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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탐구 ① 사상가
리영희 11주기 추모행사(11/29~12/4)에 즈음하여
 
신완섭 기자   기사입력  2021/11/16 [07:52]

1980년 프랑스 <르 몽드>지가 ‘사상의 은사’로 극찬했던 故 리영희 선생은 1929년 12월 2일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나 2010년 12월 5일 새벽 서울 녹색병원 병상에서 돌아가셨다. 81년간의 생애 동안 일제 강압기, 해방 혼란기, 한국동란, 남북분단의 비극 등 우상들이 득실거리는 시대를 살아내면서 단 한 번도 이성의 펜을 놓지 않았던 언론인이자 사상가였다. 

 

9번의 연행과 5번의 구속, 장장 1,012일간의 수감생활 중에도 진실을 벗어나거나 사리사욕에 빠지거나 권력에 타협하려 한 흔적이 단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다 간 모범적 전형을 보여준 그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직하게 만들었을까. 2005년 광주MBC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억압과 폭력, 거짓에 대한 본능적 증오”를 스스로 언급했고, 인간 번뇌의 삼독(三毒)으로 불리는 탐진치(貪瞋癡) 중 진에(瞋恚=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간경화에 시달리다 죽게 될 운명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사상성의 밑바탕이 된 ‘불의에 대한 본능적 증오와 분노’는 언제 어디서 싹튼 것일까. 그의 대담집 <대화>와 <리영희평전(김삼웅 저)>, <진실에 복무하다(권태선 저)> 등을 읽고 내린 결론은, 1948년 해양대 3학년 시절 해상실습차 탑승했던 천안호의 중국 상하이행이 국공내전으로 불발되고 곧이어 여수항에서 보게 된 진압군과 반란군의 교전, 여수여중·고교 운동장에 즐비했던 무고한 주검과 맞닥뜨리며 국내외 정세와 민족의식을 싹틔웠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범생이로 살아온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고, 이후 한국동란 발발과 함께 통역장교로 7년간 군 생활을 하며 이승만 정부와 군대의 부패, 전쟁의 참상, 불공정한 한미관계를 직접 목격한 후, 29세 때 합동통신사 입사로 시작된 언론계 생활에서 그의 본능은 무한정으로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거짓을 거부하는 본능’은 우상이 창궐하는 언론계에서 그를 이성과 진실 숭배자로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기사를 미국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지에 꾸준히 기고했으며, 4.19의거 때는 직접 메가폰을 잡고 군중 속에서 비무장 투쟁을 외치고,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 케네디와 정상회담을 가질 때도 수행 기자로서 ‘민정 이양 조건부 경제원조’의 실상을 알렸으며,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보도기사로 반공법 위반 첫 구속의 고통을 맛보게 되지만 그의 멘탈은 더욱 강건해졌다.

 

이런 일들로 인해 1971년 ‘64인 지식인 성명’ 참가를 계기로 합동통신에서 강제 해직된 후 기자 생활을 접고, 이듬해 한양대 신문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어 강단에 서게 된다. 이때 대학 부설 중국문제연구소 소장을 겸직하며 중국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실상을 파헤치는 연구에 몰두,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금과옥조와도 같은 사상서를 발간한다. 책 머리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로 둘러대었지만, 국내외 정세의 진상을 파악하게 하는 시금석 같은 역할로 지식인 사회의 몽매를 일깨웠다. 이어서 출간한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두 권의 필화사건으로 인해 두 번째 반공법 위반죄로 구속 수감되고, 안기부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조종자로 그를 옭아매려 했으나 진실과 이성에 기반한 그의 꼬장꼬장한 필력은 잘 담금질 된 칼날처럼 대중을 감화시킬 뿐이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그의 저서 <우상과 이성> 머리말에 남긴 말이다. 리영희는 훗날 <역설의 변증>에서 “몽매한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려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가르친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 보자’는 친절함이 바탕이어야 한다. 이것이 루쉰이다.”며 중국인의 의식을 일깨운 루쉰적 교화를 사상 전달의 기초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말과 글은 명료하고 단호했다. 

 

이후 자신이 대적하고 처단해야 할 우상이 점차 사라지자 그는 스스로 절필을 선언한다. 대담집 <대화>를 펴낸 그 이듬해인 2006년의 일이다. 이때 이미 그의 나이 78세였으며 투옥 후유증과 간경화 악화로 기력이 극히 쇠잔해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펜을 든 것은 언론매체가 아니었다. 죽기 한 해 전인 2009년 이명박 정권이 민주정부 인사였던 KBS 정연주 사장을 강제 해임시키려 하자, “민주주의 제도의 책임 있는 공인이 자신의 권리와 직무와 직책을 정정당당히 수행하는 자세를 끝까지 보여주시오...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라고 떨리는 손으로 손 편지를 써 보낸 것이 마지막이었다.

 

말년 16년을 군포에서 보내면서 지역 언론 <군포시민신문(1995)>과 시민단체 <군포환경자치시민회(1997)>를 발족시키는 데 앞장섰고, 2006년 노구를 이끌고 ‘강제연행 홋카이도 조선인 유해 송환 운동’차 세 차례나 일본을 드나들었던 리영희 선생에게 일찍이 한학자 최준기는 “리 선생의 붓이 너무 곧다.”며 “사화에 좌초된 정암 조광조의 길 대신 퇴계 이황의 길을 가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몇 해 만에 그는 퇴계 이황의 길을 채 걷기도 전에 정암의 길을 버리고 영원한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의 고교 후배이기도 한 명진 스님은 49재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때까지 눈감지 마시라”고 그를 다시 소환한다. 거짓과 위선, 특히 기레기 언론이 판치는 작금에 리영희 선생이 문득 그리워지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2021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 11주기 추모전 포스터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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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16 [07:52]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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