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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상을 위한 과거로의 기행
안성 미륵동네 답사
 
신완섭 기자   기사입력  2020/09/21 [09:17]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말 유학자인 야은(冶隱) 길재(1353~1419)가 망국의 한을 노래한 시조이다. 9월 20일 주말을 맞아 경기문화재단이 후원하고 참자연교사회(회장 김현복)가 주최한 역사기행에 참여했다. 행선지는 경기도 안성(安城)으로 ‘편안하며 무탈한 성’이란 뜻의 이곳은 과거 영남길의 요충지로서 옛 이름은 죽주(竹州)였으며 미륵신앙의 온상지로 유명하다. 야은이 망국의 한을 노래했던 고려의 흔적을 찾아 아침 8시, 23명의 답사팀(어른 16명, 초등생 7명)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매산리 태평미륵 (사진=이진복)   ©군포시민신문

 

미륵당과 죽주산성

첫 방문지는 매산리 미륵당. 9시경에 도착한 이곳은 이번 답사의 시작이자 핵심코스 중 한 곳이다.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미륵석불(경기 유형문화재 37호)은 높이 3.9m의 거대 불상으로 고려 초기 양식을 대표할만한 걸작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관을 지낸 나각순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미륵은 과거의 부처인 연등불(燃燈佛, Dipaṃkara)과 달리 열반에 든 뒤 56억 7천만 년 후에 환생할 미래의 부처로서 불교 사회였던 고려 시대의 중심사상이었다.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오른손의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왼손의 여원인(與願印) 손가락이 충남 논산 관촉사의 은진 미륵불만큼이나 유려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뒤이어 근처 야트막한 비봉산(해발 370m)에 자리한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69호)에 올랐다. 15여 분 올랐을까. 널찍한 성내(城內)가 모습을 드러낸다. 죽주산성은 신라 때 270m의 내성, 고려 때 1.5km의 외성, 조선 때 1.7km의 본성으로 확대되었다. 신라 말기에는 기훤의 본거지로, 고려말 몽고 침입 때는 송문주 장군의 전공으로, 조선 임진왜란 때는 황진 장군의 기습 전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특별히 1236년(고려 고종 23) 죽주방호별감 송문주가 몽골군과 보름간 전투를 펼쳐 승리한 곳으로 고려가 승리한 대표적인 전투지로 유명하여 이곳에는 그를 기리는 충의사(忠義祠)가 세워져 있다. 1시간 반가량 성곽을 둘러보다 보니 구국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우국충정이 요소요소에서 느껴져 걷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정미림 선생의 표현대로 체성벽(體城壁)을 따라 오르다 보니 미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선 성벽 너머에 일죽 벌이 펼쳐지고, 또 성벽을 오르다 보니 한눈에 죽산 벌이 펼쳐져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사통팔달 천혜의 요새지였음을 실감케 한다. 

 

 죽주산성 오동나무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봉업사지에서 칠장사로

오전 11시 반경, 주문한 도시락이 도착했다. 집행부가 코로나를 의식하여 실내 식사 대신 야외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성내 나무 그늘 아래 자리한 일행들은 오후를 대비한 식후경(食後景) 삼매경에 빠졌다. 아이들도 모처럼 소풍 나온 듯 낄낄 깔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래저래 풀밭 위의 만찬이었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간 곳은 봉업사지(奉業寺址) 오층석탑. 절 이름에 ‘받들 봉(奉)’ 자가 들어가면 서울의 봉은사처럼 십중팔구 왕가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봉업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이 모셔진 진전(眞殿)사원이었으므로 1363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쪽으로 피신했던 공민왕이 참배하고 갔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이 남아 있다. 양주 회암사, 여주 고달사와 함께 고려 시대 경기도 3대 사찰로 꼽혔던 봉업사도 한때 익산 미륵사지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할 만큼 대사찰이었으나 지금은 당간지주(幢竿支柱; 절 입구에 세우는 두 개의 기둥)와 오층석탑만이 남아있다. 근처 송문주 장군 동상을 사진에 담고 서둘러 칠장사로 향했다.

 

 칠장사 대웅전 (사진=최희영)   © 군포시민신문

 

절 입구에 큰 글씨의 ‘七賢山七長寺’라고 새겨진 안내석이 우릴 반긴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국내에선 몇 안 되는 철당간(鐵幢竿)과 사적비를 살펴보았다. 창건연대와 중수과정 등을 파악할 수 있는데, 조선 중기 작품으로 원래 28층 높이였으나 지금은 14층(11.5m)만 남아있다.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에 창건되었다는 칠장사는 고려 전기 때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이었던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가 일곱 도적을 제도하여 이들이 도를 깨치게 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의 전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는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를 혼비백산 퇴각하게 하고, 임꺽정의 스승 갖바치가 이곳에 은둔하며 민중봉기를 꾀했다고 하니 가히 국운을 쥐락펴락한 명찰(名刹)임에 틀림없다. 두 번의 낙방 끝에 어사 박문수가 이곳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자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과거시험에 나올 시제(試題)를 미리 알려줬다는 카더라 합격다리 등 숱한 사연이 서린 곳이다. 조선 선조의 부인 인목대비는 이곳을 원찰로 삼아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해 직접 지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10권 1질과 시가(詩歌) 친필족자를 이곳에 남겨 문화재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또 대웅전 우측에는 봉업사 터에 있었던 석불입상 한 기가 모셔져 있다. 얼굴과 눈코 부분의 마모를 감안하더라도 조각 솜씨가 매우 곱고 섬세하여 보는 이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아양동 석불입상 (사진=정미림)   © 군포시민신문

 

미륵은 없되 길은 있더라

마지막 답사코스로 안성 시내 아양동 석불입상을 찾았다. 바로 뒤로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생경한 배경 앞에 석불입상과 보살입상이 한 쌍을 이루고 서 있다. 지금껏 봐 온 고려 문벌귀족 같은 고고한 인상의 미륵불과는 달리 매우 서민적인 풍모를 풍긴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우리 과’라고 말할 정도로 친근한 표정에 다들 이구동성으로 오늘 기행의 백미라고 말한다. 일개 서민인 내 눈에도 백미로 다가왔으니 서민의 눈에 들어오는 부처가 진정한 부처임을 공감해 보는 것으로 오늘 역사기행의 막을 내렸다. 

 

오늘 둘러본 안성은 충청으로 이어지는 영남길의 주요관문이다. 우리들의 발걸음은 여기서 잠시 멈추었지만 남쪽의 영남길 말고도 북으로는 의주길, 서로는 삼남길로 이어진다. 우리 선조들이 숱하게 걸어온 이 길을 우리가 걸었던 것처럼 오늘 함께 했던 초등생들이 장성하여 또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 길을 걷길 바란다. 길 위에서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만끽하고 새롭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열어가길 바란다. 현재에만 급급했던 일상을 툴툴 털고 미륵을 찾아 과거로 떠난 여행에서 느낀 소감을 ‘미륵불’로 운을 띄워 단시조로 표현해 보았다. 

 

미륵이 꿈꾼 세상, 제 안에서 찾고 보니

늑장을 부린 만큼 보이잖던 부처가

불식간 깨달음 끝에 고개를 내밉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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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9/21 [09:17]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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