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사단법인 평화철도 집행위원장이자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지낸 정성희(1959년생, 안양 거주)씨와 1987년 ‘6월 안양권 민주항쟁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역사적 현장을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A1. 길게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3년 암울했던 군부독재 정권에 맞서 학내 민주화 운동과 재야단체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지요. 1985년 대우자동차파업, 구로동맹파업 등과 1986년 아세안게임 전후로 건대 애학투 등 노동자, 학생들의 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1987년에 들어서자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은폐,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 발표에 이어 5월 18일 정의사제구현단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모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거리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민주 쟁취’ 목소리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6월 9일 데모시위 도중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 군의 사진이 매스컴에 실리면서 전국적인 6월 민주항쟁운동으로 삽시간에 번져나갔던 것입니다.
Q2. 1987년 6월 당시 정성희 씨는 어떤 신분이었나요? A2.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금성사 기획부에 첫 입사 후 1년 10일만인 1984년 12월에 안양소재 국제전기에 위장 취업했어요. 당시에는 기업에 노조가 결성되기 힘든 때였지만 회사 내에 노조 준비위 성격의 ‘한마음회’를 만들어 이후 임금투쟁위원회로 전환, 인근 4~5개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1986년 3월 공동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4시간 파업투쟁 혐의로 검거 구속되어 집행유예로 8월에 출소한 뒤로는 해고 노동자의 신분으로 노동자정치집회에 참여하다가 김현덕, 최창남, 노세극 등과 비합법 써클을 만들어 지역노동운동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28세 혈기왕성했던 때라 불의에 맞서려는 의지 하나는 대단했지요(웃음).
Q3. 6월 당시 안양권 민주항쟁운동에 직접 참여하셨다던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A3. 1987년 2.7투쟁, 3.3투쟁, 6.10항쟁에 동지들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안양권에서는 19일(금), 23일(화), 26일(금)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는데, 저는 19일과 26일 두 차례 노동계 주도의 시위집회에 참여하였고, 23일 한신대 경기대 등 대학생 중심의 시위집회 때는 불참하였습니다. 19일에 안양 중앙시장 인도 쪽으로 수천명의 시민들이 운집하면서 순식간에 차도를 점거하고 2시간 정도 집회를 하던 도중 전경대와 몸싸움도 벌였습니다. 1주일 뒤인 26일 오전 집회에는 무려 1만여 명이 안양1번가에서 우체국에 이르기까지 거리를 꽉 메운 채 안양경찰서(현 성결대 앞 사거리)까지 평화행진을 하였습니다. 오후에 다시 삼원극장(현 CGV) 앞에 집결한 시위대는 안양시청(현 만안구청)을 거쳐 안양경찰서까지 행진하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지요. 밤이 되면서 민정당 지구당사에 화염병이 투척되고 안양경찰서 담벼락이 무너지고 경찰관사가 전소되는 등 새벽 2시 넘어까지 일부 시위가 과격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주로 시위를 기획하고 조직을 동원하는 일을 담당했던 터라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Q4. 안양권 6월민주항쟁운동의 성과를 꼽는다면? A4. 전국적인 6월민주항쟁운동의 결실은 ‘6.29 선언’으로 드러났습니다. 아시다시피 ‘4.13 호헌조치’를 철회하고 국민이 열망했던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거지요. 노동계 입장에서 보면 6월 항쟁의 결실은 7월 이후 ‘노동자 대투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노조 설립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파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기존 ‘안양노동상담소’뿐만 아니라 ‘안양지역노동자회’, ‘안양노동교육연구실’, ‘우리자리’,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운동단체들이 결성되었음은 물론,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회’ 등 문화단체가 창립되고, 한무리교회, 박달교회, 돌샘교회 등 민중교회의 주도로 1988년에는 ‘안양지역민중교회협의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던 거지요.
Q5. 6월 항쟁이 역사에 남긴 교훈이 있다면? A5. 6월 민주항쟁 승리 이후 1987~1990년 수년간 친미보수 세력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1990년 1월 21일 이후 보수대연합으로 대치기를 당하고 1991년 5월 투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1993년 문민정부의 등장과 동구공산권의 붕괴 등 사상적 혼란이 있었으나, 전노협-업종회의-대기업연대회의가 전노대-민주노총 창립으로 빛을 발합니다. 저는 1987년 6월 항쟁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첫째 민중이 사회변혁과 역사 발전의 중심 동력(動力)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 농민, 학생 등 각계각층이 하나로 뭉친다면 언제든 민주화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다고나 할까요. 2016, 2017년에 보여준 촛불혁명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지향점이 훨씬 구체적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겁니다. 6.29선언을 통해 얻은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로서의 직선제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내용적 민주주의, 자주화 및 평화통일을 실현하려는 변혁 운동의 대중화가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역사는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을 자양분으로 발전해 갑니다. 6월 항쟁은 우리나라 역사 발전의 한 획을 그은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