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칼럼] 특성화고의 밑바닥

김건아 (군포이비즈니스고 3학년) | 기사입력 2022/04/27 [07:02]

[청소년칼럼] 특성화고의 밑바닥

김건아 (군포이비즈니스고 3학년) | 입력 : 2022/04/27 [07:02]

▲  김건아  군포이비즈니스고 3 학년  © 

특성화고에 온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다. 나머지 반년이 지나면 학교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때쯤이면 앞으로의 중장기적인 로드맵이 있어야 할 터지만, 나에겐 없다. 그래서 저 울타리 밖의 풍경은 안개가 쫙 깔린 풍경으로 다가온다. 보기에 여간 우울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울타리 안쪽에 시선을 두는 것이 마음 편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 점점이 박혀 있는 2년간의 기억들 속에서 그 어떤 유의미한 것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진로를 위해서 도대체 뭘 했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현기증이 나서 시선을 그저 허공에 둘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눈에 같은 반 아이들 몇 명이 밟혔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 때문이다. 학업에 열의가 없고 진로를 위한 노력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로라는 청사진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이다. 수업 시간에 자거나 멍때리거나 딴짓한다는 공통점이다. 이 아이들은 평소에는 활기찬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한 이들이 학업과 진로 설계에는 열의가 없는 것이다. 왜일까? 물론 의지를 갖지 않는 개인에게 50%나 70%, 혹은 99%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1%라도 사회가 그것에 대해 자유롭지 않다면 우리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육의 문제이다.

 

어떤 선생님이 문득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은 같은 반에서 같은 교복 입고 있어도 사회에 나가면 급 차이가 난다”.

이 말은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은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급을 나누는 것. 이런 목표하에서 교육은 학생들의 급을 나누기 위해 구성된다. 가장 쉽고도 완벽한 방식이 채택됐다. 교과서에 쓰여 있는 것을 열심히 전달만 하는 방식. 텍스트를 던져주고 이게 시험에 나온다고 알려주면 학생들이 알아서 열심히 외운다. 던져준 텍스트가 학생으로부터 얼마나 잘 돌아오는지 측정하면 끝나는 간단한 과정이다. 이런 방식의 부작용으로 수업이 지루해지기는 하지만, 학생들이 시험을 잘 봐서 높은 등급에 위치하겠다는, 혹은 최소한 하위 등급에 위치하지는 않겠다는 동기가 있으면 그 정도는 능히 견뎌 낼 수 있다.

 

문제는 여러 이유로 그 동기들을 얻지 못한 학생들이 소수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그런 동기들을 지니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하여 구성된 수업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지루한 걸 못 참는 천성을 가졌다면 더욱더.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은 뻗치지 않거나 혹여 뻗쳐도 본인이 거부한다. 이렇게 그저 방치되어 있으면서 학업에 대한 의지를 빠른 속도로 잃어간다. 이런 학생들은 결국 교육과정에서 낙오되고 등급의 최하위에 위치하는데, 교육의 목표가 ‘급 나누기’이니 이는 전혀 문제 되는 사항이 아니다. 또한 최하위권 학생들은 대부분 진로에 대한 의식조차 얻지 못한다.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진로를 구상할까.

 

교육으로 급을 나누고 그것을 토대로 다시 사회의 급을 나누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교육으로 급을 나누면 인적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가능하다’. 이것은 내가 봤을 때 지금의 사회 상황과는 맞지 않는 생각이다. 이는 40년쯤 전에 존재하던 사회에나 적용될 수 있다. 공장 노동자-사무직-관료, 의사, 법조인 등으로 구성된 사회, 그러니까 수직적 성격이 강한 사회에서나 통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그러한 형태가 교육의 결과인 수직적 ‘급(학력)‘과 잘 들어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40년 전의 사회가 아니다. 산업의 종류가 많아졌으며 무엇보다 사회 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다양해지면서, 그것들의 충족을 위해 필요한 능력 또한 폭발적으로 다양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육이 아무리 학생들의 급을 나누어 갖다 바쳐도 사회는 그것을 자신과 맞출 수 없다. 넓은 발을 가진 사람이 길쭉한 신발을 신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급을 나누는 교육으로는 인적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교육을 통해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교육의 목표를 잘 설정하지 않으면 사회와 미스매치를 일으키게 된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는데 교육은 여전히 학생들의 급만 나누고 있다. 급을 나누는 교육은 학생들의 능력을 찾아주지 않고 개발시켜주지 않는다. 이제 교육은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총체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단 한명의 학생도 빠짐없이 관심을 기울여 그들 각각의 능력이 무엇인지 포착하고 발현시켜 적절한 곳에 쓰이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의 낭비를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교육, 다양하면서도 깊은 교육을 구상하고 실현시켜야 함은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모든 학생의 행복을 위하여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교육에서 배제된 학생이 나와 우리 반 몇몇 아이들 뿐일 리 없다.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을까. 난 그저 특성화고에서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을 목격했을 뿐이다. 특히 특성화고라서 더욱 그렇다. 여기엔 공부와 자신의 진로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들이 참 많다. 이들은 급 나누기 교육에서 떨어져 나와 특성화고로 왔지만, 여기에서도 급 나누기 교육을 경험하면서 다시 한번 최하위권을 이룬 학생들이다. 특성화고에서 상위권이어도 사회에 나가면 차별받으며 더군다나 좋은 직장이 몇 안 되기에 대부분 자신의 전공과는 상관없는 저임금 비정규직의 늪을 헤매는 상황이다. 이런 사회에서 특성화고의 최하위권 학생들은 도대체 얼마나 낮은 계급에 속해 얼마나 자신의 몸과 영혼을 소진해 갈까.

 

다만 이들을 진정 불행케 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소질이 뭔지, 이 각박한 사회에서 어떻게 소소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지, 자신의 자아가 진정 추구하는 게 뭔지를 알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에 교육의 책임이 큰 만큼 일단 이들의 학교인 특성화고가 먼저 변화를 꾀해야 한다. 내가 2년 반 동안 다닌 특성화고엔 적지 않은 역량과 자원이 있다.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몰려있는 그 분배구조를 살짝만 바꾼다면 나머지 학생들이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크고 작은 프로그램들을 충분히 설계하고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몇 학생들은 더 이상 교실에 잡아두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과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바꿔나갈 때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나 잘하는 것 몇 가지를 알고 사회에 나간다면 설령 몸은 소진할 망정 영혼을 소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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