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산복천 복원을 위한 청계천 제1차 답사를 하면서...

산본천 복원을 어떻게 할까?

전선영 사)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 생생뿌리팀 | 기사입력 2023/03/07 [08:34]

[기고] 산복천 복원을 위한 청계천 제1차 답사를 하면서...

산본천 복원을 어떻게 할까?

전선영 사)자연과 함께하는 사람들 생생뿌리팀 | 입력 : 2023/03/07 [08:34]

2월 6일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나들이다. 오랜만에 청계천을 보러 간다. 가끔 가지만 답사라는 명목으로 나서는 건 처음이다. 산본천 복원사업 덕분에 청계천을 제대로 공부하는 좋은 기회이다. 산본천은 생태하천으로 복원이 돼야 한다는 강의를 들었다. 그럼 생태하천이란 무엇인가? 하천이 지닌 본래의 자연성과 생태적 기능이 최대화될 수 있도록 조성된 건강한 하천을 말한다. 이 뜻을 생각하며 답사를 시작한다.

 

  청계광장 스프링 앞에서  (사진=이금순)   © 군포시민신문

 

청계광장의 상징물인 스프링은 설치미술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하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슬기 모양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이번 답사를 지휘해주실 나각순 교수님을 따라 청계천 발원지와 복원 구간을 축소시킨 청계천 미니어처를 지나 내려가면 2단 폭포 밑에 전국 곳곳에서 가져온 돌로 만든 팔석담이 있고, 마침 소원을 빌고 동전을 던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청계천의 발원지는 경복궁 서북쪽 백운동의 작은 샘으로, 여기서 시작된 물줄기가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물줄기와 합쳐져 하천을 형성한 것이 청계천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명칭은 개천(開川)으로 인공적으로 만든 도심 속 하천이다. 태종대에 와서 정비가 시작되었으나 해마다 범람하여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개천은 영조대에 와서 준천濬川을 통해 정비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복개과정, 그리고 2005년 복원사업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광통교 아래서 (사진=이금순)   © 군포시민신문

 

청계천의 22개의 다리 중에 시작인 모전교를 지나면 폭이 가장 넒은 광통교가 있다. 태종은 심한 비로 광통교가 쓸려나가자 견고한 다리를 만든다며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정릉에 있는 신덕왕후의 묘지에서 신장석을 가져와 다시 튼튼하게 만들었는데 사용된 신장석 중 일부분은 뒤집혀 있었다. 태종이 신덕왕후의 무덤에서 쓰인 석물로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나쁜 감정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광통교의 기둥을 살펴보면 마름모꼴로 세워져 있는데 이는 많은 양의 물이 한꺼번에 흘러도 막히지 않고 잘 흘러가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광교를 지나 장통교에 이르면 순조 때 서울 시가지의 모습을 실측에 의해 제작한 김정호의 수선전도와 혜경궁 홍씨가 환갑을 맞이하여 융릉에 다녀오는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를 볼 수 있다. 삼일교를 지나면 가뭄과 홍수에 대비해 돌기둥에 눈금을 새겨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했던 수표가 있던 수표교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수표는 세종대왕 기념관에 있고 진짜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에 있다.

 

 관수교를 지나 세운교에 이르면 세운상가를 만난다. 용산전자상가가 생기기 전 세운상가는 전자제품이나 조명등을 사기 위해 꼭 들렸던 곳으로 청계천 주변이 개발되면서 없어질 줄 알았는데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거치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불러모으고 있다고 한다. 하천을 따라 마전교를 지나고 평화시장을 지나고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버들다리 일명 전태일 다리에 도착했다. 그곳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정을 다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노동운동을 했지만 결과는 무시와 탄압으로 돌아오고 분신이라는 최후의 카드로 불의에 맞선 22살의 전태일이 우뚝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리의 1차 답사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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