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철 독후감]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9세기 말 조선과 서울 어떤 모습이었는가?

심규철 변호사 | 기사입력 2021/10/23 [10:24]

[심규철 독후감]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19세기 말 조선과 서울 어떤 모습이었는가?

심규철 변호사 | 입력 : 2021/10/23 [10:24]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여자 여행가로서 조선이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던 1894년에 조선에 와서 동학혁명과 이로 인해 발발한 청일전쟁의 상황을 직접 목격하였고, 고종도 여러 번 만났으며, 명성황후 민씨도 살아 생전에 고종과 함께 경복궁에서 만난 적이 있는 등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당시의 조선을 가까이서 비교적 자세히 보고 이에 관한 글을 남긴 사람이다.

 

1984년에서 1897년에 이르기까지 총 4회에 걸쳐 11개월 정도의 기간 조선에 머물고 여행하면서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관계 등 전반에 걸쳐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녀는 1898년에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그 이웃 나라들이라 함은 비숍이 조선을 여행하는 틈틈이 일본과 러시아 ·만주 등을 여행하면서 이들 나라와 조선과의 관계 및 러시아· 만주 등에 흩어져 사는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을 함께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붙인 제목으로 보인다.

 

그녀는 청일전쟁의 화약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있던 무렵에 부산항을 거쳐 제물포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와 서울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고, 그 얼마 후에 그녀는 35일 가량에 걸쳐 직접 노 젓는 사공과 3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작은 거룻배를 타고서 남한강을 거슬러 단양까지 올라가면서 조선의 구석구석을 살폈고, 다시 내려와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육로로 금강산을 거쳐 원산까지 가서 당시 제물포 조약에 따라 개항되어 있던 원산에서의 조선인의 삶과 그곳에 진출해 있던 일본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원산항의 모습을  목격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해주 일대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조선인의 삶의 모습을 보고 오기도 했고, 그 후 개성과 평양 및 그 일대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오고 나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만나기도 하고, 일제가 주도하는 소위 갑오개혁의 모습과 단발령 등의 조치도 목격한다. 명성황후 시해의 상황과 그 후1896.초에 일어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모습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고, 서재필에 의한 독립신문 발행의 모습과 그 의미 독립협회의 활동에 대하여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숍여사의 생애와 그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 대한 대략의 내용은 인터넷에서도 자세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비숍이 그 책에서 언급한 내용 중에서 주목하고 싶은 몇 가지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비숍 여사의 위 책을 읽어가면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첫 번째 문장은 “나는 조선의 펑민들이 게을러서 가난한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평민들이 돈을 벌었거나 진귀한 물건을 갖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면 관리나 양반들이 그냥 두지 않고 기어코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조선의 평민들은 애써 노동해서 소득을 올려도 결국 빼앗기게 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모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대목도 나온다. “조선이 일본보다 못 살 이유가 없다. 토양의 비옥도는 양국이 비슷하지만, 조선은 일본에 비해 홍수가 적고 지진이 없다. 수탈하는 양반과 관리가 문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비숍 여사는 연해주로 이주해 살고 있던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러 연해주를 가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비숍여사가 본 그곳의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은 조선 내에서의 조선인들보다는 훨씬 윤택하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에는 조선인들을 수탈하는 양반과 관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비숍은 내린다.

 

책의 곳곳에서 비숍은 당시 조선의 부패상에 절망하면서 양반들을 평민들을 수탈하는 흡혈귀로 묘사하고, 평민들의 고단한 삶을 연민과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비숍은 연해주를 다녀오면서 귀로에 잠시 원산을 다시 들르게 되는데,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노동의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게 된 조선 사람들이 부자가 되어 있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명성황후에 대하여는 지적이고 우아한 여성이라고 하고 있는데, 자신이 조선을 잠시 떠나 있던 시기에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시해사건으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안타까워하는 장면도 나오고, 그 이후 고종과 황태자인 후의 순종이 손을 꼭 잡고 일제에 대해 두려움에 떨며 지내는 모습도 묘사하고 있고, 아관파천 후에 고종이 소위 갑오개혁을 원 위치시키고,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움직임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비숍은 고종에 대하여 그 인자한 성품과 자신에 대한 친절한 대우에 점수를 주고 고마워하면서도 고종이 왕으로서 당시 조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평을 하고 있다.

 

비숍은 당시 조선의 무속신앙에 대하여도 소상히 소개하고 있는데, “조선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특별한 종교가 없다. 길거리에는 어느 나라에나 그 나라를 대표하는 종교의 신전이나 사당이 있는데 조선에는 그런 것이 없다. 대신 무속이 굉장히 성행하고 있고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평을 하고 있다. 

 

비숍은 1896년 가을에 마지막으로 서울에 와서 1897년 초에 서울을 떠나는데, 비숍이 1896년 가을에 와서 본 서울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비숍이 1984년 처음으로 조선과 서울에 와서 본 거리의 모습은 지저분하고 불결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책의 곳곳에서 비숍은 조선인들의 불결한 삶과 경향 각처 조선 곳곳의 지저분한 모습을 많이 그리고 있다), 1896년 가을에 와서 본 서울의 모습은 자신이 1894년에 처음 본 서울과 달리 너무 깔끔해져서 자신이 1894년에 찍은 서울의 모습(특히 남대문과 서대문 일대)사진은 사용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서울은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불결한 수도에서 가장 깔끔한 수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공을 당시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1861-1900))에게 돌리고 있다. 비숍은 이채연에 대하여 매우 정력적이고 능력있고 개명된 시장이라고 소개하면서 워싱턴DC의 시정을 돌아본 경험이 있는 그의 서울시장으로서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이채연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비솝여사의 소개로 인해 호기심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채연은 당시 제중원(濟衆院)을 이끌고 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의 밑에서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던 중, 1887년에 조선이 최초로 주미공사를 파견하는데 알렌이 외국인 참찬관으로 가게 된 기회에 주미공사관의 번역관으로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일행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이완용에 이어 대리공사까지 지내고 1893년에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김홍집 내각에서 농상공부 협판(차관)까지 지내고,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박정양 내각에서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서울 개조의 책임을 맡아 이를 나름대로 잘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이채연은 미국에서 본 워싱턴DC의 모습을 모델로 하여(워싱턴이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 모습)고종이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집무를 보고 있던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6거리를 조성(현재 서울시청 앞 도로의 모습이 그 때 생긴 것임)하면서 남대문 일대의 도로를 넓히고, 서대문 일대의 지저분한 거리를 정비함과 아울러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고, 서울에 전철을 가설하고(서울 최초의 전철은 비숍이 서울을 떠난 후인 1899년에 서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이 개통되었는데, 이는 도쿄보다도 3년 빠른 것이라 함)서울 거리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서울을 개조하는데 박차를 가했는데, 당시 고종은 러시아를 중시하면서도 미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미국을 잘 아는 박정양과 이채연,이완용 등을 중용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을 개혁해 나가고자 했던 것 같다. 미국인 콜브란과 함께 이채연이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여 동 회사의 사장을 겸임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비숍은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의 운명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을 떠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조선을 떠났다.

 

노동에 의하여 획득한 재산권의 보장과 정치인 및 관료의 청렴성이 국민을 잘 살게 하는 필요조건임을 강조했던 비숍의 견해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타당한 명제라고 생각한다. 조선은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 고종과 일부 엘리트들이 마지막에 이런 저런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은 대장동 사태에서 보듯 여전히 부패하고, 국민의 재산권 보장에 대한 철학은 빈곤하며, 잘못된 부동산 정책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집을 마련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갖고 사는 현실이 120여 년 전 이 땅의 평민들이 양반과 관료의 수탈 속에서 소망 없는 삶을 살던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마음을 무겁게 한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책 표지  © 군포시민신문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
광고
사진기사
메인사진
이학영 국회부의장실 등 생애 첫 국회 견학에 나선 군포 학생들
1/4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