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1회 리영희 발자취 기행기

경성공고->흑석동 하숙집->심훈 생가터&효사정공원 시비->효사정공원&용양봉저정->사육신공원

신완섭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기사입력 2022/06/28 [08:08]

[기고] 제1회 리영희 발자취 기행기

경성공고->흑석동 하숙집->심훈 생가터&효사정공원 시비->효사정공원&용양봉저정->사육신공원

신완섭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 입력 : 2022/06/28 [08:08]

  올해 3월 발족된 리영희기념사업회(대표 정금채)의 기획사업으로 매달 한 번 ‘리영희 읽기’ 행사에 이어, 활동분과(분과장 박미애)에서 연 2~3회 마련하는 ‘리영희 발자취 기행’ 첫 행사로서, 선생의 경성 유학 시절인 1942년(14세)에서 1945년(17세)까지의 4년간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매우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제1코스 경성공고(현 서울공고)

 

  교정에 들어선 시간이 오전 10시 15분경, 교정 벤치에서 해설사를 자임한 내가 나서서 선생의 탄생과 유소년 시절을 소개했다. 1929년 12월 2일 평북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5세 때 삭주군 대관면으로 이사, 대관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영림서(오늘날 산림청 산하기관) 공무원 아버지 리근국과 벽동 최고부잣집 딸인 어머니 최희저 사이에서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친구였던 서울대 경제학과 박현채 교수가 압록강 시골뜨기라는 의미로 ‘말갈’이란 별명으로 선생을 놀려댔지만, 1930년대 당시 세계 최대 운산금광, 세계 최대 전력량의 수풍발전소, 정주-삭주 간 정삭선 지선(支線)이 놓이고 전화까지 이미 들어와 있어서 전기+전철+전화 근대문명의 수혜를 가장 일찍 받은 곳이다. 그러니 지도상으로 그 먼 시골에서 경성으로까지 유학온 것이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어 경성공립공업학교(이하 경공)의 변천사를 잠시 소개했다.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해 5월 고종이 칙령을 내려 서울 명동 일대에 공과 위주의 관립상공학교를 세운 것이 계기가 되어 1904년 종로 수송동 동숭동 일대로 옮기며 교명을 관립농상공학교로 개편한 이후 1906년 공과는 전문대학 과정의 관립공업전습소(이후 서울공대), 중고교 과정의 관립공업학교(이후 서울공고)로 나뉘었고 상과는 선린상고로, 농과는 수원농림학교(이후 서울농대)로 분교되었다. 선생이 입학했던 당시의 경공은 1939년 그곳 대방동으로 옮겨와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인 5년제 갑종 공립 내선공학교로서 천황이 임명하는 칙임관 교장이 부임해 있는 국내 최고의 명문학교였다. 이러한 사실은 설명 이후 둘러본 학교 ‘역사관’에서 모든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명진스님 왈, 서울공고가 배출한 3대 스타는 리영희 선배를 필두로 자신과 후배인 축구선수 안정환을 언급했지만, 이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졸업생이 스타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쓰신 자전적 에세이집 <역정(歷程)>의 몇 토막을 빌려 당시를 회상해 본다.

  # 기하학과 用器畵에 대한 취미는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시작되는 나의 언론계에서의 국내외 정세의 관찰과 그 후 대학에서의 국제관계의 연구 및 집필에 있어서 어느정도 사고의 치밀성 균제성(均齊性) 같은 성향의 기초적 요소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86p)

  # 벌써 그해 1학기에 ‘학도군사동원령’이 발표되어 고등학교 전문학교 학생은 학도병이 아니면 근로동원으로 나가 버리고 학교는 사실상 문을 닫은 거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조선계 전문학교는 괴이한 이름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보성전문(고려대)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연희전문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은 해괴망칙하게도 농업지도원양성소로 격하 개명되었다. 사실상의 폐교인 것이다. (109~110P)

  # 4학년이 되자 개학한 첫날의 조회에서 4학년 전원에 대한 ‘학도봉국근로령’이 시달되었다. 앞으로 1년간 학교에는 나올 필요없이 각기 지정된 현장에서 노동을 한다는 말이다. 이날부터 나는 학생이 아니었다. 전국의 4학년생이 모두 그랬다. (110P)

  # 해방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나마 자기 민족에 대한 나의 몽매했던 의식을 깨우쳐준 이가 나타났다. 그분은 학교의 선생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며, 어떤 이름난 투사도 아니었다. 나의 중학교 생활을 통해서 나는 사상적 의미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을 접해 본 일이 없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나의 정신적 사상적 성장에 있어서 큰 불행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학교의 성격과 환경이 그 주된 원인이다.(중략) 나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몽롱했던 사상적 시야에서 안개를 거둬 준 분이다. 전공 최X남씨가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참 잘도 생겼더니!  (113~120p)

  40분 이상 학교에 머물며 선생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교정 내에는 어떠한 발자취의 흔적이 없다. 다만 그 당시에 지어진 3층짜리 교사(校舍)가 현재 서울시 문화재 13호로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다음 코스인 흑석동 하숙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2코스 흑석동 하숙집

 

  상도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중앙대 정문 쪽에 당도한 시간이 오전 11시 25분경, 사전답사 때의 예측과 달리 30분 정도 초과한 시간이다. 선생이 왜 4km 이상 떨어진 먼 곳에 하숙집을 정했는지,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정확한 통학코스는 어땠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선생이 <역정>과 <대화>에서 언급한 대목들로 당시의 대강을 살펴본다.

 

  # 지금의 중앙대학 정문 앞에 있었던 하숙집(이 집은 제법 의젓한 기와집이었다)에는 방 셋에 여섯 학생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역정 98p)

  # 2학년 말까지는 전차 노선의 종점인 한강 건너 노량진에서부터 4km 가까이를 걸어다녔다. 한강 건너 종점이 현재의 대방동에서 단선으로 연장된 것은 3학년(1944)부터다. 여름이면 마른 먼지흙이 구두를 덮었다. 비가 내리면 그것이 온통 진창이 되어 발을 가눌 수가 없었다...(역정 84P)

  # 빈대와 이에 시달리니 언제나 수면 부족 상태였다. 한창 먹을 나이에 배를 곯고 있는 몸에서는 빈대와 이에 혈액마저 뺏기니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목욕을 자주 못할 때여서 속옷의 실밥 틈에 서식하는 이 때문에 누구나 때와 장소를 가릴 체면도 없이 긁적거렸다  (역정 94p) 

  # 하숙집에는 가끔 깊은 밤중에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치마 속에 떡을 싸갖고 팔러오는 노파가 있었다. ‘야미’ 장사 할머니다. 이 할머니가 찾아오는 밤은 나와 동료 학생들의 생일날이었다. .. 그렇게 고마웠던 할머니도 3학년(1944) 말부터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식량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더욱 철저해지고 ‘야미’ 식량도 거의 완전히 근절된 것이다  (역정 98p)

  # 경성의 식량 사정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져서 견딜 수가 없더라. 네가 학교 때 점심시간에 내가 가져간 강냉이를 좋아해서 너의 쌀밥과 바꿔먹던 생각이 나길래 막 물이 오른 강냉이를 몇 개 따서 삶아 보낸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먹어주면 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겠다, 공부 잘 하고 성공하길 빈다. (역경 100p: 고향친구 당억(長億)이 보내준 삶은 강냉이 여섯 자루)

  # 少年立志出鄕關 어려서 뜻을 품고 고향을 나왔으니

    學若不成死不歸 학문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리라

    埋骨豈期墳墓地 뼈를 묻을 곳이 어찌 선조의 묘소뿐이랴

    人間到處有靑山 뜻있는 이에게는 세상 어디나 청산이다 

                                 –겟쇼(月性)스님 ‘면학의 글’(대화 57p)-

  #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쉬 늙지만 배움은 이루기가 어렵나니

    一寸光陰不可輕 한 치의 시간도 허비하지 말라 –주희 ‘勸學文’(대화 57p)- 

 

  <대화>에서 언급한 대로 선생은 열심히 면학에 힘써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려 노력했지만, 경성 유학 시절은 최악의 상태였다.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 이후 학업은 정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각종 군사동원 근로동원에 시달려야만 했다. 참기 힘든 건 굶주림이었다. 매달 아버지로부터 부친 월급(90원)의 절반에 가까운 40원의 학비를 받았으나 월사금 4원, 하숙비 26원을 내고 나면 10원으로 한달살이를 해야 했다. 당시의 1원은 현재 가치로 따져보면 약 8천 원에 해당되므로 겨우 8만 원으로 통학비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으므로 한창나이인 10대 소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해방되던 1945년 11월 복학 후에는 담배말이 성냥장사 등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서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학교 교재였던 책 한 권을 서점에서 훔친 사건은 두고두고 선생을 괴롭혔다.

 

  # 어느날 시장에서 담배를 팔고 난 뒤에 충무로3,4가에 자리 잡기 시작한 책방을 찾아갔다. 몇 장 펼쳐보는 사이에 나의 머리에서는 그 책값과 그것을 위해 내가 팔아야 할 담뱃값의 분량과 남대문시장에서 보내야 할 시간 등이 계산되고 있었다. 머리는 아직 망설이고 있는데, 얄팍한 그 <The Use of Life(생활의 선용)>을 말아쥔 나의 손은 눈의 동작과 함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발은 벌써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그 책가게의 문지방을 넘어서 행길에 나와 있었다.  (역경 134P)

 

 

  제3코스 심훈 생가터 & 효사정공원 시비(詩碑)

 

  흑석동성당 안쪽에 자리한 심훈(1901~1936) 생가터(당시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아버지 심상정의 3남 1녀 중 3남으로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대섭이고, 1920년 이후에 훈(薰)이라고 썼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19살)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나와,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귀국 후 심훈은 염군사의 연극부에 가담해 신극연구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했고, 영화를 찍기도 했다. 동아일보에 취직해서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으며, ‘철필구락부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했다. 그 후 일본에서 영화를 배운 후 돌아와, <먼동이 틀 때>를 원작, 각색, 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0년쯤에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가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필경사’에서 창작 생활에 힘을 쏟았다. 그때 나온 소설이 유명한 『상록수』이다. 그의 작품 『탈춤』이나 『상록수』를 보면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저항의식을 형상화하고 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시 ‘그날이 오면’을 통해서는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고 있다. 심훈은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했으나 안타깝게도 소설 『상록수』 출간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35세 나이로 요절했다.

  생가터에서 10분 남짓 한강 변 육교를 넘어가면 ‘효사정 공원’이 나오고 그 입구에 그의 시비 ‘그날이 오면’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우리 일행은 소리 내어 그 시를 읽는 것으로 심훈의 저항정신을 기려 보았다. 혹자는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친일로 변절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이유는 경성고보 동기동창이자 절친이었던 박헌영과의 사상적 교감 외에 두 형 우섭 명섭과 처남 이해승 등 친인척 대부분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반민족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을 정도로 짧은 생애 동안에 그가 보여준 민족혼은 많은 국민에게 큰 감동을 주고도 남는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제4코스 효사정공원 & 용양봉저정

 

  1) 효사정공원 얼음막걸리

  효사정(孝思亭)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이조판서 강석덕이 붙였고, 그의 아들 강희맹은 ‘효사정기(孝思亭記)’를 남겼는데 강희맹의 이 기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금천현 누정조에 기록되어 있다. 정인지, 서거정, 신숙주, 김수온 등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도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을 남겼다. 원래 효사정이 있었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자리를 택해 1993년에 정자를 세운 것이다.

  이 성스러운 자리에서 문일중 교사인 정덕교 선생이 싸 온 냉동막걸리를 풀었다. 이미 정오를 넘긴 시간이라 다들 지치고 허기진 상태였으므로 생수 같은 막걸리를 마실 생각이 간절했음에도 여전히 꽝꽝 얼어있어서 마음먹은 대로 술잔에 따를 수가 없었다. 이때 정 선생이 배낭에서 톱을 꺼내더니 술병 주둥이 아래를 쓱쓱 썰어 반 토막을 내더니 얼음 동동 막걸리를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세상에, 톱을 갖고 다니다니, 본인은 다용도 선용(善用)의 목적으로 갖고 다닌다고 하였으나 흉기를 갖고 다니는 이유가 석연치 않아 더욱 서늘한 기분으로 막걸리 파티를 즐겼다는 죽어도 잊지 못할 썰렁 사연을 남겼다. 어쨌든 한강을 내다보며 마신 막걸리 맛은 꿀맛이었다. 

 

  2)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패스

  龍驤鳳翥는 ‘용이 고개를 쳐들고 봉황이 날아오른다’는 뜻으로 현재 노량진 수원지 건너편 작은 언덕에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을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노들강(지금의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여 건너다보니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잠시 어가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축조연대는 1789년(정조 13) 이후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애초 일정상으로는 효사정공원에서 한강 변 길 곁 이곳을 거쳐 사육신공원으로 걸어가려 했으나 날씨도 너무 덥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어 전철로 노들역에 이동하는 바람에 그만 패스하고 말았다. 오늘 일정 중 유일한 패스였으나 리영희 발자취 기행과는 다소 무관하다며 스스로 자위했다. 

 


  제5코스 사육신공원

 

 

  한강대교와 노량진역 사이의 언덕에 있는 사육신묘(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8) 일대 5만㎢의 면적을 1978년 성역으로 가꾸어 문을 연 공원이다. 사육신묘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를 꾀하다 들켜 죽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문기 등의 일곱 충신을 모신 곳이다. 원래는 1456년 단종복위 사건 주모자 중 거열형(사지를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으로 죽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4구의 시신을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몰래 수습하여 한강 건너 노량진에 묻어준 준 곳으로 공원 조성 한 해 전인 1977년 하위지 유성원의 가묘와 사육신에 추가된 김문기 묘를 이장 안치하여 7구의 무덤과 함께 현재 사당 의절사에서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단종복위 사건(1456)은 1455년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7대 왕위에 오른 세조 2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별운검(=특별 무장 호위군)으로 선정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무신 유응부를 통해 세조를 제거하려고 모의한 사건으로 한명회의 지략으로 운검을 대동하지 않아 불발로 끝난 일을 이후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이 밀고하여 17명의 주도 인물과 70여 명의 연루자들이 대거 희생된 사건이다. 30년이 지난 즈음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六臣傳)>을 통해 6신으로 거명한 이들을 300년이 지난 정조 때에 공식적으로 복권시켰는데, 1977년 안기부장을 맡고 있던 김재규의 입김에 의해 김녕 김씨 종친회에서 무인 출신 사육신 유응부 대신 민신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三重臣)으로 복권된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현창(顯彰)하려는 움직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서서 기존 육신 묘에 김문기를 추가하는 안으로 최종 결정, 김문기 묘가 이곳으로 모셔졌다.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 합의 사항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표하면서 다시 복잡해졌고.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최초의 6인에서 변함이 없다고 1982년 합의 사항을 재확인했다. 이 때문에 공식적으로 김문기는 사육신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후 종친들 간의 다툼으로 인해 <선양회>와 <현창회>로 나눠 한해 두 번의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의절사에서 향불을 지피고 다 같이 묵념하는 것으로 일곱 충신에 대한 예를 표했다. 이때의 시각이 이미 오후 2시에 가까웠으니 배도 고프고 지친 탓인지 리영희 발자취와 사육신 묘가 무슨 관계가 있어 이리도 개고생을 시키느냐는 일행의 항변에 행사 기획을 맡았던 나로서는 선생의 ‘진실’ 정신과 사육신의 ‘충의’ 정신이 일맥상통한다고 답했고, 이 일대가 고향인 정 선생이 나서서는 당시 리영희 선생이 노량진 전철을 이용 통학하려면 이곳 앞을 지나갈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막무가내 연관성을 들춰 겨우 입막음을 했다. 

 

  제6코스 늦은 점심

 

  장장 4시간의 발자취 기행을 끝내고 우리는 부랴부랴 노량진수산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날 식당 섭외를 맡은 정 선생이 수산시장 초입 ‘전망 좋은 집’으로 일행을 이끈다. 아니 수산시장 건물을 코앞에 두고 무슨 수작이지, 그러면서도 나 역시 허기를 이기지 못해 이끌려 갔으나 의외로 요리 메뉴도 다양하고 시원한 생맥을 거푸 2잔을 걸치다 보니 나와바리 정선생의 혜안(?)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하루 전날 ‘군포시민신문 창간 27주년/재창간 7주년’ 행사에서 ‘올해의 기자상’을 수상한 기념으로 내가 금일봉 5만 원을 쾌척하는 객기도 부렸으니 4시간 동안 1만 보를 넘는 강행군을 종결짓는 그 끝은 창대했다고 결론지으며 제1차 리영희 발자취 기행을 마무리지었다.

  이번 1차 발자취 기행은 선생의 책 <역정> 제1부 ‘식민지하의 조선 소년’ 편을 토대로 삼은 기행 행사였다. 올가을에 다녀갈 2차 발자취는 선생의 해양대학 시절이다. 따라서 가을 행사는 버스를 대절하고 더 많은 인원이 참가하여 의식의 눈을 뜨기 시작했던 선생의 대학 시절로 함께 가 보기를 기대한다. 1차 기행에 함께하신 48년생 최고령 이강헌님 이하 정금채 대표, 김동민 학술분과장, 정덕교 선생, 박미애 활동분과장, 막내 임성용 씨 모두 모두 더운 날씨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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