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명 이야기 22. 우리말은 쫓겨나고 남의 말이 안방을 차지하다 – 먹는 물[食水]몇 년 전 유명 일간지에 실린 칼럼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 한자를 모르면 여전히 언어소통에 장애가 크다. 전국의 지명과 산과 강이 하나같이 한자 뜻으로 이뤄졌고, 그 이름도 한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도 틀렸고, 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글쓴이는 최고 지성인이며 국학 기관의 우두머리(首長)다. 한자 지명을 한글로 적으니 중국식 지명은 의미도 모르는 채 암기하여 소통될 뿐이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고유명사의 경우 한문으로 적더라도 우리말(訓借, 뜻)로 읽고 불렀다. “거곡(車谷)ㆍ내곡(內谷)ㆍ목동(木洞)ㆍ마포(麻浦)ㆍ장항(獐項) … 등을 그곳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술위실ㆍ안골ㆍ나뭇골ㆍ삼개ㆍ노루목 … 으로 부르고 읽었다. 이제는 한문음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한글로 적을 때도 거곡ㆍ내곡ㆍ목동ㆍ마포ㆍ장항 … 들로 적으니 이는 국어가 표준이 되지 않고 한문음이 표준이 되어버린 것이다”라고 국어학자 김윤경 선생이 개탄한 바 있다.
지금은 화성시 ‘병점(역)’에 대해서 지명유래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한자로 ‘餠店’이라 쓰고 ‘떡점’이라고 읽었으니 달리 설명이 필요 없었다. 1910년대의 지도 '조선지형도'에도 가타가나로 ‘トクチョ厶リ’(떡점리)라고 써놓았다. 1937년 「조선말 지명 수집」 홍보 문안에는 “순수한 조선말로 된 사물의 명칭이 모두 한자화 되어 버림에 대하여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재래에 불러오던 지명도 문자로 쓰는 데는 다 한자로 시행하나, 아직도 우리의 구두(口頭)로 전하여 오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썼다. (『한글』 제5권 제4호) 자연 발생한 토박이 땅이름을 알리고 써달라는 절박한 호소다. 광복 뒤 문자생활이 조금씩 한글로 옮겨오면서도 지명은 한자음대로 적어나간 것이 패착이었다. 땅이름만 그런가? 일상생활에 쓰이는 말도 70%가 한자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한자로 표기된 파생어 복합어 전문용어들이 국어사전에 오를 말인지는 독자가 판단하시라. ‘국제’라는 말이 들어간 표제어는 395개, ‘공동’이 든 표제어는 139개에 이른다. 인명사전이 아닌데 김씨 성 인물만도 362명이 올라 있다. 어느 사전에서 한자어 비율이 70%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말 가운데 70%가 한자어라는 말이 나돌게 된 연유이다. 이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쓰자는 학파의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일본식 한자어들도 내력을 밝히지 않은 채 일본 사전 풀이대로 수록했다. (이병철,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
이런 의식과 정책 때문에 1960년대 이후 토박이말의 유지/보존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새로운 문명 이기(利器)나 개념이 들어오면 거의 예외없이 일본식 이름이 자리 잡는다.
새 말이 생길 때마다 우리말과 그 식솔 수십 개가 사라진다. 빨래틀이 아니라 세탁기가 생기니 ‘빨래한다’는 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탁한다’가 냉큼 차지했다. 빨래•빨랫감•빨랫비누도 세탁•세탁물•세탁세제로 바뀌었다. 이렇게 사라진 우리말은 빨래질•빨래판•빨래터 등 물경 스물아홉 개다. 사어(死語)가 될 까닭이 전혀 없는 말조차 한자어에 밀려나고 있다. 흔하디흔했던 ‘걱정’까지 ‘우려(憂慮)’에 밀려 퇴출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말 단짝인 ‘근심’도 같은 운명이다. (이병철)
지금 주방이라는 것도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널리 퍼진 것이어서 방언으로 찍힌 내 어릴 때의 ‘정지’는 물론 표준어로 적힌 ‘부엌’도 아파트 아이들은 모를 것 같다. (김병익, 한겨레신문)
언어란 그 말을 쓰는 집단(言衆)마다 서술 방식이 있다. 우리는 ‘소리가 나’거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이 방식대로 ‘냄새가(臭いが. 니오이가) 난다(出る. 데루)’고 일본인에게 말했더니 알아듣지 못하더라. 알고 보니 그들은 ‘냄새가 한다(する. 스루)’라고 말하며, 소리도 ‘난다’가 아니라 ‘소리가 한다(音がする. 오토가 쓰루)’라고 한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스님을 일본사람인 줄 알았는데, 문장 가운데 이발했다는 표현을 ‘머리를 깎다(佛所剃頭及剪爪甲)’라고 써서 신라 스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머리’를 자른다고는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나라에 ‘물 먹는’ 사람은 없어진 듯하고 대신 하마(河馬)가 물을 먹는다(‘물먹는 하마’). 한국인은 물이나 약을 ‘먹는다’고 한다. 일본인은 물•약을 마신다(飮む. 노무)고 한다. 다행히 ‘식수(食水)’는 살아 있다(식수난, 식수 부족). 그러나 공공장소 어디를 가도 ‘물 먹는 데’는 없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용(--수, --수대, --금지, --적합)’이나 ‘음수(--대, --전)’만 있다. 이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았더니 일본과 중국에서 쓰는 말이었다. 나도 별 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지난 세기말(1990년대) 우이동 백운대 산장을 들어갔을 때 깨달았다. ‘먹는 물’은 문을 열고 나가 어디에서 받으라고 쓴 안내문을 보았다. 맞다, ‘먹는 물’이지!” 우리는 그동안 남의 나라 한자 말을 퍼 와서, 문자만 한글로 바꿔 썼다.
이 도도(滔滔)한 왜색(倭色) 물결에 아랑곳없이 나랏말 지킴이는 존재한다.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하고 칭송을 드리고 싶다. ⓵서울 종로구 평창동 일선사의 청담샘약수터에 ‘먹는물 공동시설안내’ ⓶K-water 횡성·원주지사가 펼친 ‘먹는물 홍보관’ ⓷코스트코 상품 ‘먹는샘물’ ④강화군•읍 향교의 ‘먹는물 공동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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