 다다르니 벌써 신발 안으로 물이 가득 배어들었다. 오전 8시 반 답사단 18명을 태운 버스가 굵은 빗줄기를 뚫고 외곽순환도로-통일로를 거쳐 첫 방문지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삼각형의 비밀, 호로고루(사적 467호)와 당포성(사적 468호)

 

  임진강 주변의 고구려성  조감도 © 군포시민신문

 

임진강은 과거 호로하, 표하 등으로 불렸는데, ‘호로’라는 명칭에 오래된 성채라는 뜻의 ‘고루(古壘)’를 붙여 이름 지어진 호로고루의 축성 역사는 고구려의 남진 초기인 4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목책을 쳤으나 서기 551년 한강 유역을 상실한 고구려가 임진강까지 후퇴하게 되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통해 재정비한 곳이다. 천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 머잖아 원형에 가까운 옛 흔적을 볼 날이 있으리라, 성벽을 한쪽을 메운 검은 빛깔의 현무암이 빗물을 품어 더욱 짙고 성 위에서 바라본 임진강물도 검푸르다. 역사의 흔적을 놓치지 않으려고 찬찬히 살피며 걸었다.

 

연천 소재 임진·한탄강변의 고구려 3대성(호로고루/당포성/은대리성)은 모두 삼각형 모양을 띤다. 왜 삼각형일까? 현장을 둘러보다 보니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린 과학적 설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의 남쪽과 북쪽은 강의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높이 15m 이상의 수직 절벽이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진입이 가능한 동쪽에만 길이 90m, 높이 10m, 폭 40m의 견고한 성벽을 쌓아 강 건너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아군이 드나들기 쉽도록 설계한 것이다. 알다시피 평면도에서 삼각형은 가장 안정적인 모양새다. 어느 위치에서건 모이고 흩어짐이 용이하여 방어는 물론 기동력 있는 공격을 가능케 한다. 

 

 호로고루 성 동벽을 지나며 (사진=이성동)   © 군포시민신문

 

또 3곳의 성은 모두 걸어서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 가까이에 위치한다. 그만큼 쉽고 빠른 도강(渡江)을 엄히 경계해야 하는 곳이다. 특히 임진강 하류에서 인근 고랑포까지는 수심이 깊어 배 없이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호로고루 부근의 여울목은 개성에서 육로로 남하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의 요충지였다. 삼국 시대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투기록이 여러 번 등장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오후 당포성 방문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3덕(德)의 주역, 신라 마지막 경순왕릉(사적 244호)

 

멀지 않은 곳의 경순왕릉에 당도할 즈음 사납던 비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경순왕은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재위기간 927~935)이다. 전왕인 경애왕이 후백제의 공격을 받아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며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국가 기능이 마비된 점을 통감하고 신흥 고려의 왕건을 찾아가 스스로 왕위를 넘겨준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정승공에 봉해졌으며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었다. 심지어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고 귀부 43년 후인 978년 4월 4일 82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장수를 누렸다. 고려 5대 왕인 경종 3년에 거(去)하였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다.

 

 경순왕릉 (사진=최인화)   © 군포시민신문

 

이날 그곳 해설사는 경순왕이 평화적으로 왕위를 내주어 신라 유민들에게 3덕(德)을 베풀었다고 설명한다. 제1덕은 전쟁 대신 평화적으로 왕위를 이양한 덕택에 백성들이 무탈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제2덕은 멸족을 피할 수 있어 경주 김씨 후손들이 번창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제3덕은 끝까지 항전했던 백제와 달리 피비린내를 일으키지 않아 신라 수도 경주의 문화유산들이 지금껏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3덕을 베푼 덕분인지 그가 세상을 뜨자 신라 유민들이 발 벗고 나서서 경주로 장례를 모시고자 벌떼처럼 장사진을 이뤘는데 장례행렬이 개경을 벗어나자 개경이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깜짝 놀란 고려 조정이 긴급히 ‘왕의 구(柩)는 조정 밖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 하며 임진강을 건너기 직전 개경에서 70리 거리인 이곳 장단부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는 것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신명 나게 설명해 준 해설사의 열성과는 달리 왕릉 보존 상태는 취약했다. 왕릉의 풀들이 상당 부분 말라 죽어 있어서다. 말인즉 실수하여 제초제를 잘못 뿌린 탓이라는 데, 보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맛살을 찌푸릴 만큼 변명의 여지가 약했다. 또 설명 중 일부 내용에 근거가 의심되는 과장 또는 비약이 섞여 있다고 역사학자 이진복 교수가 지적하자 서울특별시 시사편찬회 연구관을 지낸 나각순 박사도 해설사로서의 평정을 잃은 처사라고 일침을 놓았다. 

 

여행의 진미, 식도락

 

여행의 진미는 뭐니뭐니 해도 식도락에 있다. 오전 일정이 끝나기 무섭게 연천 토박이가 추천한 <유일순대국> 집을 찾아 신망리역으로 달렸다. 옛날 경원선이 서던 시골 역사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로 바뀐 듯 하나, 순대국집은 50여 년째 이곳을 지키면서 원조맛집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진한 국물맛과 찰진 수육·순대가 잘 어울려 깊은 맛을 낸다. 거기다 연천 율무 막걸리로 허기진 속을 채웠으니 오후 일정은 쉬엄쉬엄해도 좋으리.  

 

시조(始祖) 신숭겸을 알현한 숭의전(사적 223호)

 

당포성을 둘러본 후 마지막 답사코스인 숭의전(崇義殿)으로 향했다. 띄엄띄엄 내리던 비도 완전히 걷힌 상태라 발걸음이 가벼웠다. 특별히 평산 신씨 제정공파 27세손인 내 집안의 시조 신숭겸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라서 마음까지 설렜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서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 자리에 조선 태조 6년(1397년)에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으로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문종 1년(1451년)에 전대의 고려 4왕과 고려 때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을 배향토록 하였다. 나는 잠시 위패가 모셔진 배신청(陪臣廳) 안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신숭겸 시조 위패 앞에서 묵념을 하였다.

 

  앙암재에서 숭의전을 설명하고 있는 나각순 박사 (사진=이금순)  © 군포시민신문


앙암재, 숭의전, 이안청 등 내부를 다 둘러보고 담 밖으로 나서는 데 일군의 무리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다가가 보니 500년 된 느티나무에 솔부엉이 두 마리가 서식하고 있어 이를 보려고 구경꾼들이 몰려든 것이다. 쉽사리 거처를 옮기지 않는 부엉이의 특성상 조금 소란을 떨어도 도망가지 않고 포즈를 취해준다 하니 초상권 사례는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숭의전을 떠나지 않는 솔부엉이처럼 조상의 음덕에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하리라. 

 

  “왕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고려에서 조선을 지나/ 아직도 입실 중인 신하들/ 나라는 사라져 어디에 있나/ 개성은 길이 막히고/ 잠두봉 아래 임진강만 흐르는데/ 대문 앞 오백 살 먹은 느티나무/ 아직도 희망이 남아/ 솔부엉이 부부 새끼 둘 품었다/ 부엉부엉 연천 하늘을 날아/ 철조망을 넘고 시간을 건너/ 비단 배 넘치는 벽란도로 가려나/ 왕들은 죽어 어디로 가나(시 ‘봄날의 서재’ 일부)” 느티나무 앞에 세워진 전윤호 시인의 싯구가 천년의 아픔을 자아내고 있다.  

 

시인이 만든 국내 최초의 종자박물관 

 

  종자와 시인 박물관을 상징하는 모습 (사진=남동현)   © 군포시민신문

 

궂은 날씨 덕분(?)에 일정이 다소 단축된 것 같아 개관을 앞둔 <종자와 시인박물관> 신광순 대표에게 안부 전화를 넣었더니 지금 박물관에 나와 있다고 우리 일행을 초대하겠단다. 행사주관 정미림 선생에게 의사를 전달했더니 이금순 대표가 참석자 다수표결로 의사를 정하자고 한다. 거수 결과 전원 찬성, 졸지에 특별방문이 이뤄져 박물관으로 내달렸다. 지난 5월 취재차 방문했던 <아우라지매운탕> 집을 지나쳐 다시 연천읍으로 들어선 시간이 3시 반경, 신 대표가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아준다.

 

  종자와 시인 박물관 신광순 대표 (사진= 남동현)   © 군포시민신문

 

<종자와 시인박물관>은 내가 사는 군포 8단지 옆 9단지에 살고 계신 신광순 시인이 종자사업으로 번 사재를 털어 고향인 연천 이곳에 야외정원, 유명시비, 전시박물관을 건립하여 종자 전시와 문학작품 전시 준비를 모두 끝내고 개관 허가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껏 준비하는 데 38년간 공들인 만큼 현재로도 전혀 손색이 없지만, 2만 평 규모에 계속 콘텐츠를 보강할 거라 한다. 평범한 내가 보기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열정이다. 특히 익살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한 문구들이 일행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가 착안한 ‘無’ 조형물에는 “오늘 내가 끌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당기면 당길수록 커지는 것이 욕심이고 증오심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오늘도 기를 쓰고 당기고 있는 나!” 잠언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눈물 금지구역’을 지나며 시비를 읽는 동안 우리 모두는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껴본다.

  

글 맺기

 

오후 4시 반 모든 일정이 끝났다. 1시간 반 걸려 돌아가야 하는 귀갓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비가 그친 탓일까. 빗줄기만큼이나 강렬했던 역사 유적지들을 뒤로 하며 냉정을 되찾아 본다. 먼 과거로의 여행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선조들의 행적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과 지혜는 언제나 현장에서 증폭된다.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의 다툼이 잦았던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은 오늘 내린 비만큼 인상적이었다. 현장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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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20 [10:36]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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