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산본천 복원을 위한 청계천 제3차 답사를 하면서...산본천 복원을 어떻게 할까?3월 6일(월) 답사는 서울숲에서 시작이다. 먼저 곤충식물원에 들려 나비원 담당 선생님을 만났다. 5월 초 개장이라 다양한 나비와 먹이식물은 볼 수 없었지만, 곤충식물원에서 간단히 반딧불이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광해(光害)를 줄이고 손을 대지 않는다면 애반딧불이는 얼마든지 키워서 방사할 수 있고, 쇼로 비친다고 해도 의미 있는 일이며 초막골의 반딧불이는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앞으로 복원될 산본천에서 반딧불이를 키울 순 없지만 스토리를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으로 들렸다.
서울숲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사업본부가 있던 곳이다. 1908년 침전지와 여과지, 정수지, 송수시설을 갖춘 경성수도양수공장으로 국가 보안 시설이었다. 경마장과 골프장이 있었고 숲의 조성부터 운영까지 시민이 참여한 최초의 공원이라고 한다.
오늘은 물길을 따라 걸으면서 청계천에서 한강이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행가교를 통해 서울숲의 공중을 가로질러 꽃사슴방사장 등 생태숲을 내려다보면서 한강공원까지 이동하였다. 이곳에는 금호동과 옥수동 중랑천 하구 사이에 있었던 삼각주 형태의 섬인 저자도가 있었다고 한다. 왕실이 경영한 섬으로 세종이 둘째 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에게 하사되었으나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한때 몰수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압구정동 택지를 조성하는데 저자도의 흙과 모래가 사용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개나리가 가득한 응봉산은 예로부터 주변의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왕이 이곳에 매를 풀어 사냥을 즐기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매봉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입석포는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낚시를 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선비들의 학습을 위한 독서당이 있고 응봉 남쪽에는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를 설치했는데 서빙고에 비해 동쪽에 있어서 동빙고라고 불렸다고 한다.
‘살곶이’란 지명의 유래는 왕위 계승 문제로 비롯된 태종과의 갈등으로 함흥에 머물던 태조가 우여곡절 끝에 한양으로 돌아오다가 이곳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태종에게 활을 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뚝섬으로 불리던 곳으로‘ 뚝’은 임금 행차 때 꽂아놓았던 깃발인 ‘둑’(纛)의 된소리이다. 지금은 산책로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에는 강릉이나 이천, 충주로 나가는 중요한 교통로의 시작지점이었다. 임금의 사냥터와 군인들의 훈련장, 그리고 관마를 기르던 말 목장이 있었는데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하여 생긴 삼각주에 모래와 흙이 쌓여서 형성된 퇴적 평야로 물과 풀이 풍성해서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살곶이다리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곳인 지금의 한양대학교 부근과 성수동 경계에 있다. 조선 시대에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하며 원래 이름은 제반교(濟盤橋), 전곶교(箭串橋)로 불렸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모자라는 석재를 보충하기 위해 다리 석재의 절반을 가져다가 쓰면서(광통교에 신덕왕후 석물을 사용한 것과 다른 의미겠지만 말이다.) 일제강점기엔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콘크리트로 덧칠되고 방치되면서 훼손되어갔다. 이후 복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행당동 쪽만 원래 형태로 복구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유로는 변한다. 모래톱이 쌓이고 지형을 따라 물길이 변하는 것이다. 이곳도 지금은 원형이 남아있는 다리 쪽은 물이 없지만, 조선 시대에는 홍수로 유실될 정도였다고 한다. 나각순 교수님께서는 유로가 변하기 때문에 산본천 복원에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드디어 답사의 종착지인 마장축산물시장에 도착했다. 여기 신답철교는 광통교에서 시작된 청계천 복개 구간의 끝이었다.
오늘 답사는 자연과 함께 한 시간이다. 서울숲 하늘에서 본 흰꼬리수리를 시작으로 한강 물줄기를 따라 걸으면서 황조롱이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골칫거리가 된 민물가마우지, 물닭,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괭이갈매기, 비오리 등 많은 새를 많이 볼 수 있었고 나뭇가지의 겨울눈은 통통해져 나올 채비를 하고 있다. 원래 중랑천은 생활하천이 그대로 흘러들면서 오염이 심했던 곳이었는데 정화사업, 생태보존 등의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세 차례에 걸쳐 답사가 진행된 청계천의 복개와 복원과정을 돌아보면 500년 동안 개천(開川)이었다가 일제강점기에 청계천(淸溪川)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방치되면서 청계천은 하수구로 전락하였다. 토사와 생활하수가 계속 쌓이면서 냄새가 심하게 나자 일본은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을 복개하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전쟁을 겪으면서 생계를 위해 서울로 모인 사람들은 청계천 변을 따라 화장실도 없는 판잣집을 줄줄이 짓고 거기서 쏟아지는 쓰레기와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빠르게 오염된다. 그 해결책으로 1958년 복개공사가 시작되고 1977년에 신답철교 구간을 끝으로 공사는 완전히 마무리된다. 하지만 성장과 개발 대신 생태환경과 역사문화의 보전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면서 복원이 결정되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유지관리에 따른 비용 문제와 미흡한 역사문화 복원 등 해결과제로 남은 문제점들을 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산본천 복원사업은 다른 하천사업의 복원모델이 될 수 있도록 충분한 고민과 성과를 이루기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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