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코로나사태로 인해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봄꽃 구경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일상생활에 바빠 미처 보지 못했던 들꽃들도 눈에 들어왔다. 눈이 호강하는 것으로 갇힌 생활의 나를 위로하곤 했다. 선거도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린다. 사람들은 투표도 하지만, 선거행사를 구경하는 재미도 크다. ‘자연의 꽃’은 구경하는 것에 만족하면 그만이다. 반면 ‘선거의 꽃’은 구경거리라기보다는 그 결과가 중요하다. 우리의 일상적 삶 뿐 아니라 이 땅의 민주주의, 자유, 평등 등 거대 이념의 지평이 갈리기 때문이다.
지난 4월10일 사전투표를 하러 갔었다. 하지만 코로나 비상시국이라는 현실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투표현장에 놀랐다. 4층 투표소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만원 지하철처럼 꽉꽉 차서 오르내렸다. 코로나 예방차원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는 문구와 함께 계단은 굳게 닫혀 있었다. 투표소는 ‘사회적 밀착하기’ 하듯, 앞뒤 간격 없이 빽빽하게 뱀 줄이 수 십 미터나 이어졌다. 이러다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연일 TV를 통해 철저한 방역을 강조하는 현 정부의 진정성에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선거는 또 다른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집에 배달된 두툼한 선거홍보물을 받아 보았으나,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특히 셀 수 없이 많은 ‘비례정당’ 후보자들까지 헤아리면서 현명하게 투표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낯설게 느껴졌다. ‘꼼수정당’, ‘위성정당’이라고 비난받는 비례정당들은 급조되어 당황케 하였다. 후보자들의 자질도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어떤 의사는 코로나방역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전격 발탁되었다. 코로나환자 치료는 안하고 연신 TV에 얼굴을 자주 내미는 등 대외적, 정치적 활동 덕으로. 그 후보를 아는 지인도 깜짝 놀란 발탁이었다. 어디 이 후보 뿐 이랴. 하지만 달리 선택 여지는 없다. 정해진 후보 중에 도장 찍는 것 밖에. 유권자로서 농락당한 느낌이다.
이번 4.15 총선 선거전을 보면 마치 재판 같다. 재판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린다. 승자는 독식하고 패자는 사라진다. 재판 이후 양측이 함께하는 공존의 터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거는 공동체 건설을 위한 행사이자 축제이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함께 하는 공동체를. 다만 공동체를 이끌 사람을 결정하는 것뿐이다. 누구를 찍더라도 승자는 전체를 위한 공동체의 일꾼일 뿐이다. 또 선거 이후 승자와 패자 모두 유권자들에게는 똑같은 이웃이다.
그럼에도 마치 사생결단의 문제처럼 선거에 덤비는 후보는 사심(私心) 때문이다. 국민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 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한 것이리라. 아니면 자신이 신봉하는 집단이데올로기에 빠져 있거나. 이는 유권자들의 이해관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일부 후보자들은 이런 속내를 감추고 선동적 언행을 일삼는다. 또 유명인들은 배후에서 마치 학생운동 때처럼 사심 없이(?) 국민들을 자극 선동하기도 한다. 이들의 언행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재판에서 이겨 성공보수를 두둑하게 받으려는 악덕 변호사처럼 보인다. 그 결과는 우리 공동체를 가르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밖의 꽃들은 점점 사그라지고 푸른 잎이 빠르게 산과 들을 덮는다. 청와대 앞길도 아름다운 꽃들로 걷기 좋은 거리로 인기가 높아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이 길은 서쪽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에서 경복궁 후면 돌담을 따라 북촌 삼청동으로 길게 이어진다. 아쉽게도 현 정부 들어선 이후 이곳은 상습 시위 장소로 변질되었다. 보수단체, 진보단체 가리지 않고. 늘 야당 쪽 단체만 시위를 하곤 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분열된 우리사회의 단면인 것이다. 선거 꽃이 진 우리 사회는 푸른색으로 넘쳐날까? 코로나, 포스트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낡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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