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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탐구 ② 인간 리영희
리영희 11주기 추모행사(11/29~12/4)에 즈음하여
 
신완섭 기자   기사입력  2021/11/22 [08:01]

2010년 12월 5일 리영희 선생이 타계하자, 일제히 언론들이 찬사를 쏟아냈다. ‘사상의 은사’(경향신문), ‘전환시대의 지식인’(중앙일보), ‘실천 지성의 큰 별’(한겨레), ‘지성의 표상’(한국일보), ‘한국 현대 지성사의 큰 별’(서울신문), ‘실천하는 지성’(연합뉴스) 등등, 심지어 일반 시민들도 별도 분향소를 마련해 ‘우리 시대의 스승’으로 그를 기렸다. 그러나 일부 보수 세력들은 여전히 ‘의식화의 원흉’, ‘친북좌빨’, ‘사회주의자’로 그를 매도하고 있다. 그의 진짜 얼굴은 뭘까.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인간 리영희’를 탐구해 보려 한다.

 

그는 평안도 운산 골짜기에서 공무원 아버지와 부잣집 딸 어머니 사이에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대령강에 떠내려가는 소년을 구하려고 거센 물살에 뛰어든 아버지와 일제 말 친정 살림을 거덜냈다며 평생 머슴과 남동생을 미워했던 어머니. 그의 기본 성격은 아버지의 의협심과 어머니의 옹고집을 타고났다. 경성 유학 시절 책상 앞에 써 붙인 ‘소년입지출향관 학야불성사불귀(少年立志出鄕關 學若不成死不歸); 어려서 뜻을 품고 고향을 나왔으니, 학문을 이루지 않고는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 권학문勸學文의 글처럼 공부에만 매진했던 범생이의 삶은 해양대학 시절까지 이어졌다. 한국동란이 벌어진 1950년 12월, 9연대에 배치되어 있을 때 메인 소령과 자신을 대신한 통역장교가 작전회의 참석 중 빨치산 공격을 받아 숨진 사건을 목도하고는 ‘인생만사 새옹지마(人生萬事 塞翁之馬)’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제대를 한 해 앞둔 28살에 이뤄진 윤영자 여사와의 결혼은 해양대 재학 때의 군산 하숙집 아주머니가 중매를 서준 덕분이다. 아주머니는 김장 때나 대소사 때마다 집안일을 열심히 거들어주던 리영희 학생을 좋게 보았겠으나 결혼 생활은 경제적으로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런 아들이 아버지도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1959년 미국 연수 중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장을 잠시 들춰보면, “자식의 성미가 급하고 너그럽지 못하며 말과 행동이 가파르고 곧아서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을 모가 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높이고 오만해서 세상 살아감에 실패가 많겠다. 수양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자식의 행동 하나하나를 살펴보건대 희망은 전무하고 장래를 기하기 어려우니 훗날이 두렵구나. 깨달아 회심함이 전무하니 훈계하고 가르친들 소용이 없다.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 없구나.” 물론 부정(父情)이 담긴 글이라 직설로 받아들이기 곤란할 수도 있으나 이런 우려는 평생 이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푼수 없는 생활에 가정생활은 늘 궁핍했고 사회생활도 어렵기는 매 한 가지였다. 조선일보 재직 당시 박정희 정권으로선 사고뭉치였던 그를 정일권 국무총리가 직접 나서 그를 회유하려고 했다. 조찬 미팅을 제의받자 제기동 미나리꽝 집에서 2시간이나 걸려 곤란하다고 답하니 여태껏 차도 없냐며 의아해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 치고 차 없는 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화로라도 연락하자고 하니 전화 미허가지역이라며 전화마저 없다는 대답에 국비로 당장 전화를 가설해 주었으니 그 번호가 ‘45-2222’였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정부로부터 받아본 유일한 혜택이었다고 너스레를 떠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처럼 그의 삶은 단출 검소해서 평생 대문을 열어놓고 살 정도였다. 한번은 도둑이 들었지만 가져갈 게 하나도 없어 그냥 가 버린 일도 있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사상가와 언론인의 삶을 살았던 그에게도 예순 환갑을 맞으며 심경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1989년 초 한겨레신문 방북취재 기획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됨에 따라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해 12월 2일 회갑연을 치르고 이듬해 초 요양을 떠난 전남 영암에서 한학자 최준기가 이렇게 충고한 것이다. “세상사를 지나치게 선악으로 대치시켜 타협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이상사회를 당대에 실현하려고 한 것이 화근”이라며 “정암 조광조의 길 대신 퇴계 이황의 지혜를 배울 것”을 간곡히 권한 것이다.

 

그가 형처럼 따르며 ‘살아있는 노자’라고 칭송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떠올리며 “나는 이제 공자의 삶에서 노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정치적 행동, 그와 관련한 상황조성 그런 걸 군자의 미덕으로 삼았던 논어적 삶을 떠나려 하는 것이죠. 난 이제 환자이기도 해서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원리를 찾고 그 원리 속에 일체화하는 노력을 하면서 살려고 해요.” 때맞춰 정년을 한 해 앞두고 입주한 경기도 군포의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도 한몫을 했다. 바로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아파트 창문 밖 아름드리 수리산을 매일 산책하며 무위(無爲)와 상선약수(上善若水)의 뜻을 마음속에 새겼기 때문이다.

 

선생이 펜을 내려놓기 시작한 말년의 군포시대에 이르러 그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으며, 그를 비평하던 논객들의 글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선생을 사회주의 친북론자로 매도했던 박병기는 “리영희의 생애를 꿰뚫는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휴머니즘 정신”이라고 했고, 비판적 언론학자인 강준만도 “리영희만큼 투명한 인간 창(窓)은 없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에는 믿기지않을 만큼 무능하고 무책임했으며 아사리판에서 미욱할 정도로 고난을 자초했다”고 했으며, 리영희 연구논집을 펴낸 김만수 역시 “상식을 실천한 개인적 평화주의자”라고 추켜세웠다.

 

나는 작년 선생의 10주기 추모행사를 기획하는 행운을 얻어 구순을 넘기신 배우자 윤영자 여사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올해에도 11주기 행사 기획을 맡아 다시 만나 밀담을 나누다 보니 선생의 사생활도 캐묻게 된다. 선생은 살아 계실 때 가수 정태춘 박은옥 부부와 안치환 등과 친교를 가졌으며,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러야 할 자리에서는 민요 <갑돌이와 갑순이>가 아니면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불렀다고 한다. 민요를 통해 남북한 통일을 염원하고 “진실 하나로 살지요”라는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진실 정신을 고무시킨 것이다. 또한 세간에 알려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행사나 기념관 건립 반대”도 괜한 민폐를 끼칠까 하는 걱정과 염려에서 나온 소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10주기 행사가 선생의 사상·언론관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 11주기 행사에는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다소나마 노출시키고자 한다. 이번 행사(11/29~12/4 수리산상상마을)에 참여하여 우리가 몰랐던 선생의 인간미를 통해 이기주의와 경쟁지상주의가 판치는 세태를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길 빌어본다.

 

▲   리영희 선생 11주기 추모전 포스터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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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22 [08:01]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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