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구 5주기 추모 및 밀양 항일역사 탐방 취재기

밀양의 내밀한 빛을 찾아서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5/07/07 [08:36]

안재구 5주기 추모 및 밀양 항일역사 탐방 취재기

밀양의 내밀한 빛을 찾아서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5/07/07 [08:36]

  2025년 7월은 뜨거웠다. 7월 4~5일 이틀간 경기중부권 42명의 일행과 함께 다녀온 경상남도 밀양시는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였다. 그 불볕 속에 우리를 비추는 찬란한 역사의 빛이 있었으니 잠시 다녀온 ‘밀양의 빛’ 이야기를 남기고자 한다. 

 

  약간의 밑밥지식 습득

  내려가는 대절버스 안에서 약간의 밑밥이 뿌려졌다. 첫 번째 밑밥은 밀양사람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조선의용대 그리고 의용군’ 이야기를 인천 사학자 임영태 교수가 들려주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그해 11월에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김원봉 윤세주 등 밀양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한 뒤 1920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습격 등 암살 및 파괴활동을 펼치다 1929년 해체, 이후 1938년 후베이성에서 김원봉의 주도로 중국 국민당군의 지원 하에 중국 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결성되어 선전·정보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1년 화북지역으로 이동한 대원들이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연합해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재편성해 1941년 호가장 전투와 1943 태항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1945년 광복 후 일부는 북한으로, 일부는 만주 공산당 소속으로 흩어진다. 조선의용군은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적 존재였으나 1950년대 북한에서 숙청되며 그 평가가 절하되었다”

 

  두 번째 밑밥은 혁신연구소 정성희 소장의 ‘영남을 중심으로 한 60~90년대 혁신계 운동사’ 이야기였다. “1960년 4.19혁명 이후 ‘혁신계’라는 말이 대두되었다. 학생과 시민이 일으킨 민주항쟁의 결과로 인해 여기저기서 진보적 성향의 운동이 펼쳐진다. 반독재민주화 운동(4.19혁명, 1979 부마항쟁, 1980 5.18민주화운동, 1987 6월항쟁 등), 굴욕외교 반대운동(1964 한일회담반대시위 등), 노동·농민·빈민 운동(1987 노동자대투쟁 등) 등이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이 유신정권을 내세우며 발표했던 여러 차례의 긴급조치에 맞선 조직적 항거는 많은 희생을 초래했고 전두환·노태우 군부정권으로 이어졌다. 이중 주요사건이 민청학련 사건, 언론·지식인 탄압사건, 1,2차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재일유학생간첩조작 사건, YH여공농성 사건 등이다. 오늘 찾아뵙는 故 안재구 선생은 1979년 남민전 사건과 1994년 구국전위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분이시다” 두 가지 이야기 밑밥으로 충전된 우리 일행은 정오를 넘겨 밀양 표충사 부근 식당에 도착했다. 산채비빔밥으로 배불린 뒤 표충사 경내까지 걸어갔다.

 

  밀양 표충사(表忠寺)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며,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곳 출신 유정 대사의 충훈을 추모하는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사찰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원효 스님이 터를 잡아 창건한 죽림정사(竹林精寺)를 신라 흥덕왕 4년 때 인도 스님 황면(黃面) 선사가 현재의 자리에 재건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했다. 당시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한센병에 걸려 명의와 명약을 찾던 중, 이곳 죽림사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에 왕이 기뻐하여 가람을 크게 부흥시키고, 사찰명을 영정사라 명명했다. 고려 시대로 들어서 보우, 해린, 일연, 천희 등 4대 국사가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국내 제일의 선찰로 번창했고, 충렬왕이 이곳을 찾아 찬탄하고 ‘一國之名山, 東邦第一禪刹’(일국지명산, 동방제일선찰)이라 명명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이곳에서 완성했다고 전한다.

 

  원래의 표충사당은 밀양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나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으로 높여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표충사(表忠祠)라 불렀는데, 영정사에서 수호해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뀐 것이다.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해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이미 폐사가 된 영정사 자리(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하에서 벌어진 10.27 법난(法難)의 피해 사찰 중 한 곳이면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대선사가 주석하다가 1966년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사당은 잠겨져 있었으나 사명대사의 진영 탱화는 사찰 내 사명대사유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일행은 1946년 김원봉이 아들 중근을 품에 안고 이곳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 것처럼, 뙤약볕을 피해 계곡물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안재구 선생 추모행사(위양지관광농원)

  숙소이자 행사장인 밀양위양지관광농원에 오후 4시경 도착하자 안재구선생5주기추모위원회 주최 측에서 수박을 썰어 내놓는다. 더위를 잠시 식히고 숙소에서 잠시 여장을 푼 뒤 4시 반에 ‘신념의 터전, 밀양의 항일정신과 조부 안병희’ 특별강연이 열렸다. 강사는 이곳에서 역사교사를 지낸 밀양사람 최필숙 선생이었다. “밀양의 강직함은 조선 초기 김종직(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에 근거한다. 그는 ‘항우에게 살해되어 강에 잠겼던 초 의제(義帝)’의 장면을 묘사하며 도리와 덕을 어기고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곳 출신인 유정(사명당, 1744~1610)이 승병을 이끌어 전공을 세우고 임란 뒤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강화조약을 맺으며 끌려간 백성 수천 명을 데리고 오는 업적을 남겼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종이와 부채를 건네며 글 받기를 요구하자 ‘옳은 일이 아니고는 이로움을 찾지 마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어서 비추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어서 다 안다. 참으로 내 것이 아니거든 털 한 올이라도 탐하지 마라’ 고 글을 남긴 일화로도 유명하다.

 

  안재구(1933~2020) 선생의 강직함과 저항정신은 밀양 출신의 선조 김종직과 사명대사 말고도 그의 조부 안병희(1890~1953)에서 기인한다. 안병희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해방운동을 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밀양에서 건준 부위원장과 민전 부위원장을 맡아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벌여 나갔다. 할아버지 안병희는 손자 안재구에게 “지조와 절개가 있어야 나라를 되찾겠다는 불굴의 신념도 생기고,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도 나올 수 있다”라고 강조하셨다 한다. 결국 조부 안병희 선생의 지조와 절개가 고스란히 손자 안재구에게 전승된 덕에 안재구 선생은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고 그 기개세가 증손자 안영민에게까지 동지의식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밀양사람 최필숙도 밀양의 강골 기질을 타고난 사람 같았다. 그의 거침없는 언변에 완전매료되어 기회가 닿는 대로 초빙 강사로 한번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 정도였다. 6시에 주최 측이 마련해준 저녁식사를 한 뒤 본격적인 ‘추모의 밤’ 행사가 치러졌다.

 


  박석준 경북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이 진행을 맡은 가운데 첫인사는 안병구 밀양시장에게 돌아갔다. 그는 안재구 선생과는 같은 항렬의 집안사람이기도 했다. “현재 김원봉 거리와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내부의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지역의 민주인사를 기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시장의 발언이 빈말이 아니길 빈다. 이어 이선애(밀양평화너머 대표), 김정광(경남평화너머 상임대표)의 인사말, 차성환(남민전 동지회), 한도숙(전국장기수 묘소참배 추모단), 윤금순(대구경북자주통일평화연대) 대표들의 추모사, 양희철(비전향 장기수)의 추모시, 중간중간 송철규(경북도립국악단원)의 대금연주, 밀양노래패 노래동무의 중창이 끝모르게 이어졌다. 이 중 “신념의 쪽배, 투쟁의 돛단배로 비유한 통일투사 안재구 선생 업적을 ‘신념의 구축함, 투쟁의 항공모함’으로 재발견해 나가자”는 멘트가 귀에 박혔다. 민중가수 박성운의 연이은 노래와 함께 간 6.15경기중부평화연대 박미애 상임대표의 결의발언으로 피날레를 찍고 유족대표 안영민의 답례 인사와 다 같이 부른 민중가요 합창으로 끝맺었다. 더위는 밤이 되어도 그 기세가 여전했으나 우리들의 함성에 밤 더위마저 맥을 못 추는 것 같았다.

 

  위양지(位良池, 위양못) 아침산책

  다음 날 아침 6시에 숙소를 나서 위양지까지 걸어서 산책나갔다. 종종걸음으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위양지는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신라 시대에 축조된 3대 저수지(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에 못지않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위양(位良)은 ‘양민을 위한다’는 뜻으로 농사를 지원하기 위한 둑과 저수지이다. 임진왜란 때 훼손되었으나 1634년 밀주부사 이유달에 의해 재건되었다. 양양지(陽良池)라고도 하며, 초기에는 제방 둘레가 4.5리(약 1.7km)에 달했으나 현재는 1㎞ 정도로 축소되었다. 못 가운데 5개의 섬이 있고, 그중 가장 큰 섬에 완재정(宛在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완재정은 안동권씨 위양 종중 학산 권삼변(1577~1645)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 후손들이 세운 안동권씨의 재실로 2017년 3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성 초기에는 못 섬의 중앙에 정자를 짓고 배를 타고 출입하였으며 영남 지방 및 조선 후기의 정원 조성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후대에 다리를 놓았는데 밀양8경 중 한 곳인 위양못 가의 이팝나무가 하얗게 만개할 5월 무렵이면 사진작가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2016년 제16회 아름다운숲 전국대회 공존상을 수상하였으며, 같은 해 방영된 SBS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아침 식사 후 묘소참배 직전까지 단체로 1시간가량을 더 둘러보았으므로 원 없이 위양지의 멋을 만끽하고 돌아나왔다.

 


  안재구 선생 5주기 묘소참배

 

  안재구 선생 묘소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10시경, 벌써 햇살이 따가웠으나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구경북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임성종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는 제례상 주요인사들이 술잔을 올린 뒤 함종호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전 이사장의 추모사와 서경원 전 국회의원의 추모가로 이어졌다. 뙤약볕에서 울려퍼진 서 전 의원의 ‘부용산’ 노래가 뜨겁게 심장을 달구었다.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연이어 참석했던 추모객들이 차례차례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치는 문상 행사가 한동안 이어졌다. 2020년 7월 8일, 장미가 꽃잎을 떨굴 때 안재구 선생은 내가 사는 군포의 한 요양원에서 87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나도 그의 영전에 꽃을 바치며 영면을 빌어주었다.

 

  밀양강변 영남루(嶺南樓)

  점심 식사 장소로 가기 전 근처 영남루에 들렀다. 이곳은 밀양시 내일동에 소재하는 누각으로 구 객사(舊客舍)의 부속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 다시 지어져 조선 후기 건축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963년 1월 보물 14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3년 12월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으로 동서 좌우에는 각각 3간의 익루인 능파각과 침류각이 달려 있다. 영남루는 원래 영남사 절터였는데,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밀양부사 김주가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로 개창했다고 전한다. 신라 법흥왕 때 절을 지었다가 고려 현종 때 절을 없애고 종각이 없던 금벼루만 두었던 것을 고려 예종 때 영남루를 지었으며, 1366년 김주가 중수했다는 것이다. 그 뒤 1460년 조선 세조 6년에 부사 강숙경이 누각의 규모를 키워 중건, 1542년 중종 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했다. 1582년 선조 15년 병화(兵火)로 대루와 부속당우가 불타버렸는데, 1637년 인조 15년에 부사 심흥이 재건한 것을 부사 이지온이 단청을 하였다. 1842년 헌종 8년에 실화로 소실한 것을 2년 뒤인 1844년 부사 이인재가 재건한 게 현재 건물이다. 조선 후기 건물로서는 건축미와 규모 면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힌다. 부사 이인재가 중건할 때의 상량문은 추남 이장한이 지었으며, 준공한 뒤에 김홍근이 지은 상량문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이곳에서도 최필숙 선생이 강론을 펼쳤는데, 최고 악질 친일파 박춘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양 영남루 경내의 密城大君之壇(박씨문중 시조단소壇所)을 친일파 박춘금이 주도해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1925년 밀성대군지단 건립 당시 국유지인 영남루 안에 개인 문중의 단소와 비석을 세운 박춘금(1891~1973)은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국회의원)을 두 번 지낸 유일한 조선인으로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행세를 한 자이며 조선인에게 가장 악랄한 자였다. 밀성박씨 시조 밀성대군 묘는 1922년 이전까지는 잘 몰랐다가 영남루 경내에서 뼛조각 등이 발견된 후 시조의 묘로 추정해 문중 어른에게 권총을 겨누고 위협해 영남루 안마당에 시조단소를 세웠다. 1급 민족반역자 박춘금이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고 자신과 문중을 과시하려고 세운 일본식 무덤으로 영남루 왼쪽 무봉산 중턱에 있던 일본 신사와 직선거리로 열까지 맞춰 일본 왕실과 신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형태를 띠고 있다. 밀양은 항일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곳인데, 이곳의 명승지이자 보물 147호인 영남루 경내 국유지에 개인 문중 시조단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박춘금은 1891년 4월 17일 양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밀양에서 자랐다. 1923년 일본이 조선인 노동자 6,661명을 학살한 간토대학살 때 조선인 색출과 시신 처리를 도맡는 등 친일 행각을 하며 세력을 키웠다. 조선에서는 일본인 농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소작 쟁의를 무력 진압했다. 강원도 정선 천포광산(금광)에서 민족을 혹사시켜 번 돈을 조선총독부에 바치기도 해서 이곳 화암동굴 입구에 '박춘금 단죄비'가 설치돼 있다. 서울시의회 앞에는 1945년 박춘금이 부민관에서 개최한 친일어용 아세아민족분격대회에 분개한 독립운동가들이 폭탄을 터뜨린 의거를 기념하는 '부민관 폭파의거터' 비석도 있다. 지금이라도 밀성박씨 시조단소가 존재한 이유를 밀양시는 명백히 조사하고 단죄비 설치를 세울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어딜 가나 충정의 흔적 반대편에는 반국가 친일 세력의 흔적들도 허다하다. 경내 정상부에 세워져 있는 사명대사 동상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하루바삐 경내에 남아있는 친일의 잔재를 지워야 하리라. 영남루 위쪽의 작곡가 박시춘 생가를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서둘러 경내를 빠져나왔다.

 

  의열기념관/밀양시 노상하1길 25-12

  점심식사 후 마지막 방문 코스인 의열기념관으로 버스가 내달렸다. 이곳은 2018년 3월 7일 일제강점기 의열단 단장 김원봉(1898~1958) 생가터 자리에 문을 연 기념관이다. 의열 정신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투사들의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소중한 공간으로서, 의열단원과 투쟁사와 유물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밀양에서는 3·13 만세운동을 필두로 8차례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는 무려 80여 명에 이른다. 밀양의 만세운동 벽화로 연결되는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한가운데에 3층 건물의 의열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다.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 내에 돌아봐야 하는 제약성 때문에 게 눈 감추듯 돌아봤으나 1920~40년대 의열단의 기운이 고스란히 배어난다. 의열단 10명의 발기 멤버로 함께했던 석정 윤세주(1900~1942), 황상규(1890~1931), 김상윤(1897~1927) 등도 모두 밀양사람들이었다. 함께한 최필숙 선생은 돌아나오는 끝 무렵까지 설명을 보태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내밀한 빛(密陽)’이 과거와 현재를 비추는 듯한 기세가 느껴진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했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했으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 내밀한 빛을 가슴에 품고 멋지게 살다간 밀양사람들, 그리고 최필숙 선생처럼 모범적으로 살고있는 밀양사람들이 무척이나 부럽다. 불현듯 ‘힘들고 지칠 때면 다시 밀양을 찾으리라’ 다짐하며 귀갓길에 올랐다. 충절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밀양을 떠나 올라가는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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