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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목적: 28세 군 제대 후 합동통신에 입사한 리영희 선생의 서울 신혼시절(28세~35세) 현장탐방을 통해 의식의 형성 과정과 슬픈 가족사를 살펴보고자 함 기행코스: 원효로5가 첫 신혼집 터 -> 을지로입구4거리 합동통신 자리 -> 제기동 생가 -> 고려대 안암캠퍼스 -> 갈월동 민주화운동기념관 참여단체: 리영기념사업회/경기중부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경기중부아파트노동자협회 21명
사상의 은사 故 리영희 선생(1929~2010)은 1956년 11월 13일 전북 군산에서 파평 윤씨 집안의 장녀 윤영자(1932~ )와 결혼식을 올렸다. 부산 제5관구 사령부의 육군인쇄공창에서 대위로 복무 중에 군산 해양대학교 항해학과 재학(1946~1950) 시절 하숙집 아주머니의 중매로 1년 반가량 연애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간신히 결혼에 골인했다. ‘간신히’라는 수식어를 단 이유는 장인이 된 사업가 윤평숙의 눈에 선생은 평안도 출신 시골뜨기에다 별 볼 일 없는 군인 신분이어서였다. 단지 연애편지를 검열 단속하다가 읽게 된 선생의 지적인 문장들을 보고는 마음을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부산에서의 첫 신혼생활 첫 신혼생활은 선생의 근무지와 그리 멀지 않은 부산진구 양정동의 산동네 8평 전셋집이었다. 그러나 모시고 살던 아버지 리근국의 회갑이 그 이듬해였음에도 회갑연을 차려드리지 못할 정도로 살림 형편이 보잘것없었다. 이때의 심경을 자서전 「역정(歷程)」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융통성이 없는 장교였다. 남들이 하는 짓(군수품 빼돌리기)을 못함으로써 부모님과 나 자신에게 자초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당시 대위 월급이 얼마였는지 기억에 없지만 내 주머니에는 보통 왕복 버스비밖에 없었다. 아버지 회갑을 위해 보급품 종이나 쌀 몇가마니 정도를 변통하는 것은 당시의 장교로서는 으레 할 수 있는 짓이었으나 결국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가 몇 해 뒤 돌아가신 뒤에야 해가 갈수록 가슴에 사무친다.”
합동통신 입사로 시작된 서울생활 선생은 군 제대를 앞당길 요량으로 고시3과(외무고시)를 목표로 공부하던 중 합동통신사의 외신기자 공개채용 기사를 보고 1957년 7월 21일 시험을 치른다. 연이은 면접까지 통과하며 50대 1의 경쟁을 뚫고 최종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나머지 3명은 모두 서울대 졸업생일 정도로 치열했던 경쟁에서 채용된 건 면접관들이 깜짝 놀라워할 만큼의 7년간 통역장교로 쌓은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10명가량 최종면접 날에도 그의 복장은 군복 차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쑥한 양복차림이었으니 당시 총무국장이 열외로 그를 불러내 복장을 제대로 갖출 것을 요구했을 정도였다. 이에 선생은 “국장님 죄송합니다만 아직 제가 현역군인이고 부산에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당장 나가서 차림을 바꿀만한 형편이 못 됩니다.”라고 통사정했다 한다. 아무튼 합동통신에서 그를 받아준 덕분에 우리는 ‘위대한 언론인 리영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해 8월 16일 소령 진급명령과 제대비 8천원(=현시세 2백만원 정도)이 덧붙여진 예편통지서를 받아들고 만 7년간의 군 생활을 청산, 곧바로 서울로 아내와 함께 올라와 원효로5가 한옥집(현 서울역 대로 건너 교보생명 자리)에 세 들어 외신부 기자 생활에 돌입한다. 선생의 표현대로 말하면 수재들 틈바구니에서 ‘이를 악물고 지지 않으려는 투쟁’을 시작한다.
훗날 그는 스스로 ‘외신부기자 체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체질의 근거로 ➀사교성이 떨어져도 괜찮고 ➁기자사회에 학맥이 없어도 견딜만 하고 ➂공부에 대한 개인적 애착이 강하다는 점을 들었다. 선생은 초등학교 과정에서 일부 한글을 배웠을 뿐, 고등교육 과정은 일본어로만 배운 탓에 우리말이 서툴고 평안도 사투리와 표준어를 제대로 분별해내지 못해 애를 먹었다. 몰래 초등·중·고 국어교과서를 가지고 독학으로 공부해 우리말을 완전히 새롭게 마스터한다. 실제로 선생은 언어 천재로 불릴 정도로 영어·프랑스어·일본어·중국어 4개 외국어에 능통했다. 오죽했으면 “우리말이 가장 서툴러 곤혹을 치를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을 정도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일이 손에 익어지고 첫아이가 태어날 무렵, 부산에 남아계신 부모님을 모시고자 이문동 318-3번지로 셋집을 옮겼다. 이곳에서 태어난 희주로 인해 잠시 가족 모두가 웃음꽃이 만발했으나 희귀병인 고환암에 걸려 한쪽 불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비와 치료비를 충당하느라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하루 2건의 부업까지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섰으나 첫아이는 1년 2개월 만에 저세상으로 가버리고 만다. 이때의 심경을 육성으로 들어보자.
“아버지를 닮지 않아 피부가 희고 잘생긴 희주의 탄생으로 집안은 바빠졌고 셋방이지만 웃음이 꽃피었다. 그런데 여덟달가량 된 무렵에 아기의 한쪽 불알이 땡땡해지고 충혈되며 부어올랐다.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에서의 진찰 결과는 ‘고환악성종양’이라는 것이었다. 월남한 이래 처음으로 훈기가 돌려 했던 작은 가정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여덟 달밖에 안 되는 몸에서 한쪽 불알을 제거하게 되었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던 나의 앞으로 끌려나온 병상에서 아직 마취가 깨지않은 채 잠들어 있는 어린 아들의 얼굴은 천사같이 평화로워 보였다. ‘이 천사같은 아기가 그런 병에 걸리다니!’ 눈앞을 지나가는 첫아들의 참담한 운명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아내와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 나는 빚진 수술비와 치료비를 벌기 위해 부업을 찾았다. 다행히도 두 군데가 나타나 둘을 다 하기로 결심했다. 연합참모본부와 아동구호재단 번역일이었다.” -<역정> 351~352페이지-
1959년 7월 희주를 망우리에 묻어주고 난 뒤 선생은 상심에 젖어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때 다시 활력을 되찾아 줄 기회가 찾아왔다. 1955년부터 시행 중인 미국 풀브라이트 계획에 따른 6개월간의 미국 연수생으로 선발된 것이다. 그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노스웨스턴대학 연수에 참가할 준비를 하던 중 또 다른 비보를 접하게 된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틈만 나면 손주의 무덤을 찾아가시던 아버지가 같은 해 8월 땡볕에 3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오시다가 길에서 쓰러진 것이다. 왕진 온 의사는 뇌일혈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는 며칠 만에 손주곁으로 가신 것이다. 한 달 새 손주와 아버지의 죽음이라니, 너무나 가혹한 하늘의 처사였다. 이때 부산 양정동에 사실 때 남긴 일기첩을 보게 된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자식의 성미가 급하고 너그럽지 못하며, 말과 행동이 가파르고 곧아서 상대방의 생각이나 말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높이고 오만해서 세상 살아감에 있어 실패가 많겠다. 수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정> 363페이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러 대목에서 말로 타이를 수 없는 아들에 대한 원망과 걱정을 자나깨나 하고 계셨던 것이다. 일기첩을 꼼꼼이 다 읽고 반성과 통한의 눈물을 훔쳤다. 집 걱정 말고 미국 연수에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망우리 선친 무덤을 찾아가 잠시 이별을 고하고 1주일 정도 지체되어 미국 연수단에 합류했다. 이듬해 1월 말에 귀국하면서 남긴 연수 소감을 소개한다.
“처음으로 미국 사회와 마주한 6개월간의 미숙한 눈으로 내면적 실체가 파악될 까닭이 없었다. 고작 확연하게 재확인된 소득이라고 한다면 격심한 빈부 차와 흑백 인간의 인종차 정도였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사회의 누구에게나 ‘꿀과 우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낙원이 아니었다. 특히 흑인의 처지가 그러하다는 것은 가는 곳마다에서 확연했다. ... 다만 워싱턴 포스트와 쌓은 관계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알게 된 이승만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귀국하는 나는 다소 과장하자면 ‘용기백배’했다. ‘이제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귀국의 길을 재촉했다. ‘자유당 정권이 쓰러지는 날까지 싸우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역정> 398~402페이지-
1960년 4.19의거에 동참하다 1월 말에 돌아오기 전에 전셋집은 휘경동 위생병원 뒤 언덕의 단칸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악재가 겹쳤던 이문동 집을 무조건 벗어나기로 한 점도 있었으나 6개월간 무급휴가로 미국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동안 수입이 끊어진 탓이기도 했다. 즉시 합동통신사로 복귀하여 열심히 일에 매달리던 중 마산에서 3.15부정선거 이승만정권 규탄대회 이후 최루탄에 희생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지방에서부터 전 국민의 분노가 들불처럼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때 리영희 기자가 미국 워싱턴 포스터 로버트 H. 이스터브룩 주필에게 보내 대신 실었던 3월 17일 자 사설 ‘Rotten Victory(썩은 승리)’를 소개한다.
태양의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것과 같은 확실성을 가지고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에서 또 한 번 선거를 조작했다. 승리를 위해서 동원된 협박과 공갈, 그리고 억압적 행위의 정도는 외국관찰자들이 증언하지 않았던들 도저히 믿어지질 않을 것이다... 선거기간 중에 이루어진 온갖 추악한 행위가 이미 끝나버렸다는 이유에서인지 미 국무성은 그저 분명치 않은 비난을 발표하고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실정은 미국의 원조가 그 본래의 목적인 의회정치를 유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날카롭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역정> 415~416쪽- 선생이 보낸 3.15부정선거 자료를 근거로 이스터브룩 주필이 사설로 구성
남쪽 마산에서 발화한 혁명의 불길이 한 달이 지날 무렵인 4월 18일 오후 1시, 3천여 명의 고려대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국회의사당(현 세종로 조선일보 옆)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날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10여 명의 고려대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게 된다. 이날의 상황을 전하는 선생의 증언을 들어보자.
“마침내 서울에서 분노의 젊은 화산이 터졌다. 4월 18일 오후, 4.19의 서전인 고려대학생의 봉기다. 그 전날 나는 집에 가지않고 회사 숙직실에서 잤다.... 이튿날 4월 19일, 조간신문을 펼쳐든 시민과 학생들은 경악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밤 사이에 일어난 소름끼치는 사건으로 그들은 드디어 ‘최후의 순간’이 온 것을 알았다. 그들을 분격케 한 이유는 수십 명의 중상자 외에 학생 한 명이 반공청년단에 맞아 죽었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뒤에 오보임이 밝혀졌지만, 오보치고는 위대한 역사적 역할을 한 귀중한 오보였다. 이날 아침부터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한 27일까지 8일간의 처절하고 감격적인 ‘4.19혁명’의 전모는 어떤 위대한 문인도 사상가도 글로써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역정> 427~429페이지-
선생이 외신부기자로 일한 합동통신사는 을지로입구 사거리(현재 하나은행 본점 자리) 2층에 있었으므로 당시 벌어졌던 모든 데모와 시위의 현장은 창밖만 내다보면 한눈에 들어는 곳이었다. 선생은 4월 6일에도 민주당과 재야세력 합동 데모 대열에 합류했다가 한 노인네가 봉변당하는 것을 목격, 그분을 방어해 주다가 경찰서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 노인네는 민주사회당 전진한 위원장이었는데 졸지에 그의 비서로 몰렸던 것이다. 결국 통신사의 해명으로 풀려났으나 상사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4월 18일 이후에는 이승만이 하야 발표를 하던 4월 26일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단순 취재를 벗어나 데모 대열에 합류했다. 하야 발표 하루 전날 밤에는 간이의자와 메가폰을 들고 나가 시위대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폭력피해를 막으려는 무모함도 보였다. “여러분, 이승만정권은 이미 쓰러졌습니다. 이승만이 하야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여러분이 승리했습니다. 승리한 전쟁에서 더 이상 희생자를 내면 안됩니다.” 외침은 성난 시위대를 오히려 자극해 “저 새끼 죽여라!”는 함성과 함께 하마터면 골로 갈 뻔한 위험천만한 일도 있었다. 선생의 자서전 「역정」에서 위 대목을 읽고 남긴 나의 졸시 ‘1960년 4월 25일 그날’ 한 수를 소개한다.
1960년 4월 25일 그날, 을지로 한복판이 안과 밖으로 나뉘었다. 어둠보다 일찍 도착한 시위대가 안쪽을 점거하자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바깥에서 어둠 속 함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김주열 살인자를 처단하라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정돈되지 않은 각양각색의 구호들이 난무할 때 계엄군의 총검도 소리 없이 번뜩였다
일촉즉발, 안팎의 경계가 허물어질 찰나 한 사내가 의자 2개를 포개 올라가 “무모한 충돌을 삼갑시다, 이승만이 곧 하야합니다. 여러분이 승리했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쳐 댄 끝에 팽팽한 실랑이가 오히려 그를 고꾸라뜨렸으나 어둠 속 총검도 홱 하니 공중으로 비껴갔다
냉정을 되찾은 다음 날,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하고 함성이 진동한 거리에는 혁명의 깃발이 찢겨 진 채 조용히 나뒹굴고 있었다. 봄바람이 실없이 멍든 보도 위를 보듬으려 애썼으나 사내는 또 다른 항거를 예견하고 있었다
오뉴월의 붉은 깃발 아래, 5월 광주항쟁과 6월 민주항쟁의 기운이 소름 돋듯 꿈틀대고 타오를 광경을 떠올리며 눈물범벅으로 오열하고 있었다
1961년 5.16쿠데타, 박정희와의 악연 휘경동 단칸방에서 2월에 장남 건일이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비명에 가버린 첫아들 희주와 항렬 柱 자를 쓰지 않고 건강하게만 자라달라는 뜻으로 ‘健一’이라고 이름지었다. 석달 뒤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능한 민주당정권을 몰아내었다. 이승만 정권 못지않게 타락한 군인에 대한 불만은 합동통신사 자체 회의 때 다음과 같이 분출된다.
5.16쿠데타 발발 다음 날 출근해서 “부패한 군대가 혁명을 하겠다니 당치도 않은 말이에요. 이 국가에서 제일 썩은 세력이 군대인데, 그 군인들이 어떻게 바로 잡겠다는 말이에요. 어불성설이에요... 새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나 됐다고 혁명 운운합니까. 더구나 군대가 말이에요. 우리는 힘닿은 데까지 군부 통치를 반대해야 해요. 반대합시다(리영희 성토의 변). 그날 낮부터 비상계엄령하의 언론 출판 집회의 통제와 사전검열이 실시되었기 때문에 나갈 수 있는 기사도 없었다.” -<역정> 491페이지-
이 해 11월에 보름간 일정으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방미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수행하는 세 사람의 기자 중 한 사람으로 조선·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동행한다. 그러나 수행 12일만에 우리 정부의 지시에 의해 먼저 귀국조치 당한다. 다른 언론과 입장을 달리하는 특종기사를 타전했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당시 리영희 특파원의 입을 빌려 들어보기로 하자.
[워싱턴 11월 15일발 합동 이영희 특파원] “미국 정부는 14일 한미정상회담 두 시간 후에 발표한 박-케네디 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경제발전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폭넓은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박 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재정적 뒷받침을 요구한 제1차 경제 5개년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한미 양국 지도자의 회담 진행 실무를 책임졌던 미 국무성 경제담당 당국자가 합동통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 한 마디로 요약하면 케네디 정부의 태도는 유보적이었던 것이다. 케네디는 앞으로 군사정권의 태도를 보면서 결정하겠다는 것이지, ‘달라는 대로 다 주기로 약속했다’는 식의 다른 수행기자들의 기사와는 전혀 달랐다.” -<역정> 514~517페이지-
1962년 제기동에 마련한 보금자리, 진보의 성지가 되다 34살 되던 해에 ‘운 좋은 달러벌이’로 생애 처음 내 집을 마련하게 된다. 벌이의 횡재는 알고 지내던 미 공보원에서 ‘한국인의 VOA(미국의소리, Voice of America) 라디오 청취상황 반응조사’ 번역 일을 의뢰해 온 덕분이다. 총 27만 매의 응답엽서 절반량을 3개월 내 번역하는 조건이었는데, 난이도는 거의 없었으나 엽서 15만 매가량을 번역하는데 처남까지 동원하고서야 작업을 완수했다. 한 매당 번역료 몇 센트라도 매수를 곱셈하니 집을 살 정도의 돈이 되었다. 마침 딸 미정이도 곧 태어날 거라서 어머니와 아내, 자식 둘 해서 다섯 식구가 살만한 집을 찾아나섰다. 재미난 사실은 딸 이름을 짓지 않은 채 ‘작명 미정(未定)’이라고 써 둔 수첩을 보고는 즉석에서 동음인 아름다울 미(美), 밝을 정(晶) 자를 붙여 미정(美晶)으로 지었다 하니 장남 작명 때처럼 단순 유식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집을 알아보는 와중에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불시에 화폐개혁을 간행, 모든 예금은 동결하고, 구화 10환을 신화 1원으로 교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부정축재한 검은 돈을 발본색원하고 서민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한 조치에 선생은 개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어머니와 아내는 내 집을 강탈당했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다행히 예금동결 나흘만에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백지화함으로써 생애 첫 내 집 마련은 차질없이 이루어졌다.
아내는 처음 서울로 올라와서 세 들었던 원효로5가의 한옥집을 지목했다. 주인집 대청마루가 그렇게 탐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집 크기나 가옥 구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복덕방을 뒤진 끝에 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약령시로13길 24-3) 집으로 계약했다. 이곳은 지금의 경동시장 안쪽에 자리하여, 당시에는 미나리꽝 속에 드문드문 있던 한옥인데 지금도 그때 그대로의 대문과 집이 보존되어 있다. 대지 26평에 건평 13평으로 마당이 있는 아담한 집은 그 이후로 14년간 선생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과의 대담집 「대화」를 펴낸 임헌영이 ‘진보의 성지’라 칭할 만큼 억압받고 탄압받는 지식인들의 도피처이자 지적 탐구자들의 정보부 역할을 담당했다.
“야만적인 탄압의 시대에 고민하는 젊은 작가, 지식인, 젊은 대학교수나 강사들, 신문기자들이 모여 막걸리 사발이나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시국을 한탄하는 그런 장소였어요. 그때 그 많은 후배 지식인들이 제기동의 내 집에 모인 까닭은 여러 가지지만, 무엇보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국내외 시국 정세를 앞서 내다보고, 그것을 설명해서 의미를 밝혀주고 내일의 전망을 예측해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지.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캄캄한 세상에 내가 한 줄기 빛이 되어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상태였지요.” -<대화> 311~312페이지-
제기동 시대가 저물기까지 1964년 36세 때 직장을 조선일보 정치부로 옮긴 뒤 11월에 유엔총회 남북한 동시초청안 관련기사로 필화사건으로 구속 기소되나 같은 12월 불구속으로 된다. 이 해에는 둘째 아들 건석이 출생했다. 1965년 외신부장을 맡은 후, 1967년부터 창작과비평 정경연구 등에 본격적으로 국제논평을 기거하기 시작, 1969년 41세 때는 배트남 전쟁과 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적 입장 째문에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조선일보에서 퇴사(제1차 언론사 강제해직), 1970년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옮긴 뒤에더 1971년 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또다시 해직된다.(제2차 언론사 강제해직)
1972년 42세 때 한양대 신문학과 조교수로 임명되고 국제인권단체인 엠네스티 한국지부 창설에도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1974년에는 한양대 부설 중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같은 해 6월 5일 첫 단행본이자 부동의 사회과학도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를 출간한다. 그러나 1976년 제1차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교수직에서 강제 해임되어 실업자가 된다. 재기를 다지며 14년만에 제기동 시대를 접고 이듬해인 1977년 광진구 화양동으로 이주한다.
고려대 안암캠퍼스 내 4.18기념탑 제기동 리영희 생가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고려대학교는 선생과는 직접적인 학연은 없다. 다만 앞서 밝힌 바대로 1960년 4.19혁명의 시발이 되었던 하루 전날 4.18 고려대학생 의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래서 4.18기념탑과 4.18기념관을 찾아간 김에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한 이용익 동상과 1923년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4년제 고려대학교로 재설립한 인촌 김성수 동상을 둘러 보았다.
4.18기념탑은 앞서 설명한 대로 1960년 4.19혁명을 촉발시킨 4.18 고려대생 의거를 기념하여 1년 뒤인 1961년 4월 18일 세운 탑으로 지금도 고려대생들의 긍지로 여겨지는 기념탑이다. 캠퍼스로 들어서며 상품이 걸린 퀴즈를 내었는데, 고려대의 상징동물은 호랑이, 그러면 상징교목은 뭔지를 묻자 아무도 답을 못했다. 다섯 개의 예(참나무/소나무/잣나무/단풍나무/대나무)를 제시하고도 몇 번을 찍은 후에야 정답이 나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번 맞추어 보시라. [정답은 맨 뒤에] 교내에 있는 우당기념관은 누구를 기념하는 곳이냐는 질문에는 선뜻 ‘이회영’이라는 답이 나왔다.
갈월동 민주화운동기념관 올해 6월 10일 개관한 민주화운동기념관 자리는 1976년 10월 당시 내무부장관 김치열의 발주로 유명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에 의해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착공한 이래 2000년대 초반까지 악명을 떨친 곳이다. 2005년부터 2018년까지 경찰청 인권센터로 운영되었다가, 2015년 3월 기념관 부지로 검토되어 2021년부터 2024년까지 건립공사를 하여 올해 6.10항쟁 기념일에 맞춰 개관한 것이다.
이날 우리 일행은 오후 1시 반부터 1시간 10분가량 손희정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대공분실 건물동(M2) 1~5층과 신설 건물동(M1) 지하층 일부를 단체 관람했다. 손 해설사는 “이곳의 행정동은 갈월동이지만 인근 1호선 남영역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남영동 대공분실’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76년 설립 당시 간첩을 잡아 취조한다는 명분으로 세웠으나 실상은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특히 5층 509호실은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을 물고문하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조작발표와 달리 사실은 경부압박질식사로 사망케 한 현장이고, 515호는 마이크방으로서 1985년 당시 김근태 민청련 의장을 취조 고문했던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시켜 놓았다. 김근태는 대공분실에서 풀려난 후 모숨을 걸고 대공분실의 숱하게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 시킨 이곳을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조상하게 된 데는 ‘소위 애국을 가장하여 조작 위조한 여러 사건의 전말과 진실을 밝혀 민주주의를 사수하고 역사바로세우기를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돌아와 관련 자료를 추가로 찾다 보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1976년부터 2005년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됐던 고문 피해자 384명에 관한 실태조사를 담은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2018 출간) 보고서를 펴냈다. 이에 따르면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최초로 체포한 이는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로 밝혀졌다. 선생과의 대담집 「대화」(한길사)에 보면 1977년 11월 23일 아침 7시경 화양동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던 중 밖에서 기다리던 수사관들에 의해 대공분소로 연행되었다. 중국의 실상을 소개한 「8억인과의 대화」(창비,1977)가 문제가 되어 이후 2년간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두 차례나 이곳에서 심문 고초를 겪었던 게 시초였다.
이날 기행의 주제가 ’리영희 선생의 서울 신혼시절‘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신혼의 달콤함은 1할에 불과하고 안타깝고 애석한 사연들이 9할을 차지했다. 다만 2,30대의 청춘을 망가뜨린 가족의 불행과 사회적 불의와 부정, 이성을 짓누르는 우상에 굽히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여 사상의 무사(武士)로 조련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런 점에서 다음 발자취기행의 주제는 ’장년의 투사, 리영희‘가 되지 않을까 싶다. 함께 해준 리영희기념사업회, 경기중부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경기중부아파트노동자협회 관계자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본문 퀴즈 정답: 잣나무 (곧고 바르게 자라는 줄기의 굳건함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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