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꼭지점 찍고 솟대마을 만들기는 수리산자연학교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군포시민과 학생들이 함께 ‘만걸음 생태띠 잇기’작업의 일환으로 지난 4월부터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날 진행되고 있다.
11월 7일(토) 오늘은 생태꼭지점 찍고 솟대마을 만들기가 마무리 되는 날이다. 마무리가 아쉬운지 가을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가을비로 인해 수리산 초막골에 세우려고 했던 “왕은점표범나비 솟대마을”은 다음에 세우기로 하고, 학생들을 위한 550여 년 전 수리산 초막골로의 시간여행은 가을비를 맞으며 진행하기로 했다.
수리산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한남정맥의 한 봉우리로 수리산 자락이 길고 정승 판서의 묘역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 수리산 자락 초막골에 제일 먼저 자리를 잡은 집안이 순흥 안씨 참판공 안의(安誼, 1423-1467) 집안이다. 안의는 조선개국공신 안경공(安景恭, 1347-1421)의 증손이며, 조부는 우찬성과 대제학을 역임한 안순(安純, 1371-1440)이고, 부친은 의정부좌참찬을 지낸 안숭선(安崇善,1392-1452)이다.
안의는 연안부사와 성주목사에 오르고 후에 자손이 영달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사로 추증되었다. 참판공은 부인 파평윤씨와의 사이에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이천공(利川公) 안우삼(安友參, 1441-1494)은 남양부사와 내섬시정(內贍寺正)을 지냈다. 그의 딸이 초막골 산본천 마주편에 있는 장도공(章悼公) 한치의(韓致義, 1440-1473) 장남 청원군(淸原君) 한위(韓偉, 1465-1511)에 시집을 갔다. 이리하여 장도공 한치의와 이천공 안우삼은 사돈이 된다.
장도공 한치의는 조선전기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이며 자는 의지(誼之)로 좌의정 한확(韓確, 1403-1456)의 아들이고,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의 동생이다.
세조1년(1455) 음보로 사정(司正) 및 상서사녹사(尙瑞司錄事)가 되었고, 이듬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59년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을 거쳐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낸 후 세조 10년(1464)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가 되었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 난이 일어났을 때 선전관(宣傳官)·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등 군의 요직을 맡았다.
예종 즉위 후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맡았고, 성종 1년(1470) 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에 올라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나 이듬해 청양군(淸陽君)으로 바꾸어 봉해졌다.
공조참판으로 관직을 옮긴 후, 1472년 병조판서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이듬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시호는 장도(章悼)이다.
장도공 한치의의 묘는 처음에는 성종의 능이 있는 선릉 지역이었는데, 성종의 묘역으로 선정됨에 따라 장도공의 묘를 부인 전의이씨 묘가 있는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원래 수리산 초막골은 순흥 안씨의 사패지였다. 그런데 안우삼의 장녀(한치의 며느리)에게 수리산 초막골 일부지역이 분배되었던 것이고, 그 지역에 시어머니 묘역을 조성한 것이다. 율곡 이이 선생의 분재기를 보면 임진왜란(1592) 이전까지 딸에게도 재산이 분배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증거를 수리산 초막골에서도 볼 수 있다. 이후 수리산 초막골은 산본천 좌우 경계를 중심으로 순흥 안씨 묘역과 청주 한씨 묘역이 형성된 것이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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