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푼 가슴을 안고 공항으로 향한 것은 2023년 1월 5일 오전 11시 경이었다. 목적지는 도쿄였다.
거의 3년 만에 일본으로 향하는 하늘길이 열렸다. 도쿄에 가는 것은 2019년 1월 이후 꼭 4년 만이다. 세상의 수많은 해외 여행지 중에 도쿄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미지의 도시가 아니다. 그럼에도 도쿄를 여행지로 고른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가깝다는 점,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 나 개인이 일본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등.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라면 오사카, 후쿠오카 등 더 싸고 가까운 도시도 많다. 내가 구태여 도쿄를 고른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 도시에 대한 나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2014년 처음 방문한 이래 도쿄는 점차 내 마음 속에 군포에 이은 '제 2의 고향'으로서 자리잡았다. 총 체류 기간이 채 한 달이 되지 않음에도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대해 갖는 적대적 감정과 비판적 사고와는 별개로, 이 도시는 2014년 이래 나의 관심사부터 대학 전공, 심지어 인간 관계까지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쨌거나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좋아할지 고를 수 없는 법이다. 내가 좋아하게 될 것들은 항상 먼저 내 마음에 부딪혀 온다.
그러나 이제 4년이다. 그 4년간 내 마음 속 도쿄의 이미지는 부풀려지고 미화됐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이후 9년의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고 코로나가 휩쓸고 간 이후 바뀐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미 인터넷이나 먼저 여행 간 지인 등을 통해 추억 속 장소들이 많이 사라졌다는 정보를 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도시가 여전히 내게 의미 있을지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다.
비록 목적지는 도쿄지만, 여행이란 목적지로 향하는 길까지도 포함하는 법이구나 싶었다.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평소에는 번화가 외에 갈 일이 없는 이웃도시 안양의 이모저모를 버스 투어처럼 살펴보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 공항에 가까워질 때에는 다리 너머 안개를 머금은 갯벌에 감탄하기도 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 구역에 들어섰을 때는 3년 만에 맞는 해방감에 그 자체로 기뻤다. 이윽고 날아오른 비행기가 강원도 즈음을 지날 때는 끝없이 펼쳐진 산악을 봤다. 눈과 마른 나무가 겹쳐져 햇살을 받아 빛나는 광경은 마치 검은 벨벳 원단을 연상케 했다.
이동 중에 무엇보다 즐거웠던 일은, 평소에는 도통 알 수 없던 현재 비행기의 위치를 지형과 지도를 통해 정확하게 알아냈던 순간이었다. 저가 항공기는 비행기 항로 등을 알려 주는 좌석 모니터가 없다 보니 비행 중 현재 위치를 알기 어렵다. 창밖의 풍경으로 어림짐작할 뿐이다. 동쪽으로 향하는 비행기의 오른쪽 창가에 앉은 내 눈에는 본래라면 육지가 보여야 할 터였다. 그러나 도착이 가까워 오자 창가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나타났다. 얼마 뒤 비행기가 요동치며 다시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 찼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싶어도 휴대전화는 비행기 모드 중이니 방법이 없다.
궁여지책으로 구글지도 앱을 열어 보았다. 창밖에 보이는 것과 닮은 지형이라도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휴대전화 GPS는 데이터가 차단된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작동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 휴대전화가 어렵게 잡아낸 지도상 위치와 창밖의 풍경을 비교해 보니, 니은 자 모양의 호수가 양쪽 모두에 보였다. 이바라키 현의 히누마(涸沼) 호수였다. 일본 혼슈 동편 해안에 가까운 장소다. 이 비행기는 목적지를 지나쳐 태평양에서 U턴을 한 뒤 공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와 보니 웬 축구 팬들이 모여 있었다. 스페인 FC 바르셀로나의 전설로 불리는 전 축구선수 '카를레스 푸욜(Carles Puyol)'이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시간 일본에 입국한 것이었다. 운은 무심한 사람에게 따르는 법일까. 아쉽게도 축구 팬이 아닌 나는 갈길을 재촉했다. 수많은 팬들에 둘러싸여 재빨리 사라지는 그를 캐리어를 끌며 따라잡을 자신이 없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있는 것처럼, 나리타국제공항 또한 사실 도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름처럼 치바현 나리타시에 위치한 이 공항은 도쿄 외곽까지 가는 데만도 네다섯 개 시를 거쳐야 하는 거리에 있다.
그래서 4년 전에는 김포에서 출발해 도쿄의 턱밑에 위치한 하네다 공항으로 도착하는 노선을 선호했었다. 당시엔 비행기 값 차이가 10만원 이내였다. 나리타에서 소요되는 왕복 교통비와 시간을 감안하면 하네다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위해 알아보니 하네다 노선이 20만원 이상 더 비싸졌다. 지갑이 얇은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케이세이(京成) 본선 특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서울지하철로 비유하면 1호선 급행 열차를 타고 경기도 평택에서 서울까지 올라가는 느낌일까. 속도는 완행보다 빠르고, 가격은 일반 전철 값이다. 더 비싸고 빠르고 편한 교통수단은 많았지만 타려면 기다려야 했다. 이미 해가 진 마당에 돈을 더 내고 시간까지 날릴 수는 없었다.
첫날 숙소를 잡은 신주쿠에 가려면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아직 도쿄에 들어가기 전, '야와타(八幡)'라는 처음 듣는 마을에서 내렸다. 환승을 위해서는 역 밖으로 나와야 했다. 민영 철도가 많고 무료환승제가 없는 일본에는 도보 3분 거리의 역과 환승할 때도 연결통로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
역으로 바로 향하려고 보니, 이곳이 이번 여행 처음으로 접하는 일본의 도시였다. 출발 전에 주변을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돌아다니다 달을 보려 멈춰 섰는데 옆에서 맑은 목소리의 일본어가 들린다.
"과자는 한 사람에 한 개 씩이다?"
아이 둘을 데리고 편의점에 들어가는 아이 엄마의 말소리였다. 이곳이 나와 똑같은 사람들의 삶의 공간임을 새삼 느끼자, 처음 보는 도시가 문득 친근해졌다. '하네다로 왔다면, 다른 교통수단을 탔다면 이런 순간을 느낄 순 없었겠지' 라고 생각했다.
뒤돌아 환승역으로 가려는데 아이 엄마가 편의점에서 나왔다. "다른 곳엔 있으면 좋겠네!" 아마도 아이들이 먹고 싶은 과자가 그곳에 없었던 모양이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다. 꼭 아이들이 과자를 찾길 바라며 여정을 계속했다.
후지산도 식후경이라,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손가방도 없이 외투만 걸치고 숙소 인근의 술집을 찾아 나섰다. 먼저 라멘으로 간단히 요기하고는 안주가 맛있어 보이는 이자카야를 찾아 헤맸다.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는 전갱이 튀김 안주에 맥주 정도만 마시고 일어섰다. 맛은 있었지만 신주쿠의 샐러리맨들이 모이는 목요일 저녁임에도 손님이 나 뿐이었다.
두 번째 가게는 발길 닿는 데로 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닭꼬치(야끼토리) 집이었는데 토리사시(닭 육회)를 취급한다는 메뉴판을 보자마자 곧장 들어갔다. 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요리였다.
폐점 시간을 앞두고도 매장 안은 시끌벅적했다. 점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내게 국적을 묻더니 꽤 능숙한 한국말로 주문을 받았다. 궁금했던 토리사시만 시키려 했는데, 마지막 주문이라는 그의 말과 옅은 취기에 홀려 꼬치 6종을 같이 시키고 말았다.
토리사시는 닭고기의 겉부분만 데쳐 균을 제거한 모양새였다. 맛은 전혀 비리거나 질기지 않았다. 딱 기분 좋을 만큼의 탄력이 있어, 씹으면 잠시 쫄깃한 척 하다가 스르륵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곁들여진 미역과 유자후추, 와사비가 잘 어울렸다.
함께 시킨 일본주를 다 비울 즈음 닭꼬치가 나왔다. 이때부터는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다. 배는 부르지만 손이 멈추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간 꼬치였다. 피를 머금은 레어 상태로 익혀져 나온 닭의 간은 비리고 느끼하면서도 자꾸 손이 가는 것이 소 생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쉬운 점은 술 선택이었다. 느끼한 맛을 잡고자 이어서 시킨 위스키 하이볼은 꽤나 위스키 본연의 맛에 충실한 스타일이라서, 다시 말해 레몬이나 설탕이 들지 않은 맛이어서 간 꼬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사워나 맥주가 더 어울릴 듯 했다.
편의점에 들러 숙취에 대비하기 위한 푸딩과 비타민 워터를 사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은 밤이 다 돼서야 도쿄를 즐길 수 있었으니, 내일은 하루를 이틀처럼 살자고 다짐했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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