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재일한국인 정치범 이철(1948~ ) 씨가 남긴 13년간(1975~1988)의 옥중기록이다. 이미 2021년 일본 동방출판사에서 일어로 출간되었던 <長東日誌: 在日韓國人政治犯 李哲の獄中記>를 2024년 4월 우리나라 서해문집에서 한글로도 펴낸 번역서이다. 책 제목에 올려진 장동(長東)은 ‘동쪽의 긴 나라’ 일본에서 온 사람이란 뜻으로 대전교도소 서화반에서 불렸던 저자의 아호이다. 어떤 사정이 있었길래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장기 복역했으며, 출소 30년을 훨씬 넘겨 뒤늦게 책을 펴낸 걸까, 책 내용을 통해 그 전말을 살펴보자.
이철, 그는 1929년 경북 의성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재일교포 3세로 1948년 구마모토현 히토요시 시에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67년 도쿄 주오(中央)대학 이공학부에 입학, 코리아문화연구회에 가입하며 본인의 정체성을 깨우치게 되고, 학적과를 찾아가 그간 사용해온 일본 이름 대신 우리말 이름 ‘이철’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대학 2학년 때 한국 유학을 결심, 졸업 직후인 1971년 서울대 부설 ‘재외국민교육연구소’에 입소한 뒤 1973년 드디어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이때 오사카 자형의 이종사촌인 숙명여대생 민향숙을 만나 약혼식까지 올린다. 그런데 결혼식을 앞둔 1975년 11월 22일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을 발표한다. 그리고 12월 11일 새벽 안암동 하숙집으로 낯선 남자 여럿이 들이닥쳐 그를 연행한다. 끌려간 곳은 남산의 중정 지하조사실. 40여 일간의 모진 고문과 취조 끝에 유학생 간첩임을 강제 자백 당한다. 이때 약혼녀 민향숙도 연행되어 사정도 모르는 채 간첩 공모자가 되고 만다. 재판에 회부되어 3심 끝에 이철은 사형, 민향숙은 3년 6개월 형이 언도 되어 1988년 출소할 때까지 이철이 겪은 13년간의 옥중 기록이다. 이후 2015년 11월 재심 결과, 간첩조작 사건에 의한 무죄로 밝혀졌으나 2,3십대의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국가 폭력, 그것도 제 발로 찾아온 조국이 파탄 낸 한 젊은이의 절규는 읽는 내내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추천 글에서, 리영희재단 김효순 이사장은 ‘폐쇄적 공간인 감옥에서 만나게 된 이질적 두 집단, 즉 비전향 장기수와 유학생 등 일본 관련 사건의 피해자를 상기하며, 이들의 실상과 억울함을 공감할 필요성’을 언급한다. 이석태 전 헌법재판관도 ‘재외동포라는 숙명에 악용당한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아픔은 개별적 재심을 통해 근본적으로 치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같은 성격의 사건에 연루된 공통된 고통과 고난에는 집단적 구제와 위로 절차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필자가 현재 재일한국양심수동호회와 오사카우리민주연합을 이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 자신은 징역살이 때문에 부친상에도 가보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으나 “부모를 팔아서 그 돈으로 친구를 사라”고 하셨던 생전의 말씀따라 그대로 했으니 천상의 아버님도 잘했다고 하실 거라며, 오히려 험난했던 시절에 옥중에서 만난 여러분들에게 감사하고 긴 옥살이를 통해 진정한 한국인으로 거듭났음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딸에게 남겨줄 기록으로 1995년부터 1년가량 정리해두었던 노트 7권을 꺼내 책 출간을 위해 초고를 조금씩 가필(加筆)하기 시작했다. 나는 탈고 성격의 가필 대신 그가 행한 가필은 ‘呵筆(언 붓을 입김으로 녹임)’이라고 여긴다. 옥중에 함께 했던 분들의 말과 표정까지 되살려냈으니 말이다. 그들 삶의 장면까지 책을 통해 알려진다면 더 큰 의의가 있으리라고 출간의 의미를 덧붙인다. 실제 책 속에는 리영희·신영복·박현채·김지하 등 저명인사와의 일화도 담겨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러니 책 내용 파악은 독자의 손수 읽기 몫으로 남긴다.
책은 12월 송년모임에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부터 선물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사를 가르쳐온 역사학자로서 나와는 혈맹(血盟, 같은 성)이자 동맹(同盟, 같은 동아리)이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나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인터넷에 가장 먼저 올려 저자로부터 가장 먼저 감사 메일을 받았다고 하고, 그 인연으로 저자사인회 거간꾼 노릇을 하고 있다고 밝힌다. 더불어 이 책을 사서 읽어주는 것이 이철 씨의 생계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신 교수가 책갈피 삼아 넣어준 연하장 글귀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자식에게 황금 백만냥을 물려줌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침만 못하다
알고 보니 이 문장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글귀로 안중근 의사 유묵에도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교(一敎)’의 의미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선생의 가르침은 배움의 후과일진대, 한 번 잘못 배우고 익힌 선생의 가르침은 한 번의 가르침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 시대에 가르치려 드는 자들의 ‘일교’가 대통령에서부터 정치·사회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썩어 문드러져 있는지, 우리 모두가 이 책을 통해 깊이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 독자가 내는 소중한 월 5천원 이상의 자동이체 후원은 군포시민신문 대부분의 재원이자 올바른 지역언론을 지킬 수 있는 힘입니다. 아래의 이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시면 월 자동이체(CMS) 신청이 가능합니다. https://ap.hyosungcmsplus.co.kr/external/shorten/20230113MW0S32Vr2f * 후원계좌 : 농협 301-0163-7925-91 주식회사 시민미디어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