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명 이야기] 공공언어의 민낯➁ - 끝내 ‘네거리’는 사라지는가?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5/02/04 [09:03]

[한국의 지명 이야기] 공공언어의 민낯➁ - 끝내 ‘네거리’는 사라지는가?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 입력 : 2025/02/04 [09:03]

 편집자주) 본보는 2025년 을사년 정초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종원 명예교수의 지명유래 연재 글을 실어 우리나라 지명 속 공공언어의 민낯을 살펴보고 본래의 우리말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고자 한다. 


   신미나 시인의 <귀로(歸路>라는 시를 인용해본다. “국화는 샛노란 과거를 잊어도 / 백 년 전에도 십 년 뒤에도 / 지난날은 다시 살아와 광화문 네거리에”(2023년, 문학동네). 하지만 사람들은 서울에 ‘광화문네거리’가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시인이 ‘사거리’를 잘 못 썼다고 우길 터이다. 기실 인터넷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이 잘못된 이름이라고 오래전부터 올라와 있고, 관련된 의문은 그대로다. 

 

물론 신정역 또한 있다. 그런데 신정역은 5호선이다. 이 역은 원래 개통 때부터 신정네거리역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 건너뜀 – 2호선 신정네거리역은 5호선 신정역보다 몇 달 더 먼저 개통됐다. 다른 지역의 역 이름과 비교했을 때, 뒤에 생긴 역이 기존 지역에 ‘신’이 붙거나 ‘중앙’, ‘사거리’등이 붙어서 역 이름이 길어진 경향이 있는데 신정네거리역은 오히려 먼저 생긴 2호선 이름이 더 길다. (naver.blog.bigstar102  2021년 6월 16일)      

 


  나라에서 들려주는 유권해석은 이러하다. ‘네거리와 사거리가 모두 많이 쓰이므로 둘 다 표준어로 인정한다. 표준어 규정 3장 5절 26항’. 존재/통용되는 모든 낱말을 대접하는 후덕함인지, 말문이 막힌다. 이 역의 중국어 표시는 '新亭十字路(신정십자로)'다.

  ‘거리’는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둘을 굳이 구별하자면 ‘길’에 비해 ‘거리’는 길/공간이 한정되어 짧은 편이다. 둘을 겹쳐 써서 ‘길거리’라고도 한다. 이 거리가 마주쳐 네 갈래로 난 길이 ‘네거리’다. ‘네거리’는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0년대) 표현으로 ‘언문(諺文)’이라 했으니 순우리말이다. 세종대왕 때(1447년) 편찬된 『석보상절(釋譜詳節)』 23:58에 이미 보이는 토박이말이다. 아래에서 보듯이 용례는 얼마든지 있다.

 

十字街 네거리 ≪1778 방언유석 유부:17ㄴ≫

큰 길 네거리의 어안고 결박 모양으로 오 ≪1881 조군영적지 15ㄱ≫

네거리 四通路 街路 ≪1895 국한회어 60≫

셔문 밧 네거리에셔 끠 치명하니 ≪1895 치명일기 3ㄱ≫

 

  20세기 들어와서도 줄곧 그렇게 써왔으니 글쓴이도 그렇게 듣고 써왔다. 그런데 모든 소리를 한자로만 적으려는 선조들은 열심히 공들여 한자로 옮겨 썼다. 네(넷)는 뜻 ‘사(四)’로 바꾸고 토박이말인 ‘거리’는 소리만 빌려 써서(音借, 音譯) 몇 가지 시안(試案)을 선보였다. ‘윗말은 번역하고 아랫말은 그냥 두는(譯上不譯下) 식이다. 『조선지지자료, 경기도』편을 보자.

 


 ‘거리’는 길이 아니라 ‘큰 마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巨里’라는 한자어는 없으므로 사전에 올라 있지도 않다. 굿하는 순서를 말하는 제차(祭次, 科場)도 ‘巨里’라 적는다. 이밖에도 사가리(四加里)ㆍ사가리(四街里)로 쓰이며, ‘거리’는 한자로 距里•居里•去里•巨伊로도 쓴다. 거리가 바야흐로 이지러지는 광경이다. 일본 한자로는 辻(쓰지)라고 적는다. 근래 중국인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街里(지에리)’는 지하철 안내판에도 보인다. 나는 이미 20여 년 전에 ‘사거리’ 지명의 심각성을 문제 삼은 바 있다. 

 

‘광화문네거리’ 같은 익은말(숙어)이 지하철역이 들어서면서 ‘광화문사거리’가 되었다. 서울에는 아직 고치지 않은 ‘신정네거리역’도 있다. 충청ㆍ경상ㆍ전라ㆍ제주도까지 길 표지판이 ‘00네거리’로 되어 있는데 서울에서 시작된 새 작명 때문에 한 나라의 도로용어가 두 가지로 늘었다. ‘사거리’라 하면 ‘총알ㆍ포탄이 날아가는 거리/길이(=射距離)도 있고, 국악의 한 형태 놀량사거리·보렴사거리에서도 같은 말을 볼 수 있다. (신종원, 「편집후기」『강원도 땅이름의 참모습』 2007) 

 


  서울에서도 얼마 전까지는 ‘함지박네거리’와 같이 제대로 불렀다. 전주시에는 동문네거리, 명주네거리, 두류네거리, 남부네거리라는 전통 지명이 있었다. 그런데 ‘사거리’로 지명을 바꾸어 놓은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을 한옥마을 주민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대전에는 지하철역 ‘서대전네거리’가 있고, ‘수침교네거리’가 있다. 경상도 지역은 ‘네거리’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울산시와 창원시는 재빠르게 모두 ‘사거리’로 고쳤고 다른 지역도 해를 거듭할수록 ‘사거리’로 바꾸는 추세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는가?’, 서울이 잘못 쓰기 시작하자 전국이 이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돌에 새긴 표지판 ‘네거리’는 서울 인사동에, 대구 동성로 포정동에 의연히 금석문으로 남아 있다. 반만년 한국말이 21세기에 와서 유래/근본 없는 한자어로 바뀌는 세태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문자라면 모름지기 한자로 써야 했던 선조들은 비록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더라도 읽기는 뜻으로 읽었다.(訓借, 意譯) ‘네거리’를 한자로 어떻게 쓰든 불과 두어 세대 전만 해도 읽기는 누구든 ‘네거리’라고 정확히 읽었다. 한글·한자를 아는 이는 훈독을 했고, 문맹자는 어려서부터 ‘네거리’로만 들었으니 문제 소지가 없다. 시방은 문맹자가 없는 시대로서 ‘사거리’라고 읽고 말하고 쓰게 되었다. 한자를 숭상하는 말글(語文) 환경에서 드디어 우리의 숫자 말 ‘네/넷/넉’도 사라져가고 ‘거리’라는 말은 족보조차 잃어버렸다.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발전’하다가 결국 백•천•만(百•千•萬)을 뜻하는 고유어가 사라져간 것이 우리 국어역사 아닌가. 어린 자녀나 외국인 운전자는 글자를 모르더라도 자동차 네비게이션에서 음성안내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거리’로 가라는 주입교육을 받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옥편은 아직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네거리 辻(십)’으로 안내하고 있으며, ‘사거리’를 한자로 검색해 보면 ‘射距離’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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