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22일 오전 9시 반, 청계광장에 집결한 9명의 청계천 투어 팀, 매달 한 번 역사기행을 다니는 참자연교사회(회장 김현복) 행사에 함께했다.
아침부터 광장에 높게 세워진 조형물 ‘Spring(샘)’에 대한 갑론을박 논쟁이 뜨거웠다. “다슬기 모양이 뭘 나타내지, 너무 생소해” “그래도 아이들은 너무 좋아해요”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스웨덴 출신의 미국 팝아트 미술가 클래스 올덴버그와 그의 부인 쿠제 반 브르겐이 공동 디자인한 것으로 샘솟는 모양과 전통한복의 옷고름에서 본 떠 블루와 레드 칼라로 표현했다는데, 글쎄 내가 보기에도 우리 정서와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기왕이면 국내 작가 작품으로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서운함을 남기고 천변으로 내려갔다.
풍수지리적으로 청계천 물줄기는 서출동류(西出東流) 하는 도읍지 한양의 명당수이자 개천(開川; 인공하천)이었다. 북악 인왕 남산 낙산 등 내사산(內四山)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안 중심부를 관통하여 중랑천, 한강으로 흘러드는 젖줄이었던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5/19)이 막 지난 시점이라 청계폭포 아래로 설치되었던 연꽃 코끼리 동자승 등 연등을 제거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오늘 둘러 볼 조선 시대 청계천 본류의 9개 다리는 상류에서 하류의 순서대로 모전교(毛廛橋)-광통교(廣通橋)-장통교(長通橋)-수표교(水標橋)-하랑교(河浪橋)-효경교(孝經橋)-마전교(馬廛橋)-오간수문(五間水門)-영도교(永渡橋)이다.
① 모전교 : 각종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 부근에 있었으므로 모전교라고 하였다. 청계천 지류에 놓인 다리 이름도 모교(毛橋)여서 인근 동 이름은 무(武) 자를 써서 ‘무교동(武橋洞)’이라 구분 지어 불렀다. 이날의 해설사 나각순 박사(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의 설명을 빌면, “이곳 시전으로 서쪽 지역인 마포나루 장사꾼과 동쪽 지역인 마장동 장사치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오는 사이 마포 장사꾼은 이마가, 마장 장사치는 뒷덜미가 새까맣게 그을려서 이마와 뒷목만 보고서도 금방 식별했다” 한다.
② 광통교 :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雲從街)-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이 위치하여 도성에서 가장 붐볐던 다리였다. 태종 12년(1412년) 청계천 최초의 돌다리로 지금의 광교(을지로입구역-종각역 사이) 자리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때 광폭의 다리로 신축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이 다리는 조선왕조의 첫 왕비이자 태종의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에 얽힌 일화가 전해온다. 두 번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세자로 책봉된 막내 이복동생 방석을 살해한 태종 이방원이 정권을 거머쥐자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409년, 1396년 홧병으로 세상을 뜬 강씨의 정릉(貞陵)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리고 그곳에 있던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한 12매의 병풍석을 비롯한 석물을 다리를 놓는데 사용한 것이다. 대홍수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제방과 석교를 세웠지만, 일부 병풍석을 거꾸로 배치하여 처절한 정치적 보복의 뒤끝을 엿보게 한다.
③ 장통교 : 조선 시대 5부 52방의 한 곳인 장통방(長通坊)에 있었으므로 장통교라고 하였다. 서쪽 기둥에 새겨진 ‘辛未改造, 己亥改造’로 보아 두 차례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여 년 전 내가 근무했던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발길을 운현궁 전시장으로 돌려 문인화가들의 부채전(5/18~5/28)을 감상했다. 역사기행의 양념으로 문화기행을 깃들이자고 내가 제안한 것인데, 다들 좋아한다. 이날 당번으로 나와계신 서예가 신재 선생과 양송이 선생이 자신들의 작품을 직접 소개해 주어 감상의 맛을 살려 주었다. 이렇게 문화예술 감상은 역사기행에 재미를 더해주고 기행의 깊이도 더해준다. 다시 청계천으로 발길을 돌리던 시각이 정오쯤이어서 낙원동 송해거리 한정식집에서 영양밥에 막걸리 한잔을 곁들였다. 포만감과 취기가 오르면서 발걸음도 덩달아 느려진다. 아무렴 어떠랴. 아직도 해가 중천인데...
④ 수표교 :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을 대표하는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21.5cm 간격을 매긴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인근 신영동으로 잠시 이전되었다가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다리에도 재미난 일화들이 전해온다. 숙종이 수표교 건너 왕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에 참배하러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수표교 근처 여염집에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색시에 마음이 홀려 그녀를 궁으로 들라 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장희빈이다. 야인 김두한이 어려서 거지 생활을 했던 곳도 바로 수표교 다리 아래였다.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수표교 자리에는 현재 나무다리가 임시방편인 양 놓여 있다. 복원 계획상 장충단공원에 있는 원래의 수표교를 이전해 올 계획이었으나 다리의 길이가 현재 청계천의 강폭보다 길고 이전 시 훼손이 우려되어 망설이다 보니 지금껏 임시다리가 대신하고 있어서다.
⑤ 하랑교 : 부근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하랑교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되었다. 현재 청계 3가 센추럴 호텔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⑥ 효경교 :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불렀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에 있었다.
⑦ 마전교 : 다리 부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청계 5가 사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복개와 복원을 거듭한 청계천의 부침 속에 개천을 이어준 것은 다리였다. 장통교와 수표교 사이에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신호탄 격인 삼일교가 놓이고 오간수문에 이르기까지 청계천 양쪽을 연결하는 관수교(을지로3가역-종로3가역 사이), 세운교, 배오개다리(을지로4가역), 새벽다리, 나래교, 버들다리 등이 차례차례 촘촘히 놓였다. 다리로 인해 경제는 날로 발전하였으나 성장통으로 인한 노동자의 희생도 컸다.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다리로 불리는 일명 ‘전태일다리’에는 평화시장 미싱장이로 일하다 22살 젊은 나이에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넋이 어려있다. 그에게 바친 헌시 <인간해방의 불꽃>은 이렇게 노래한다. “고난을 이겨낸 꿈과 희망/ 생명까지 바친 무한한 사랑/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인간해방의 불꽃이 되었으니/ 전태일의 위대한 부활이어라...” 인류 역사는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자라왔다.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산 자들이 더욱 헌신하고 노력해야 하리라.
⑧ 오간수문 : 동대문 앞에 자리한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水門)으로 이것이 다섯 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하였다. 성벽을 지키거나 수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의 기능을 병행하도록 설계되었다. 1908년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다리가 놓여졌으며, 이때부터 오간수교(五間水橋)라고 불렀다. 이곳은 사대문을 벗어나는 청계천 경계지역으로 성벽과 다리의 기능을 겸한 데 의의가 있으며, 2008년 철거된 인근의 동대문운동장(현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발굴과정 중에 운동장을 만든다며 땅밑으로 묻어버린 이간수문(二間水門)과 광희문까지 이어지는 성곽길 흔적이 발견되어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이곳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은 도성 안으로 잠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어서 조선 명종 때의 농민 무력운동가 임꺽정이 도성 내 전옥서(典獄署)에 갇히자 부하들이 그를 구출하려고 이 수문의 목책을 뚫고 들어오려 했다고 한다. 한편 의문의 시체들이 이곳을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해 사회적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도합 7칸을 통틀어 교감하던 곳이어서인지 이 일대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청계천 본류 기행은 여기에서 끝냈으나 단종 귀양의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영도교를 소개하며 기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⑨ 영도교 : 조선 성종 때 안암동 영도사(永導寺)의 승려들이 놓았다고 전해지며, 흥인지문 밖에 있는 동묘(東廟)와 왕십리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이 다리에는 단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갈 때 단종비 정순왕후가 낙산 아래 정업원에서 이 다리까지 배웅 나왔는데 이날부터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영영건넌다리 라고 불렀다. 고종 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사용하면서 나무나리로 바뀌었다. 이후 장마 때마다 유실되곤 하여 띄엄띄엄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라는 명칭이 붙기도 하였다. 1933년 콘크리트로 교체공사를 할 때 교각 하부 구중(溝中)에서 관음보살목각좌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영도교가 가설되었다. 원래 자리는 성동기계공고 옆 영미교길 부근에 있었다.
한때 청계천 복개 위로 놓였던 삼일고가도로는 경제발전의 상징물이었다. 과거의 못난 역사를 덮은 자리 위에 우뚝 길게 솟아 있었으니 아픔 대신 영광의 냄새만 피어났다. 그러나 고가도로 건설의 이면에는 미군들의 휴양과 오락을 위해 지어진 워커힐 호텔까지 편안하고 빨리 갈 수 있는 하이웨이가 주목적이었다는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 오늘 우리는 고가도로도 허물고 가려져 있던 청계천 복개 흔적을 낱낱이 뜯어낸 물길을 따라 장시간 역사 공부를 하였다. 되살린 물길의 발원 샘물을 잇지 못했고 일부 현장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다. 그래, 로마가 하루아침에 세워질 리가 있겠는가. 우리 손에 못한 일일지라도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후대에서까지 이어져서라도 반드시 이뤄내야 하리라. 마침 주말까지 미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고 있어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은 한낱 정치적 미사여구가 아니다. 세종대왕이 명당수의 구실을 내치고 생활하수로서 대대적인 청계천 치수사업을 벌인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이자 주권의 실체를 인정한 주권재민의 실천이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한국의 생산기술과 미국의 기술개발력을 결합한, 전 세계인을 위한 백신주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조금만 머리를 맞대면 전 인류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영조 36년(1760) 2월에서 4월까지 57일간 펼쳐진 ‘청계천 준천(濬川)’ 사업을 소개하며 청계천 이야기를 끝맺고자 한다. 나 박사님이 출발 때 나눠줬던 어전준첩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 유인물에는 동대문 바로 앞에 임금이 지켜보는 천막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 오간수문 밑으로 공사를 벌이는 인부들의 모습이 부산하다. 임진왜란 이후 황폐해진 산림으로 인해 홍수 때마다 청계천이 물난리에 시달렸다. 이 일대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기 위해 개천을 치자는 여론을 조성한 뒤 돈 35,000냥과 쌀 2,300석의 경비를 마련하고 한성부 5부의 주민 15만 명과 인부 5만 명을 동원한 대역사를 이뤄냈다. 이 일로 해서 청계천 준천사업은 탕평책, 균역법 실시와 함께 영조의 3대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공사를 끝내자마자 준천사(濬川司)를 두어 청계천을 관리하게 했으며 왕세손(정조)을 광통교에 데리고 나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게 되는 법이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뜻을 세워 힘쓸지어다.”라며 제왕학(帝王學)을 일깨워 주었다. 청계천 역사기행을 통해 ‘유지경성(有志竟成)’의 교훈을 익히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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