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때 인권유린의 비극과 참상의 현장이었던 ‘선감학원(1942~1982)’에 대한 고발서로, 스스로 증언대에 선 지은이 김창선 씨는 6년 6개월(1968~1974)간 그곳에 원생으로 강제수용되었던 장본인이다. 책 제목을 보자마자 요한계시록 13장에 기록된 악마를 상징하는 숫자 ‘666’이 떠올랐다. 실제 날수로 6년 6개월 6일간을 그곳에 갇혀 지냈다면 그는 악의 소굴에서 살아난 자가 아닐까 하고.
선감학원을 아십니까? 이렇게 시작되는 책머리처럼 여러분은 선감학원을 아시는가. 선감학원의 기원은 멀리 일제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923년 감화령(感化令)을 발표, 1924년 10월 함경남도 영흥에 처음으로 조선총독부 직속의 ‘영흥학교’를 설치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8세에서 18세의 나이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것이었다. 1938년 10월 전라도 목포의 고하도에도 ‘목포학원’을 추가로 설치했으며, 1942년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경기 안산의 선감도에 ‘선감학원’을 최종적으로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는 선감도 거주민 400여 명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후 선감학원을 설치했으며, 1942년 4월 200명의 소년을 처음 수용했다가 해방 직후 1946년 2월 경기도로 관할기관이 이관되었다. 1954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1982년까지 존재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내내 어린 소년들의 조선독립 의지를 말살시키고 전쟁에 이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가, 해방 및 한국동란을 거치며 군부독재정권 하에서는 부랑아 갱생이라는 미명하에 강제 수용시설로 둔갑했던 것이다.
원래 선감도의 면적은 3.7㎢이며, 섬 둘레는 8㎞였다. 이 일대 간척사업 이후 불도와 탄도를 지나 화성군 서신면과 방조제로 연결, 대부도의 시화방조제를 통해 연륙되어 지금은 대부도에 딸린 땅처럼 여겨진다. 현재 안산시 단원구 선감로 101-19 <경기창작센터> 자리가 바로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이다.
선감학원 원생 출신 김창선의 증언 성도 이름도 생년월일도 정확하지 않은 이 책의 지은이 김창선(1960~ ) 씨는 4살 때 어딘지도 모르는 한 시장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고아가 되고 만다. 통상 인간이 최초로 과거를 기억해내는 나이인 4살 나이에 스스로 추정한 탄생년도, 7살이 되어서야 보육원 배정을 받을 수 있도록 시청 직원이 이름 지어준 ‘김창선’과 기억하기 좋도록 지어준 생일 ‘3월 1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보육원을 탈출, 동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길거리 부랑아 생활을 하던 중 붙잡혀 1968년 3월 14일부터 1974년 9월까지 선감도라는 외딴 섬의 선감학원에서 강제 수용을 당했던 6년 6개월간은 똑똑히 기억한다. 이 책은 6년 6개월간 수용 생활에서 겪은 인권유린의 참상과 비극을 낱낱이 고발한 책이다. 나이 14살이 되어서야 부천의 <새소망소년의집>으로 빠져나와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퇴소했다. 그리고 1987년 결혼 아들·딸 낳고 1999년 서른아홉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 그곳에서 25년을 살다가 2023년 귀국했다. 마지막으로 DNA 분석법으로 부모님을 찾았으나 허사였고, 지금은 선감학원 당시의 관계기관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가 50년이나 지나버린 지금에 와서도 당시의 선감학원과 관계자들을 고발 조치하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런 아픈 인권유린 역사가 다시는 재발되지 않아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선감학원 입소 당시 거의 대다수는 기합(93.3%)과 구타(93.3%), 언어폭력(73.3%), 성추행(48.9%), 강간(33.3%), 강제노역(98.0%), 사망자 목격 경험(96.7%), 시신 처리에 동원(48.4%) 등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이 겪지 않아야 할 일들을 겪다 보니 선감학원 출신자들은 85.8%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이고, 구두닦이 넝마주이 머슴 등 고된 저소득 직업군에 속해 37.6%가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응답자의 34%가 장애자였고, 이 중 30%는 선감학원에서의 트라우마가 그 원인이었다. 이 모든 게 국가의 책임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창선 씨가 증언을 한 이유 2022년 10월 22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선감학원 사건에 대해 강제구금과 강제노동, 폭력과 사망 등 국가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김창선 씨는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6년 6개월의 부당 복역에서 벗어나 비로소 무죄가 된 것 같다는 심경을 피력했다. 자살이나 사고사로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고, 선감학원 원생 출신임을 애써 감추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비정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는 과감히 말한다. 자신의 증언으로써 선감학원이라는 악몽을 싹 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단숨에 책을 다 읽고 선감학원이 있었다는 <경기창작센터>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당시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휴가철이어서인지 건물 동마다 문이 잠겨 있어 황량한 기운마저 감돈다. 단지 본관 건물 바로 옆에 ‘선감학원 어린 넋 위로비’(2014년 5월 29일 건립)가 이곳이 과거 선감학원 터였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김영배 류규석 배명기 외 선감학원 생존자 등이 주축이 되어 비를 세웠는데, 책 본문 166~167페이지에 언급한 “원생들은 겨울에 유난히 방패연을 날렸다”는 저자 증언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저자가 50년이 지난 즈음에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책을 펴낸 이유도 바람이 거셀수록 더 큰 울음소리를 냈던 방패연을 결코 잊지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깊은 울림이 되길 바란다.
P.S_이 책은 며칠 전 지은이가 <군포시민신문사>에 우편으로 보내온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고 다큐 기록의 현장까지 찾아가 보았다. 저자가 육필로 남긴 것 이상으로 현장의 체취를 맛보고 싶어서였다. 당시 고립된 섬에서 탈출하려고 했다는 해안가에도 가 보았다. 보은용사촌 앞의 갯벌 사이로 당시 여러 탈출자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했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