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역사기행

참자연교사회와 함께한 서울 역사기행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2/03/28 [16:18]

서울 서대문 역사기행

참자연교사회와 함께한 서울 역사기행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2/03/28 [16:18]

3월 26일, 전국적으로 내리는 봄비가 이곳 상공에도 흩뿌려지고 있다. 참자연교사회(회장 김현복)가 주관하는 기행에 늦지 않도록 8시 10분에 산본역에서 탑승하여 전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에 도착한 시각이 오전 9시 15분경, 약속 시간인 9시 30분에서 불과 2~3분을 넘기지 않은 시각에 참가자 8명 전원이 역사를 빠져나오자 길옆 봄비를 머금은 매화가 우릴 반긴다. 서울시편찬위원회 연구관이셨던 나각순 박사는 “조선 시대 경기감영이 있었던 서울적십자병원 대로 건너 농협중앙회 자리에는 고마청(雇馬廳;입궐 전 말에서 내리던 장소)과 김종서 장군의 집터가 있었다. 장군은 조선 초기 6진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을 반대하던 과정에 지금의 집터에서 수양대군 심복의 철퇴를 맞아 세상을 하직했다.”며 이곳이 경교(京橋)가 가로놓여 있던 서대문의 요지였음을 일러준다.

 

 4.19혁명기념도서관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우산을 받쳐 들고 옛날 돈의문 자리로 조금 걸어 올라가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나온다. 이 자리에는 제1공화국의 실세였던 이기붕과 박마리아 부부가 살던 집이 있었다. 그가 부정 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3·15부정선거가 4·19혁명을 불러왔고, 이기붕 부부와 두 아들은 이곳에서 권총으로 동반 자살했다. 박정희 정권은 4·19혁명정신을 집권에 이용하기 위해 1963년 이기붕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 이곳을 4·19혁명 희생자 유족들에게 무상으로 대여해 주었다. 1964년 9월 1일 ‘4·19기념사설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 1970년부터 신건물을 지어 1971년 ‘4·19도서관’으로 개관했다가 1993년 김영삼 정부 시절 국립4·19민주묘지 성역화사업을 벌이면서 1998년부터 신축건물을 지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니 혁명의 역사는 피를 머금고 이어온 것이다.

 

 경교장과 함께한 사람들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건물 바로 위 강북삼성병원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자 경교장(京橋莊)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2층 공사가 한창이라 1층 일부와 지하 1층 관람만 가능했다. 알다시피 경교장은 해방되던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수반 김구 일행이 귀국하여 서거한 1949년 6월 26일까지 머물며 임시정부 업무를 수행했던 역사적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큰돈을 번 최창학이 1938년에 지은 사저로 본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그가 친일 행적을 어느 정도 감출 요량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한시적으로 제공해 준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중화민국대사관, 월남대사관, 고려병원(현재 강북삼성병원) 의사휴게소 등으로 이용되다가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며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되었다. 유품 중에서 ‘愼其獨(신기독)’, 즉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자리를 떴다.

 

강북삼성병원 입구 앞 사거리는 돈의문(敦義門) 자리가 있던 자리다. 길바닥 한 켠에 새겨진 동판 말고는 돈의문이 있던 자리라고 식별할 아무런 표식도 없다. 돈의문은 1396년(태조 5년) 서울성곽 축조 당시 건립된 서대문(西大門)의 정식 명칭이다. 1413년(태종 13년) 폐쇄되었다가 1433년(세종 15년)에 정동길 부근으로 옮겨 세워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711년(숙종 37년)에 재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차가 들어서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철거됐다. 서울시는 2010년 4대문 중 유일하게 미복원 상태였던 돈의문을 2013년까지 원형대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밝혔으나, 현재까지 해당 사업은 교통방해 문제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실무에 관여했던 나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지하도로를 뚫고 그 위에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하거나, 공중건축물로 세우거나, 심지어는 홀로그램 영상물로 대체하자는 여러 안이 있었으나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잖아 돈의문의 실물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며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진열된 은신군 신도비 등 (사진=최희양)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일가가 소유했던 경희궁 일대의 위세를 암시하듯 박물관 외부에는 대원군의 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과 조부 은신군과 손자 영선군, 증손인 이우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역사의 부침과 함께 했던 종루 주춧돌, 시전행랑 유구(遺構), 창경궁 종묘 육교 난간석, 운현궁 석물, 총독부 청사 철거 부재(部材), 광화문 콘크리트 부재, 노면 전차까지 한 시대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육조거리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니 ‘한양의 상징대로-육조(六曹)거리’ 특별기획전이 3월 27일까지 4개월째 열리고 있었다. 육조거리는 광화문~세종로 사거리 사이의 대로를 말하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경관직’을 기준으로 보면 한양에는 중앙관청이 총 84개 있었다. 이 중 육조거리에는 의정부를 비롯 육조(서열순위로 이조,병조,호조,형조,예조,공조) 사헌부, 한성부, 중추부, 기로소 등 핵심 관청들이 모여있던 공간이다. 전시물을 관람하다 보니 당시 관원들의 출퇴근 시간은 묘사유파(卯仕酉罷), 즉 묘시(오전 5~7시)에 출근해서 유시(오후 5~7시)에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일 평균 12시간 근무에다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는 새벽 출근이나 야근도 허다하였고, 녹봉은 품계에 따라 1과(정1품)~13과(종9품)로 나눠 당상관 이상 5과에는 쌀 1석9두와 황두 1석5두, 말단 11~13과에는 쌀 10두에 황두 5두가 지급되었다. 참고로 당시 세 식구가 한 달에 먹는 쌀의 양은 9두 정도였다. 조선 후기 도성은 술의 과소비가 극심하였는데, 한양 가게의 절반은 술집일 정도여서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발령했다 한다. 육조마다 빠짐없이 연못을 두기도 했다. 그 이유는 화재시에 다량의 소방수를 길을 수 있는 실용성과 함께 청렴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휴식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함이었다. 특별히 나라 살림을 도맡은 호조에는 ‘불염정(不染亭)’이라는 정자를 두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하라는 뜻을 담아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를 보는 관원에겐 청렴강직이 최고의 덕목이리라. 새로 출범할 윤 정부에게도 ‘불염’ 정신을 일러주고 싶다.

 

 경희궁 정전으로 들어가는 숭정문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박물관을 나와 경희궁(慶熙宮) 쪽으로 이동한 시각이 벌써 정오를 넘겼다. 경희궁은 처음 창건(1617년 광해군 9)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으로 지어졌다.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인조 아버지)의 옛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慶德宮)이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은 작금의 청와대 이전 소동과 오버랩된다. 흉궁이라든지. 길지라든지. 왕기가 서렸다든지 아마 당시에도 천공이나 건진법사 같은 주술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인조 즉위 때 창덕궁/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으므로 즉위 후 여기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창경궁 복구 뒤에도 여러 왕들이 머물렀으나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이후 서울중·고)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1980년 서울고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5년 궁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한 후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다섯인데, 정문은 동북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興化門)이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사라지고, 현존하는 건물은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에 불과하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으며 흥화문 역시 1618년에 세워진 건물로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왔으나, 1932년 이전되어 일본인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 27) 회상전의 북쪽에 지었던 정자로, 1923년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서울 종로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와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곳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되면서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으며,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이는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인데다가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서대문형무소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예까지 온 김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도 둘러보자는 일부 여론(?)을 존중하여 독립문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점심시간을 제법 넘긴 시간이라 다들 주둥이가 조금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맛집이라고 찾아간 도가니탕 전문식당 『대성집』은 대기 손님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대로 건너 영천시장으로 찾아간 곳이 탕과 구이집. 도다리쑥국과 매운탕, 모듬생선구이를 주문하여 막걸리를 곁들이니 튀어나온 주둥이는 어느새 쑥 들어가고 영천시장의 입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연신 외쳐댄 “한 병 더!”로 막걸리 예닐곱 병을 비웠을까, 주정으로 비칠지 몰라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독립문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한양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길의 출발점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일제가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협회 주도로 자금을 모아 세운 문이 독립문이다. 1897년 건립 당시 현판을 이완용(당시 독립협회 회장)이 쓴 것으로 봐서 이 문에 새긴 ‘독립’의 의미는 일본이 아닌 청나라를 주축으로 한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붉은 담장 건너 망루가 있는 곳이 역사관 출입구이다. 안내 책자의 이동 동선인 '전시관 → 중앙사 → 12옥사 → 11옥사 → 공작사 → 한센병사 → 순국선열추모비 → 사형장' 순으로 돌아보면 된다. 입구 정면의 전시관은 옛 보안과 청사로 1923년에 지어져 사무공간, 회의실, 소장실, 취조실로 사용됐다. 1층 전시 내용을 옮겨보면 이곳의 시작은 1908년 일본인의 설계로 인왕산 남쪽 현저동 101번지에 한국 최초 근대식 감옥이 준공되면서부터다. 당시 '경성감옥'은 영은문을 통해 의주와 한양 사이를 오가는 조선사람들에게 위협적 상징이었다. 105인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수용되기 시작해 광복 직전인 1944년 수감자 수가 약 2,89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감옥으로 쓰였다. 1960년대에는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사람이 투옥됐다. 사형집행 반세기 후 무죄 판결을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을 비롯, 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 연루자 8명의 고인도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한 리영희 선생 등 민주인사들이 이곳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2층은 의병,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국권이 위태로웠던 조선 말기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여 독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저항정신을 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애국지사는 수형기록표 기준으로도 5천 명에 이른다. 지하 1층은 일제가 애국지사를 고문했던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 손톱 아래로 뾰쭉한 나무를 찌르는 고문 등 일제의 잔혹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중앙사로 가보니 건물 구성이 특이하다. 3방향으로 부챗살을 펼친 모양을 띠며 모이는 부분이 간수 감시대가 있던 자리다. 한 자리에서 옥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독방 체험과 급한 용무가 생겼을 때 일본 간수에게 알리는 패통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감자들은 잠들기 전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매일 10시간 넘게 노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노역에 관한 전시는 공작사에서 볼 수 있다. 공작사는 수감자를 동원해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일종의 공장이다. 붉은 벽돌에는 京(서울 경)자가 찍혀 있다.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는 중앙사 외벽 사이에 있었다고 하나 옥사에서 외떨어진 곳에 사형장이 있다.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으며 '통곡의 미루나무'가 서 있던 곳이다. 지난해 방문 때까지 멀쩡했던 나무가 무슨 연고인지 밑동이 꺾어진 채 길게 드러누워 있다. 사형수에게 마지막 위안이 되었을 미루나무마저 사형당한 것인가. 참고로 이곳에서의 마지막 사형수는 박정희를 저격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었다고 한다. 사형장을 지나면 일제강점기 때 몰래 시체를 내다 버리던 시구문(屍軀門)이 있다. 약 200m 길이에 이르며 1992년에서야 발견됐다. 수감자 전용 운동장으로 쓰인 부채꼴 모양의 격벽장을 지나 유관순 열사 등이 갇혀있었던 여옥사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서대문 답사기행을 끝냈다. 

 

마지막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919년 서울역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던 강우규 지사의 절명시(絶命詩)는 의연함 속에 깃든 애국정신을 되새기게 했고, 마침 독립·민주지사 56인 풋프린팅 행사 대열에 함께하고 계신,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진실 추구에 있음”을 강조하고 실천하셨던 리영희 선생을 뵈면서는 3월 29일 창립하게 되는 ‘리영희기념사업회’ 일을 오로지 진실정신에 입각해서 해야 하리라는 각오를 다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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