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여행기 ③ 동박새는 꽃을 찾고, 여행객은 술을 찾고

74년 역사의 주류 판매점 '메지로타나카야' / 긴자 칵테일 '바 하이 파이브' / 도심속 옥상 전망대 '시부야 스카이' 등

전주호 기자 | 기사입력 2023/01/26 [16:54]

도쿄여행기 ③ 동박새는 꽃을 찾고, 여행객은 술을 찾고

74년 역사의 주류 판매점 '메지로타나카야' / 긴자 칵테일 '바 하이 파이브' / 도심속 옥상 전망대 '시부야 스카이' 등

전주호 기자 | 입력 : 2023/01/26 [16:54]

▲ 도쿄도 도시마구 메지로의 '하나노하시(花のはし)' 육교로 올라가는 길(왼쪽)과 육교에서 바라본 선로 풍경. 자전거 이용자와 교통약자를 배려한 오르막 및 엘리베이터가 눈에 띈다.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이케부쿠로에서 전철 한 정거장 거리, 걸어서 10여 분이면 메지로에 도착한다. 이곳의 선로를 건너는 육교에는 '하나노하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지역 주민들이 이 육교가 '꽃의 명소'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꽃의(花の) 다리' 혹은 '꽃밭(花野) 다리'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아 이름 붙였다고 한다. 마침 메지로(目白)는 '동박새'라는 뜻이기도 한데, 동박새는 동백이나 매화, 벚꽃 등의 꿀을 먹고 산다. 메지로 주민들이 꽃을 바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주민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메지로에는 관광객이 올 일이 드물다. 바로 코앞에 이케부쿠로가 있는 까닭이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1949년부터 74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는 주류 판매점, '메지로타카나야(目白田中屋)'에 가기 위해서였다.

 

▲ 주류 전문 판매점 메지로타카나야(目白田中屋) 입구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사진 촬영이 금지된 매장 내부는 어두운 목재 톤으로 이뤄져 차분하고 조용했다. 공간이 그렇게 넓지 않음에도 각종 위스키와 꼬냑, 럼, 진, 리큐르, 거기에 맥주나 와인, 일본주까지 다양한 술이 꽉꽉 들어차 전시돼 있었다.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술, 생전 처음 보는 술도 무척 많았다. 가격 또한 주세법이 달라서인지, 한국에서 사는 것에 비해 작게는 30%, 크게는 70% 가까이 저렴했다.

 

꽁지 머리를 한 잘생긴 직원에게 "이러이러한 술을 찾고 있다" "추천해줄 수 있는가" 등을 물었다. 그러다 말문이 터져 20분 넘게 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내용의 일부를 기억에 의존해 옮긴다.

 

나: "칼바도스(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사과를 증류해 만드는 브랜디)를 처음 마시는데 5천 엔대 선에서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직원: "칵테일에 쓰실 거라면 여기 2천 엔대의 저숙성 칼바도스가 괜찮아요. 사과로만 만든 것도 있고, 배를 섞은 것도 있어요. 칼바도스는 숙성이 짧을수록 사과 본연의 산뜻한 맛이 강조되는 편에요.하지만 칼바도스라는 술 자체를 즐기는 것이 목적이라면 사실은 처음부터 8천 엔 이상의 고숙성 칼바도스로 시작해서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게 좋아요. 

포도 브랜디의 경우도 꼬냑과 아르마냑이 다르듯이, 칼바도스도 메이커에 따라 증류나 숙성 방식의 차이가 커요. 예를 들면 여기 12년 이상 숙성인 A제품이 20년 이상 숙성인 B제품과 가격이 비슷하죠? 제조 방식이 달라서 그래요. 숙성 기간이 길어도 사과 본연의 맛을 살리는 식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숙성 과정에서 생기는 깊고 묵직한 풍미를 강조하는 경우가 있어요. 전자의 경우 따자마자 바로 마셔도 맛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따서 바로 마시면 맛이 이상해서 개봉 뒤 시간을 둬야 해요."

 

'칼바도스는 막 개봉하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경우가 있어, 뚜껑을 다시 닫고 며칠 놔뒀다 마셔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직원 말 그대로였다.

 

나는 칵테일이 목적이기에 저숙성 칼바도스를 골랐다. 한국에선 구할 수 없는 페르노(Pernod)사의 압생트도 샀다.

 

▲ 메지로타나카야에서 구매한 칼바도스와 차조기 비터스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구매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려는데, 비터스(칵테일에 쓰이는 일종의 향신료. 고미약)가 놓인 진열장이 발목을 잡았다. 진열장에는 인도 카레 레시피에 나올 법한 온갖 향신료로 만든 비터스가 수십 종이나 늘어서 있었다. 일본풍 재료인 벚꽃, 차조기(시소. 깻잎과 닮은 향채), 유자 등의 비터스도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던 히노키(편백나무) 비터스의 시향 샘플도 있었는데 품절이라 구매할 수는 없었다.

 

나: "비터스의 종류가 엄청 다양하네요. 부러워요. 한국에서는 서너 종류 밖에 구할 수가 없는데."

직원: "일본인은 변태가 많으니까요." (웃음)

나: (웃음) "그렇죠. 그래도 변태가 많은 편이 나아요. 소비자 입장에선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요."

 

개중에 가장 신기했던 것은 우마미(감칠맛) 비터스였다. 직원이 권하기에 한 방울을 손등에 떨어트려 시음했는데, 표고버섯 같은 향은 좋았으나 혀에 닿는 순간 미원을 농축한 듯한 맛에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런 맛을 칵테일에 쓴다는 게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직원이 자백했듯이 과연 변태가 많은 나라다.

 

▲ 밤에 본 하라주쿠 이모저모. 위 왼쪽부터 하라주쿠 역앞, 타케시타도오리의 개성적인 옷가게, 육교에서 바라본 오모테산도, 캣 스트리트 모습. 2023년 1월 6일 촬영.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해가 질 무렵 하라주쿠로 향했다. 워낙 널리 알려진 곳이니 간단히 이야기하고 넘어가려 한다. 하라주쿠는 젊음과 개성이 넘치는 '타케시타도오리,' 한국의 신사동 가로수길에 비견되는 명품 거리 '오모테산도,' 그리고 캐주얼한 쇼핑 거리 '캣 스트리트' 등 전혀 다른 느낌의 거리가 한데 모여 있다. 인근에는 메이지 신궁도 있어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어 도쿄를 여행한다면 추천하는 장소다.

 

▲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풍경. 2023년 1월 6일 촬영.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 육교에서 바라본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 옥상에는 야외 전망대 '시부야 스카이'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캣 스트리트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스크램블 교차로의 인파로 유명한 번화가, 시부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내가 지난번 도쿄에 왔을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마천루, 2019년 8월에 완공된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가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름이 무색하게도 지상에서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바라보면 이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시부야역을 기준으로 이 건물은 동편에, 교차로는 서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 (위)시부야 스카이에서 바라본 도쿄 전경. (아래)시부야 스카이는 밤이 되면 일정 시간마다 하늘에 빛줄기를 비춘다.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이 건물 옥상에는 야외 전망대 '시부야 스카이'가 있다. 229m 상공에서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며 도쿄 야경을 360도로 감상할 수 있다. 일정 시간마다 하늘과 이어지는 빛줄기 쇼 또한 근사하다. 우리 돈 1만 7천원 정도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 다만 혼자 가는 것은 결코 추천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 주고 감상을 나눌 동료가 있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추락 위험이 있어 셀카봉도 반입할 수 없다.

 

▲ 메이지 신궁에 봉헌된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통.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여행 셋째 날인 1월 7일이 되었다. 이날 낮까지 다닌 곳들은 이번 편의 흐름에 맞지 않아 다음에 소개하기로 한다. 다만 아침에 갔던 메이지 신궁에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생전에 와인을 즐겼다는 메이지 천황에게 봉헌된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통이 그것이다. 이 봉헌은 부르고뉴 명예시민인 일본인 사타 야스히코(佐多保彦)의 요청으로 2006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죽은 사람에게 바쳐진 술이라지만 온도와 습도가 일정치 않은 야외에서 와인 보관이 가능할까 싶은데, 사실은 전부 빈 통이라는 모양이다. 일본의 사원을 소개하는 한 웹사이트에 따르면, 안에 든 술은 따로 옮겨 보관한다고 한다.

 

▲ 긴자 골목길 풍경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오후 5시 30분경, 긴자로 향했다. 긴자는 도쿄에서도 유난히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를 가진 상권이다. 백화점을 비롯해 장인이 운영하는 초밥집이나 고급 레스토랑 등이 이곳에 모여 있고, 수준 높은 칵테일 바 또한 대부분 긴자에 자리하고 있다.

 

긴자의 '바 하이 파이브(HIGH FIVE)'를 찾았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월드 베스트 바 50'에 선정된 이 바는 얼마 전 유튜브 채널 '주류학개론'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 있다. 나 또한 그 유튜브를 통해 이 바에 대해 알게 됐다. 유명한 바 답게 술 마시기엔 다소 이른 시간임에도 자리가 없어 잠시 기다려야 했다.

 

▲ 칵테일 '핫 버터드 럼'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바 좌석으로 안내받은 뒤, 따끈한 '핫 버터드 럼'으로 첫잔을 시작했다. 레몬 껍질에 구멍을 뚫고 정향을 꽂아 잔 위에 띄운 것과, 마치 커피처럼 시럽을 따로 준 것에서 센스가 돋보였다. 

 

손님들이 대부분 외국인인 점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인지 점주 우에노 히데츠구(上野秀嗣)를 비롯해 전 직원이 영어에 능통했다. 바텐더 중 한 명은 아예 미국에서 온 백인이었다. 한 잔 한 잔 마셔 가며 헤드 바텐더 쿠라카미 카오리(倉上香里) 씨와 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 바 하이 파이브의 헤드 바텐더 쿠라카미 카오리(倉上香里)가 칵테일을 조주하고 있다. 2023년 1월 7일 촬영.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나: "한국에서는 비터스를 참 구하기 어려워요. 앙고스투라(Angostura)나 페이쇼드(Peychaud's) 말고는 없죠. 어제 메지로타나카야에 갔더니 다양하게 있더라고요. 부러워요."

카오리: "일본도 일반적으론 비터스를 구하기 힘들어요. 특히 페이쇼드 비터스를 구할 수가 없어요."

 

페이쇼드 비터스는 유명한 칵테일 레시피에 널리 쓰이는 재료다. 우리보다 수입주류의 선택폭도 넓고 칵테일의 역사도 깊은 일본에서 그걸 구하기 어렵다는 점은 놀라웠다. 비록 전날 주류 판매점엔 수십 종의 비터스가 늘어서 있었지만, 그것은 개인이 취미로 구매하기에 좋은 것일 뿐, 업장에서 지속적으로 구매해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카오리: "물론 요즘에는 '재패니즈 비터스' 같은 새로운 시도도 많이 나오지만, 레시피를 유지해야 하는 바텐더 입장에선 '과연 그 제품이 10년 뒤에도 계속 생산될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은 비터스를 업장에서 직접 만들어 쓰게 되죠. 손님들이 많이 찾으면 같은 레시피로 계속 만들고, 안 찾으면 그만 만들면 되니까요."

 

두 번째 잔은 버터드 럼의 기름기가 씻겨가도록 일본풍의 산뜻하고 탄산이 든 칵테일을 부탁했다. 유자 향의 스파클링 와인 같은 맛의 하이볼이 나왔다. 바 하이 파이브는 매장 내에 메뉴판이 없다. 손님이 원하는 맛이나 향, 도수 등을 말하면 이름 없는 창작 칵테일도 즉석에서 바로 만들어 주는 것이 매력이다.

 

▲ 바 하이 파이브의 헤드 바텐더 쿠라카미 카오리(倉上香里)가 스로잉 기법으로 칵테일 '뱀부'를 조주하고 있다. 2023년 1월 7일 촬영.  © 군포시민신문

 

세 번째로는 향긋하고 드라이한 와인 칵테일 '뱀부'를 주문했다. 카오리 씨가 이 칵테일을 만드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본 뒤로 흥미가 생겼었다. 와인 계열 재료만 들어가는 이 칵테일의 이름이 왜 대나무를 뜻하는 'Bamboo'일지도 궁금했다.

 

나: "뱀부는 왜 뱀부라고 불리는 걸까요? 혹자는 스로잉(Throwing. 술을 잔에서 잔으로 번갈아가며 길게 쏟아붓는 칵테일 기법)하는 모습이 '시시오도시'와 닮아서라고 말하던데요."

 

▲ 대나무로 만든 시시오도시(ししおどし) 모습. 물이 차고 빠지는 것에 따라 무게중심이 달라지며 탁 소리를 내 들짐승을 쫓았다고 한다. (자료출처=円周率3パーセント (Enshuritsu 3 percent), CC BY-SA 4.0 <https://creativecommon 

 

카오리: "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거기서 나온 건 분명 아니에요. 저희는 뱀부를 스로잉으로 만들지만 보통은 스터해서(휘저어서) 만들거든요. 하지만 그 소재는 앞으로 써먹어도 될까요?" (웃음)

나: (웃음) "그럼요. 제 아이디어도 아니고 어디서 본 건데요." 

 

내 옆자리에는 20대 남성 두 명이 앉았다. 슬쩍 귀를 기울여 보니 한국인이었다.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해 영어로 더듬더듬 주문하고 있었다. 말을 걸어 보았더니 이 분들도 '주류학개론' 채널을 보고 방문하게 됐다고 했다. 이번 여행 내내 꽤나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장 운이 따른 것은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들의 주문을 도왔다.

 

이날 밤에는 긴자에서 전철로 대여섯 정거장 올라가면 있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거리, 우에노의 아메요코 상점가(アメ横商店街)에 들렀다. 마침 같은 시기에 여행을 온 지인들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 우에노 아메요코 상점가에 위치한 '모츠야키 술집 톤보(もつ焼酒場 豚坊)'에 2023년 1월 7일 밤 10시경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한국인 등 관광객이 많았다.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늦은 시간이라 상점가의 태반이 문을 닫아 거리를 만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돼지고기 꼬치 야키톤(焼きトン)을 안주로 술을 마실 곳은 있었다. 야키톤은 일본 패전 후 이곳이 암시장이었던 시절부터 유행한 안주라고 한다. 돼지의 내장이나 비계를 포함한 각종 부위를 닭꼬치 느낌으로 바싹 구워내 맛이 좋았다. 초록색 곤약으로 만든 '회'는 겨자가 들어간 양념에 버무려져 나왔는데 그 양념에서 마치 초고추장 같은 맛이 나서 꽤나 그럴싸했다.

 

▲ 야키톤과 곤약 회 등 안주(왼쪽)와 보리소주 오유와리. (사진=전주호)  © 군포시민신문

 

첫잔은 일행 모두 맥주로 통일했고, 두 번째 잔은 따뜻한 보리 소주로 주문했다. 따뜻한 물과 섞은 '오유와리' 타입의 소주가 맥주잔에 담겨 나왔다. 오크통 숙성을 거치지 않은 술이지만 신기하게도 위스키와 닮은 맛이 느껴졌다. 스카치 위스키에서 원재료인 보리 맛이 난다는 말은 자주 들어 왔지만, 보리 소주를 마시고 나서 제대로 실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국산 보리 소주 제품도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면상의 한계로 여행기는 다음편에 마무리 지으려 한다. 네 번째 여행기에서는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세 곳의 사원과, 셋째날 잠시 들렀던 요코하마에 대한 감상 등을 다루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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