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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일)부터 10월 18일(토)까지 6박 7일간 다녀온 세 노인의 중국 여행기를 소개한다. 6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와 달리 동네 형들 두 분은 우리 나이로 올해 73세, 71세로 나를 포함하니 세 사람의 평균나이가 70.3세가 나온다. 별수 없이 나도 노인 대열에 끼인 채 여행에 합류했다. 2일차 여행을 글로 남겨본다.
둘째날_10/13(화) 흐린 뒤 갬 (방문지_낙양 용문석굴, 서안 회족거리)
출발에서 도착까지 새벽 6시에 눈을 떠 8시부터 제공되는 숙소 조식은 생략한 채 7시경에 길을 나섰다. 종루역까지 걸어가 7시 반경에 전철 2호선에 올라탔다. 신기한 점은 종루지하 로터리를 반 바퀴 돌아 2호선 안내 표식이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 끝 간 데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간 자동매표소에서 표(6위안) 3장을 끊은 후 개찰구로 들어가면 또다시 2호선 승강장을 찾아서 걸어온 만큼 또 가야 한다는 점이다. 종루 지하도 입구에서 2호선 전철 승강장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20분가량 된다. 이게 가당키는 한 말인가.
전철로 9구간을 50분가량 달려 서안북역(北站)에 도착한 뒤에도 동일 역사 내에 있는 고속철 역을 찾아 또 삼만리(?) 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전철에서 천신만고 끝에 1층 고속철 역에서 9시 30분 정시에 시속 300km 이상 속도로 달려 1시간 반 만인 11시경에 뤼양룽먼(洛陽龍門)역에 당도했다. 서울-김천 정도 간의 거리를 KTX보다 더 빨리 달려온 셈이다. 여기서도 택시승강장 입구가 공사 중이어서인지 헤매다가 호객하러 나온 기사의 눈에 띄어서야 간신히 택시를 타고 용문석굴 매표소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서안표 햄버거, 러우지아모(肉夹馍) 어제 점심에 이어 오늘 아침식사도 고속철 탑승 전에 간편식으로 요기했다. 고기 육(肉), 끼울 협(夾), 찐빵 모(饃)로 구성되는 이 빵의 모양새는 햄버거와 흡사하다. 갈라진 빵 속에 다양한 식재료 패티가 들어가는 현대식 햄버거와는 달리, 다진 고기만 넣어 먹는 주식거리 중 하나다. 그런데 먹어보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밥을 대신할 만한 고열량 영양식이다. 햄버거가 독일 함부르크의 지명을 따서 지어지긴 했으나 그 근원이 유럽을 침공했던 칭기스칸 기마부대의 간편식에서 유래한 것처럼, 러우지아모 역시 그 기원과 잇닿아 있다. 서양식으로 소개되면서 ‘햄버거’로 탈바꿈되었을 뿐, 실크로드의 출발지인 섬서성 시안에서는 이곳의 명물 ‘러우지아모’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12~20위안(=2,500~4,000원)의 저렴한 이 음식 역시 서안을 다녀간다면 꼭 먹어봐야 할 여기만의 특식이다.
중국 4대 석굴, 용문석굴(龍門石窟) 매표소(입장료 120위안=2만4천원)에서 강변을 쭉 따라가면 되는데, 우리 일행은 상가 거리를 지나 코끼리 차량이 달리는 차도 곁을 끼고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가는 도중 3년 전에 다녀온 식당 앞에서 자신을 알아봐 준 여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큰형님도 길이 어긋나는 걸 모른 채 길을 따라가다가 큰 강폭의 이강(伊河) 다리 너머까지 갔다 되돌아오는 우를 범했다. 20분 정도를 걸어 내려와 제 길로 올라간 다음에서야 대규모 서산석굴과 마주하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용문석굴은 중국 허난성 뤄양시 남쪽에 있는 석굴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산서성의 윈강석굴, 둔황의 막고굴, 감숙성의 맥적산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로 손꼽힌다. 용문석굴은 북위 효문제 때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439년부터 수·당·송을 거쳐 4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단일 석굴이 아니라 석굴군(群)으로, 크고 작은 동굴 2,345개가 남북으로 1km 정도 길이로 분포되어 있다. 10만여 개의 불상 중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무려 17.14m이고, 가장 작은 불상은 2cm에 불과하다.
이 놀라운 석조물들에는 당나라의 뛰어난 문화 수준과 복잡하고 정교한 사회상이 응집되어 있다. 또 오랜 기간에 걸쳐 확립된 예술 양식의 완벽한 경지를 보여 주므로 아시아 지역의 문화적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들로 간주할 수 있다.
가장 잘 보존된 석굴 가운데 하나인 황보공굴은 서산의 남쪽에 있는데, 비문을 보면 이 석굴이 527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굴 앞에는 목재 구조물을 본떠 만든 지붕이 있으며, 가로대에는 7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석굴의 주벽은 실물보다 커다란 7개의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다. 당 고종은 서산의 남쪽 아랫부분에 봉선사(奉先寺)동을 만들었다. 675년에 완성된 이 석굴은 이곳 당나라 때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작품이다. 석굴 안에는 9개의 거대한 석상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통통한 몸집에 자애로운 얼굴을 한 ‘비로자나불상’이 압도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여담으로 당 고종 때 세워진 대불의 얼굴은 측천무후의 외모를 본뜬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산석굴만 다 둘러보는 데만도 2시간가량 걸렸다. 수백미터 길이의 암벽에 벌집같이 빽빽이 새겨진 석불상들은 처음에는 탄성으로 다가왔으나 수만여 개의 숱한 불상을 반복해서 보는 일은 진을 빼기도 한다. 하지만 절반 코스를 넘긴 즈음에 마주한 비로자나불상은 단번에 피로감을 불식시킨다. 봉선사동 돌계단을 타고 10미터가량 올라간 암벽 중간지점에 35m 폭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세워진 대불 양옆으로 8개의 석불이 호위하는 불상 앞에서 어느 누구라도 숙연해지지 않으랴. 몇 년 전 대홍수로 말미암아 범람한 물이 강변 10m 이상 높이에 있는 여기 석불의 허리춤까지 잠겼다는 큰형님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 중국에서 허풍을 친 탓인가.
출구로 이어지는 강 위 다리를 건너 나머지 동산석굴과 인도 고승 지바하라가 묻힌 향산사(香山寺), 백거이 묘인 백원(白園) 방문은 체력 저하로 포기한 채 파김치가 되어 코끼리 차량을 이용해 내려왔다.
뤄양(洛阳, 洛陽) 엿보기 뤄양은 허난성의 도시로, 동주(東周)와 후한(後漢) 그리고 육조(六朝) 시대의 옛 수도이다. 원래 낙양이라는 이름은 낙수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해는 강의 남쪽 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햇빛은 항상 강의 북쪽 부분이 받게 된다.(이는 중국의 오래된 작명 방식이다) 몇 세기 동안 낙읍(洛邑), 낙주(洛州)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또 당나라 때는 동도(東都)라 불렸고 송나라 때는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으로 불리었다.
이곳 북망산(北邙山)은 낙양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다. 본래 이름은 邙山이었고 풍광이 수려한 명산이었으나 명당을 찾는 고관대작들이 하나둘씩 북망산에 묏자리를 만들었고 북망산은 공동묘지로 바뀌었다.
하·상·주 때 이곳에 도읍을 잡아 생활했다는 기록이 갑골문에 전해진다. 그리고 한나라 시기에 큰 도시로 발전하고, 황하를 통해 물자가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풍족한 도시로 거듭난다. 이후 광무제 유수(劉秀)가 다시 외척 왕망(王莽)을 무찌르고 낙양에 도읍을 틀어 도시 발전에 힘을 썼다.
후한 말 십상시의 난 끝에 정권을 잡은 동탁이 전횡을 휘두르자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였다. 상국 동탁은 이를 피해 장안으로 천도하고 낙양에 불을 질러 깡그리 폐허로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뤄양 시민들은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한다. 동탁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왕윤과 여포에게 죽었지만 중앙 정부가 마비되면서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였다. 그 중 강력했던 군벌인 조조가 황제에게 건의하여 낙양을 재건하는 한편 수도를 임시로 허난성에 있는 허(許)로 옮겼다. 조조의 아들 문제 조비가 낙양을 재정비하여 가장 화려하고 번창한 도시로 부활시켰다. 위를 이은 서진 역시 수도를 낙양에 두었다.
그러나 화려한 번영을 누리던 도중, 4세기에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화북에 침입해오기 시작했다. 허난성은 후조, 전연, 전진, 후연, 후진 등이 점령했다. 439년 북위(386~534)가 북중국을 통일, 493년에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이후 하음의 변이 일어나 북위는 534년에 분열되었고,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 양제 양광(楊廣)은 아버지 수 문제 양견(楊堅)이 수도를 장안에 두었던 것을 무리하게 낙양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는 수나라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수가 멸망하고 당이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낙양은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낙양은 강남의 물자들과 장안의 군사·정치와 연계되는 집적지로서 동도로도 불리며 번영을 이루었다. 그러나 당이 쇠퇴·멸망하면서 위수 유역의 군사·경제적 지위는 시들해졌고, 집적지로서의 지위 역시 동쪽 개봉(開封)에 내주게 되었다. 이후 오대십국 시대를 거쳐 건국된 송에서 개봉을 수도로 삼았다. 원 이후로는 정치 중심지가 몽골고원 동쪽의 북경으로 이동하면서 낙양은 수도의 기능을 완전 상실하였다. 명·청 시기에는 하남부의 치소(治所)가, 중화민국 성립 이후에는 낙양전구(專區)가 설치되었다. 1944년에는 대륙타통(打通)작전에 의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1948년 낙양은 현급시(县级市)로 설치되어 낙양지구의 관할 아래 놓였다가 1958년부터 지급시(地级市)로서 오늘날에 이른다.
멀리 낙양까지 온 김에 중국 불교의 발원지인 백마사(白馬寺), 중원 제일문이라 불렸던 여경문(丽景门,리징먼), 측천무후가 정치종교 활동을 벌였던 천당명당(天堂明堂), 삼국지 영웅 관우의 머리가 묻힌 관림(关林), 뤄양박물관(洛阳博物馆), 낙읍고성(洛邑古城,뤄이구청) 등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어정쩡히 남은 시간 탓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서안 고루 뒷골목, 회족거리 낙양에서 돌아와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어둠이 깔릴 무렵 고루 뒤에 있는 회족거리를 찾았다. 회족거리(회민가,回民街)는 시안 내에서 가장 유명한 미식거리다. 소수 무슬림 민족인 회족이 모여 사는 곳에 상권이 형성되어 시안 내 가장 유명한 미식거리가 되었다. 양꼬치, 파오모(泡馍), 감과자(柿子饼) 등 정말 많은 종류의 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공예품도 사 볼 만하다.
회족거리를 이해하려면 당나라 안사의 난(755~763) 때로 돌아 가봐야 한다. 안사는 난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의 첫 글자를 따 명명한 이름인데, 난이 일어나자 당시 삭방절도사 곽자의는 몽골 고원의 위구르 제국(744~840)에 도움을 청했다. 위구르 제국의 구성원은 당시 회흘·회골(回纥·回鹘)이라 불렸던 투르크계 색목인이었다. 곽자의를 도와 안사의 난을 진압한 회흘 가운데 200여 명이 장안에 남게 된다. 이들이 거주했던 곳이 바로 ‘대학습항'(大学习巷)이었다.
'항(巷)’은 거리를 뜻하는데, 시안 서대가(西大街)의 성황묘(城隍庙) 남쪽 입구에서 서쪽으로 100m쯤 되는 지점에서 남북으로 뻗은 400m의 거리가 바로 대학습항이다. 이곳은 당나라 때 외교업무를 관장하던 예부(礼部)의 주객사(主客司)와 외빈을 접대하던 홍려시(鸿胪寺)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 조정에서는 외국인이 한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도록 이곳에 학관을 설치했다. 이 거리에 ‘학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다. 현재 이곳 거주민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키고 있는 회족 후손들이다. 이들이 이곳에 야시장을 조성해 고도 시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음미할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켰다. 회족거리와 이슬람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는데, 청진사(淸眞寺)라는 이슬람 사원이 이를 증명해준다. 회족거리의 이슬람 역사는 무려 1300년이 넘는다.
우리는 회족거리 골목 안의 한 식당에서 양꼬치와 양념굴찜 등을 맛보았다. 기대했던 양꼬치는 별로였고, 오히려 실수로 시켰던 굴찜이 입맛에 맞았다. 강한 향신료 탓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설사똥을 바지에 지릴 뻔했다. 이날 이후 나는 너무 자극적인 현지식사는 가능한 한 자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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