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 살풀이 시화전' 개최에 즈음하여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0/08/14 [05:34]

'친일청산 살풀이 시화전' 개최에 즈음하여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0/08/14 [05:34]

  오는 9월 10일부터 9월 15일까지 엿새간 군포평생학습원 5층 『공간사이』 전시실에서 ‘친일청산 살풀이 시화전’을 연다.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 경기도청(도지사 이재명)이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에 의뢰했던 ‘경기도 친일잔재청산 보고서’가 올봄 완성되어 공식 제출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나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요청하여 보고서 복사본을 어렵사리 빌려 본 뒤, 곧바로 친일 문화계 인물 15명의 인물시를 창작했고 그 내용을 동네 디자이너 안보영이 시화로 담아내었다.

 

  먼저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경기도와 관련된 인적·물적 잔재, 유·무형 잔재, 친일잔재, 민족말살정책의 산물 등으로 분류되어 낱낱이 기술되어 있다. 나는 257명의 경기도 출신 친일 인물 중에서도 문화계 인물로만 압축하여 12명을 추리고 이곳 출신은 아니어도 경기도에서 친일 행적을 벌인 3명을 포함하여 최종적으로 친일 문화계 인물 15명을 추려냈다. 참고로 ‘일제 잔재’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과 식민지배 과정에서 남겨놓은 모든 부정적 유산으로서 해방 이후 청산되지 못한 유무형의 잔재를 일컫는다. ‘친일잔재’란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무형의 유산으로 그 주체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파라는 점에서 일제 잔재의 하위개념에 속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경기도 친일 문화계 인물 15명의 대강은 이렇다. 문학계(3)에 김상용, 이인직, 이무영, 연극영화계(3)에 김승구, 김일해, 김학성, 음악인(1)에 홍난파, 미술계(4)에 이건영, 심형구, 장우성, 윤효중, 언론인(2)에 이원영, 유광열, 학술계(2)에 이광수, 여운홍. 이들은 하나같이 적극적 친일에 가담했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해방 후에도 죽기 전까지 우리나라 문화계의 주요 인사로 대접받으며 온갖 호사를 누렸다. 이들은 친일 행적을 함구하려 했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만을 늘어놓았다.

 

 이들을 한때의 잘못이라 눈감아줘도 될까. 아니다. 일제에 아부하고 징용을 선동하고 천황을 제 임금처럼 모셨던 15인의 친일 문예인들, 저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숱한 민초들이 좌절하고 고통을 겪었다면 그 잘못은 단언컨대 단죄받아야 마땅하다. 올해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항일애국정신으로 목숨을 바쳤던 영령들 앞에 지금 여기 우리가 부끄럽지 않도록 저들의 민낯을 시(詩)로나마 드러내어 응징하고자 펜을 들었다. 

 

  8.15 광복절에 때맞춰 시화전을 열려 했던 계획은 코로나로 인해 9월로 잠시 미뤄졌지만, 본 지면을 통해서나마 ‘친일잔재 청산 살풀이’를 시민, 도민 아니 온 국민과 공유하고자 한다. 몇 편의 인물시를 감상해 보도록 하자.

 

친일작곡가 홍난파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인가 체념인가,

망상에 젖어 산 지 10년이 넘고 보니 

의가사 변절마저도 부끄럽지 않더이까

 

아침에 뜨는 해가 어제오늘 다르잖고

침상에 들기 전의 중천 달도 여전한데

산 밖에 난 범 꼴 신세, 누가 되라 하더이까 

 

에디트 피아프를 배신했던 이브 몽땅,

들판의 고엽들이 바람에 흩날릴 때

에돌던 여린 본심이 갈피를 못 잡듯이

 

Note_<봉선화(1920, 김형준 작사)>, <고향의 봄(1929, 이원수 작사)> 등 다수의 노래를 작곡하고 <處女魂(1921)>, <向日草(1923)> 등 소설집을 펴낸 홍난파(1898~1941)는 경기도 남양 태생이다. 민족혼이 담긴 국민가요 작곡가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친일 양상을 띠었다. 1937년 9월 조선문예회가 애국가요 10여 편을 발표할 때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正義の凱歌)’와 스기모토 나카오 작사의 ‘空軍の歌(공군의 노래)’를 작곡하였고, 1938년 조선방송협회가 전시동원체제를 찬양 고무하기 위해 널리 보급한 <家政歌謠(가정가요)>에 이광수 작사의 ‘희망의 아침’과 김억 작사의 ‘산에 들에’를 작곡한 바 있다. 친일로 돌아서서 가사를 쓴 작사가들과 마찬가지로 곡을 붙인 홍난파 역시 친일 공범의 굴레를 벗어날 순 없다.

 

친일학자 이광수

 

춘원님, 어설피 춘몽을 꾸셨나요, 

원치 않는 삿된 해몽이라 말하지 마오.

나라가 망하고 나니 언설도 바뀝디까

 

의로 살고 충에 죽자던 기개는 어디 가고 

고하는 말마다 천황 찬양, 친일 일색

백만 번 고백한대도 죄상이 씻기리까

 

Note_소설가 시인 평론가로 명성을 떨친 춘원 이광수(1892~1950)는 평안북도 정주 태생으로서 해방 후 1946년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 칩거하며 1948년 자신의 친일 행적 경위와 친일의 역사철학적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춘추사에서 간행하였다.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나를 희생해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동포를 핍박에서 건지자는 것이었다. 벼슬이나 이권이나 내 몸의 안전을 위해서 친일행위를 한 일은 없다. 어리석은 나는 그것도 한민족을 위하는 일로 알고 한 것이었다”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8월 불기소처분되었으나 1950년 6.25 때 납북되어 그해 10월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젊어서는 1907년 일본 유학, 1910년 귀국 후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고, 1919년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다가 1921년 귀국, <민족개조론(1922)>, <민족적 경륜(1924)> 등을 발표하였으며 1926년 수양동우회를 창립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 이 사건으로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해방되기까지 그의 친일 행적은 고백하기에도 부끄럽게 너무나 휘황찬란하다. 

 

친일소설가 이무영

 

제 할 일은 농사라며 농부가 되려 했네,

일 끝낸 남은 소작, 궁핍이 여전하매

과불급, 농부 시늉을 관두자 그랬다지

 

제 발에 저린 오금, 펴줄 길 막막하여 

일본에 아부하며 잠시 한눈팔고 보니

장부의 길 어긋나서 몸 둘 바를 몰라 했네

 

Note_일제강점기는 숱한 지식인을 변절하게 만들었다. 농민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소설가 이무영(1908~1960; 충북 음성 태생)도 친일반민족행위자란 오명을 갖고 있다. 문학 공부를 위해 일본 세이조 중학교로 유학 가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4년간 문학수업을 받았다. 1935년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 1939년 7월 기자직을 그만두고 경기 시흥군 의왕면 어엽2리 궁촌(현재 군포 궁말)으로 내려와 농촌 생활을 하며 1939년 <제1과 제1장>, 1940년 <흙의 노예>, 1954년 장편 <농민> 등 주목할 만한 농민소설을 펴냈다. 이런 공적에 비해 1942년 9월 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문학부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으면서 내선일체를 찬양하고 징병을 선동하는 등 친일행위의 오점을 남겼다. 친일행각을 비판 받아 1999년 군포 능안공원에 세워졌던 ‘이무영작품비’는 철거되고 말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작년 내가 편저자로 참여하여 펴낸 중국 이주 100년 실록 <두만강은 말한다>의 원저자 박남권 씨가 책머리에 남긴 말이다. 일제에 부역했던 일부 문화계 저명인사들의 친일행각을 통해 우리 모두 다시는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지면 관계상 나머지 12명의 인물시는 싣지 못했다. 궁금해하는 독자님은 친히 전시실을 찾아주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 주길 바라며, 우리 다같이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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