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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 나룻길을 걷다
 
신완섭 기자   기사입력  2021/01/19 [15:15]

2021년 1월 셋째 주일 강서 답사에 나섰다. 여기서 강서(江西)는 서울시 강서구를 말한다. 한강의 주요 나루터였던 노량진, 양화진, 행주나루말고도 하구에 속한 이곳에도 공암(孔巖)나루와 양천(陽川)나루가 있었다. 공암, 즉 ‘구멍바위’는 신라 때부터 불려진 명칭으로 이전 고구려 때에는 ‘齋次波衣(재차파의)’라 불렸다. 재차는 ‘갯가’, 파의는 ‘바위’를 뜻했으니 ‘갯가바위’였다. 양천은 지대가 낮아 햇볕이 많이 들던 조선 시대 때까지의 마을 이름이다. 선사시대 때부터 조개를 채취하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음 직한 이곳을 둘러보았다.

 

허준의 발자취

 

1. 허준박물관

 9호선 가양역 1번출구 (사진=심완섭)    © 군포시민신문

 

9호선 가양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의성(醫聖)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9~1615)이 반긴다. ‘허준테마거리시작점’ 안내판과 함께 형형색색의 허준 캐릭터 인형이 수십 개 도열하여 손님을 반기니 여기가 허준의 동네임을 실감케 한다. 인형마다 ‘사람의 몸은 한 나라와 같다’, ‘신맛은 간에 좋다’, ‘行補>食補(운동이 식사보다 낫다)’는 허준의 건강지침이 담겨 있다. 속된 말로 이곳이 허준의 나와바리(なわばり;縄張り)임을 인정하며 한강변 쪽으로 10여 분 더 걸어가니 ‘허준박물관’이 나온다.

 

바로 옆에 <한의사협회>가 자리할 만큼 허준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그런데 코로나 거리 두기 준칙 탓인지 박물관은 휴관이다. 하는 수 없이 인터넷으로 ‘허준’을 검색해 본다. 허준은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현 서울 강서 등촌2동 능안마을) 명문가 허론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정실이 아닌 영광 김씨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의관의 길을 택하게 된다. 1569년(선조2)에 미암 유희춘의 추천으로 내의원에 들어가 1590년 왕세자 광해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어의로써 잘 보필하여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고, 1596년에는 광해군의 난치병을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제수되었다.

 

광해의 병을 고친 그해에 선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수의(首醫)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적을 편찬하도록 왕명을 내린다. 왕명을 내린 배경에는 임란 중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가 깊이 작용했다. 장계 『請罪闕防諸將狀(임금께 청하는 여러 장수의 죄에 관한 처벌)』의 내용은 이러했다. “올해 1594년 1월에 처음으로 진(陣)에 전염병이 사납게 번져 병으로 누운 사람이 즐비합니다. 온갖 치료를 했으나 죽은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1~4월 간 삼도(경상 충청 전라)의 사망자 수는 1,904명이고 앓아누운 자는 3,759명입니다. 죄 없는 군사와 백성이 죽어 나가기에 수군의 사부와 격군이 날마다 줄어 답답하고 염려됩니다” 장군의 기록에 따르면 휘하 군사 10%가 사망했고 20%가 병들어 누웠던 것이다.

 

왕명을 받은 허준은 이때부터 양예수 이명원 김응탁 정예남 4명의 동료 의관들과 민간의 명의로 소문난 유의 정작 등까지 기용하여 집필에 몰두한다. 선조는 이때 500여 권의 의서 자료집을 내주고 “중국의 의서는 모두 용렬하고 자잘하여 읽어볼 만하지 않으니, 마땅히 분류하고 우리말 약명을 함께 써서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한다. 이로부터 14년 뒤인 1610년(광해2) 25권 25책으로 완성, 1613년에 출간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어의로서 책임을 져 가게 된 의주 유배 기간 내내 혼자 마무리를 하였으니 결국 공동저술이 아닌 개인 저술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의 문제 제기와 선조의 문제 인식과 허준의 집념이 만들어낸 역작이 바로 『동의보감(東醫寶鑑)』인 것이다.

 

   해져 생기는 병은 미혹에서 나온다.

   거할 의서 없음을 나랏님이 통탄하매

   의(東醫)를 써 내려간 지 14년 만에 빛을 보다.

 

   술은 인술이요, 명약은 정성이다.

   약 한 첩, 침 한 방도 허투루 말지니

   고(甘苦)의 희로애락을 마음으로 다스리라

 

2. 허가(許家)바위

 

박물관 구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근처 탑산 아래의 ‘허가바위’로 걸음을 옮겼다. 인근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 있으며, 바위 아래에 천연동굴이 있다. 굴의 크기는 가로 약 6m, 세로 약 2m, 높이 약 5m로,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공암(孔岩)바위’라고도 한다.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에 따라 양천 허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인데, 《경기읍지(京畿邑誌)》에 따르면 허선문은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인 공암촌(孔岩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고려의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지나가면서 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미를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가 되었다.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북병사 허종(許琮) 외에 고려후기의 문신 허옹(許邕), 조선전기의 문신 허침(許琛), 명의 허준(許浚) 등 많은 인물이 이 바위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특히 허준은 이곳에서 『동의보감』의 상당 부분을 집필하기도 했다.

 

3. 허준근린공원

  허준 동상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박물관 바로 뒤편에 ‘허준(구암)근린공원’이 세워져 있다. 환자를 돌보는 허준 동상과 인공연못 속의 ‘광주(廣州)바위’가 주요 볼거리인데, 동상 옆 석문(石文)에 새겨진 “옛날 뛰어난 의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의원은 사람의 병만 다스리고 마음은 다스릴 줄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으며 원천(源泉)을 캐내지 않고 지류(支流)만 찾는 것이니 병이 낫기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라는 허준의 어록이 인상 깊고,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온 바위의 소산(所産)으로 광주에서 매번 싸리비 몇 자루씩을 받아가자 이 바위가 양천에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로 공물 요구가 없어졌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설화 속의 공암나루 터 갯바위를 한강 개발 과정에 이곳으로 원형 그대로 옮겨와 잘 존치하고 있음도 실로 대견하다. 인간치유뿐만 아니라 자연보존까지 공원화시켰으니 보감(寶鑑)의 의미가 더욱 깊지 않을 수가 없다.

 

투금탄(投金灘) 이야기

  투금탄 이야기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허가바위 바로 옆에 만화로 그려진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내용을 읽어보니 “젊은 두 형제가 양천나루터로 가기 전 우연히 금덩이를 주워 사이좋게 나눠 가졌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던 중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물에 던졌다. 형이 이유를 묻자 재물욕 때문에 형제의 우애를 해칠까 봐 그랬다고 하자, 형도 자신의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여울을 ‘투금탄’이라 불렀다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고려말의 이조년과 이억년 형제라고 한다. 먼저 금덩이를 던진 동생 이조년(1269~1343)은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更인 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 양 하야 잠못드러 하노라(배꽃에 달이 밝고 은하수가 자정에 기울 때/ 나뭇가지 봄의 정취를 두견이가 알까마는/ 정 많음도 병인지 잠 못 들어 하노라)” 일명 <多情歌(다정가)>라는 유명한 시조를 남겼고, 형 이억년(1266~?)은 함양 낙향 당시 원나라가 국정에 간섭하자 항의하는 뜻으로 한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千載紅塵夢外事 靑山何處獨掩扉(생각지도 않은 10년의 벼슬살이, 청산 어디쯤에서 홀로 머물까)”. 세 살 터울의 이들이 이름처럼 2조년, 2억년 살았을지 궁금하여 생몰을 따져보니 동생은 74세로 장수하였으나 형은 사망년도가 밝혀져 있지 않다. 동생 조년이 74세이니 형 억년이 더 오래 살지는 못했을 거라 억지 추정해 볼 뿐이다.

 

내용을 다 읽는 순간, 횡재를 뿌리칠 요량이면 뱃사공에게나 선심 쓸 일이지 강물에 던질 게 뭐람, 형제의 우애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공짜 재물로 또 다른 액운이 전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된 망상은 접고서 시 한 수 흘리며 가양구름다리를 건너 한강공원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명한 강물이 흐려질까 두렵구나,

   괴가 넘칠수록 뱃길은 느려지고

    사공 심란한 마음 천근만근 무거워져. 

 

궁산공원둘레길

 

1. 궁산(宮山; 해발 약 75m)

 

얼음판이 둥둥 떠 있는 한강 수변을 따라 하구 쪽으로 15분 정도 걸었을까. 올림픽도로 바로 뒤로 깎아지른 듯 궁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굴다리로 들어서니 겸재 정선의 그림 벽화가 나를 반긴다. 굴다리를 빠져나오니 바로 오른편에 ‘궁산공원둘레길’ 안내문과 약도가 세워져 있다. 삼국시대 때는 부근의 지명에서 따와 파산(巴山)이라고 불렀고 산성이 있어 성산(城山)이라고도 했다. 궁산이라는 명칭은 산자락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양천향교가 있어 이곳을 궁(宮)으로 여겨서다. 임진왜란 때는 궁산 산성에 관군과 의병이 진을 치고 한강 너머 행주산성에 주둔하는 권율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궁산은 이처럼 조선의 도성을 방비하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한국전쟁 때도 군부대가 주둔하였다. 궁산은 서쪽의 개화산, 오른쪽의 탑산, 쥐산 등과 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었기에 선비들이 뱃놀이의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였다.

 

2. 소악루(小岳樓)

 소악루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곧바로 산 정상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산 높이는 낮아도 데크 계단이 제법 가파르다. 10여 분 쉬지 않고 오르니 정상 바로 아래 소악루가 눈에 들어온다. 1737년(영조 13) 동복현감을 지낸 이유(李楡, 1675~1757)가 경관과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자신의 집 부근 옛 악양루 터에 지었던 누각이다. ‘소악루’란 중국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 경치와 버금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등이 이곳에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당초 가양동 세숫대바위 근처에 세웠던 원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4년 5월 강서구청에서 한강변 경관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로서 화강석 8각 주춧돌에 민흘림 원기둥을 세운 겹처마 구조이다.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이며, 주위에는 조망하기 좋도록 난간을 둘러놓았다. 애석하게도 난관 둘레에 출입금지 막을 쳐 두어 누각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나 바깥에서 보아도 가까이는 한강 너머 행주산성의 덕양산과 난지한강공원, 대덕산, 멀리는 인왕산, 남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 양천 고성지(古城址)

 

몇 걸음을 더 걸어 산 정상에 오르다 보니 ‘양천 고성지’ 안내 팻말이 나온다. 1992년 3월 10일 사적 제372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 2만 9370㎡, 석축둘레 762척(약 218m)의 소성(小城)이다. 조선 시대 양천현 읍치(고을)의 진산(鎭山)인 궁산 정상을 중심으로 축성된 퇴뫼식(= 산 정상을 둘러쌓음) 산성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정상부가 평탄하게 깎여 있는 것을 제외하고 북측 급경사 지역을 포함한 전 지역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으로도 그 존재가 확인되며, 성터임을 확인해 주는 적심석(積心石)과 석재가 남아 있다. 한강변의 들판에 우뚝 솟아 서북 대안(對岸)의 행주산성(幸州山城) 및 파주 오두산성(烏頭山城)과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한강 하구를 지키던 요새의 하나로, 옛 관방시설(關防施設) 및 읍치구조(邑治構造)의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회(小會)나 즐겨볼까, 강가의 버들가지 

   천후 속에서도 꽃망울 터트리고

   누각에 비치는 볕이 언 손을 녹이는데

 

   금을 막론하고 근심은 끝없어도

   미는 주저 없이 떠내려 보내야 하리

   난날 꿈꿨던 역류, 장마비에 쓸렸듯이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쳐다보다가 지난 역사의 현장 현장에서 답답한 현실을 감내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을 옛 선인들을 떠올리며 ‘소악루, 고성지’로 운을 띄워 한 수 남긴다.

 

4. 양천향교(陽川鄕校)

양천 향교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탁 트인 한강을 한참 구경하다가 둘레길을 따라 겸재정선미술관 방향으로 하산하다 보니 왼편 산 아래 자락에 ‘양천향교’ 건물이 있다. 1990년 6월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8호로 복원된 양천향교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만들어졌으며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이다. 이름 때문에 양천구에 있을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조선 시대 때 경기도 양천현이던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하며 인근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역시 당시의 이름을 따서 제정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의 안쪽에는 공자 외에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향교 문은 굳게 닫혀있고 수문장처럼 고양이 한 마리가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조용히 자릴 떠 겸재정선미술관으로 향했다.

 

5. 겸재 정선(謙齋 鄭敾)미술관

 겸재 정선박물관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산 아래 도로로 5분여 걸어가면 산자락에 ‘궁산 땅굴역사전시관’ 간판이 나오고 바로 길 건너에 미술관이 있다. 진경산수화 풍을 완성한 겸재 정선(1676~1759)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고 진경 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2009년 4월 서울시 강서구에 개관된 기념미술관이다. 1740년부터 1745년까지 5년간 양천(현 강서구) 현령으로 있으면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등의 화첩을 남겼던 인연으로, 정선이 근무하던 양천 현아(懸衙=지금의 도청) 자리에 미술관을 건립한 것이다.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이고 주요 시설로는 2층의 겸재기념실, 진경문화체험실과 1층의 양천현아실, 기획전시실이 있다. 현재 300여 점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주요 소장품으로는 정선의 《청하성읍도(淸河城邑圖)》, 《피금정도(披襟亭圖)》, 《조어도(釣魚圖)》, 《귀거래도(歸去來圖)》, 《청풍계도(淸風溪圖)》와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의 《단발령망금강산도(斷髮嶺望金剛山圖)》 등이 있다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곳 역시 휴관이어서 헛물만 키고 돌아서며 아쉬운 마음을 ‘조어도’로 운을 띄워 한 수 남긴다. 

 

   금 추울 뿐인데 입질을 않는구나.

   스름 해 기울고 빈 망태기 가볍건만

   무지 무거운 발길 떼지를 못하겠네

 

6. 常山 김도연 동상

 

▲  상산 김도연 동상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계획했던 답사를 모두 끝내고 양천향교역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김도연(1894~1967) 동상’과 마주쳤다. ‘2.8공원’, ‘권농일기념비’ 등 여러 개의 비문이 예사롭지 않아 꼼꼼히 살펴본 그의 이력은 이러하다. 1894년 경기도 양천군 출생으로,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9년 게이오대학 이재학부(理財學部)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간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여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뉴욕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 워싱턴 아메리칸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가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서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제3~5대 민의원에 내리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 자격이 상실되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7년 숙환으로 사망해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 회고록 『나의 인생백서』와 논문 『한국농촌경제』 등이 있다. 이 지역이 낳은 위인임을 확인하고 간단히 묵념한 후 자리를 떴다.

 

전철역 조금 못가 길가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종묘나 대궐 앞에 세운 비석으로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라’는 표시이다. 이후 서원이나 향교의 홍살문 앞에도 비가 세워졌으며 비에는 대개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人(인)은 관직이 없는 사람이고 員(원)은 관직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어쨌든 사람 구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원과 향교 앞에선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하마비 안쪽에 새겨진 주자(朱子)의 권학(勸學)편 칠언절구시(七言絶句詩)를 가슴에 새기며 장장 3시간 반의 강서 답사를 끝맺는다.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一寸光陰不可輕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階前梧葉已秋聲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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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1/19 [15:15]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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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macmaca 21/01/20 [12:40]
@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막무가내 어거지를 피우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 ​ @ ​ 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수정 삭제
유교. macmaca 21/01/20 [12:41]
유교는 하느님이 인간창조(天生蒸民)하시고,하느님(天)께서 선택하신 성인이신 공자님께 천명(天命),천덕(天德)을 부여.하늘에 죄지으면 빌곳이 없다고 경고하시게 하신 동아시아 세계종교.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조선성명 복구령 전국민이 조선 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 의무등록 행정법.관습법상 유교도. 학교교육도 한문,윤리등을 통해 유교교육이 주류. 세계사로는 한나라때 공자님을 추가로 제사하며 동아시아 세계종교로 성립. 한국사로는 유교의 始原유교의 제천의식인 삼한 상달제.시월제,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예의 무천 교육. 조상제사의 고인돌. 유교 교육기관 교육으로 보면 고구려 태학.백제 오경박사, 신라 국학, 고려 국자감, 조선.대한제국 성균관의 유교 최고대학 교육. 은주시대 성립한 始原유교의 하느님,오제[上帝, 조상신계열로 승천, 하느님(天) 하위신으로 계절주관], 지신,산천신,부엌신등 숭배. 은나라 왕족후손인 기자의 한국 기자조선(고려,조선시대 인정, 일제강점기 영향탓 기자조선이 부정되나 한국사의 고조선중 正史영역 기자조선임)의 마지막왕인 기준왕(분명한 正史인물 위만에 멸망)은 중국 始原유교 특징인 한문성씨(서씨,한씨) 성립의 시조로 삼한(三韓)의 조상이 됨. 삼한은 始原유교 특징인 제천의식(단오절,상달제,시월제) 거행. 삼한의 마한유교는 백제영토로, 변한 유교는 가야로, 진한 유교는 신라로 이어짐. 한나라때 공자님의 유가사상이 국교로 채택되며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로 성립되고 공자님도 제사. 한사군의 낙랑은 부여.고구려(고주몽).백제(주몽임금 후손 온조왕, 백제는 마한영토의 始原유교도 승계)에 영향. 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현재는 5,000만이 유교성명 복구하여 문중별.가족별 조상제사 행하며, 설날.추석.대보름.한식.단오의 주요 명절과 중양절(국화철)을 가지고, 유교문화 24절기의 입춘, 소서.대서의 삼계탕.피서, 상강(단풍철), 입동.소설의 김장철, 동지의 팥죽등 세시풍속을 가짐. ​ @ 공자님의 시호.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启圣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启圣王夫人)이십니다. 수정 삭제
유교. macmaca 21/01/20 [12:42]
@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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