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박물관을 나오자 맘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었다. 이란에 가면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사진 초상이 있는데 바로 이맘 호메이니(Imam Khomeini)이다. 호메이니를 부르는 호칭인 이맘은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막연히 그의 묘소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지하철로 쉽게 갈 수 있다. 남북으로 뻗은 지하철을 타고 남쪽으로 쭉 가면 되는데 종점에서 거의 한 두 정거장 정도 전에 내리게 되는데 베헤스테-자흐라(Behesht-e Zahra) 지역이다.
이맘 호메이니 영묘(Holy Shrine of Imam Khomeini)는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거기에다 황금돔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린다. 들어가는 입구는 남녀가 분리되어 있는데 아들이 10살 밖에 안 된 어린아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30m쯤 떨어진 출입구로 따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처럼 히잡만 쓴 여자들은 비치된 차도르로 온 몸을 가려야 한다. 절차가 까다롭기 그지없으니 맘은 아까부터 계속 투덜대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니 천장의 장식도 휘황찬란하기 그지없다. 초록색 조명을 받고 있는 호메이니와 그 가족의 무덤이 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경비도 삼엄하여 총을 들고 있다. 넓이가 축구장인가 싶을 만큼 큰 홀과 화려한 천장 장식에 눈을 떼지 못하는 나에게 맘의 투덜거림은 계속된다.
“물가는 자꾸 올라 살기도 힘들고 젊은이들은 살 집 얻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 받고 있는데 영묘를 얼마나 사치스럽게 지었는지 한 번 봐요. 게다가 이 넓은 공간에 히터를 틀어대면 그 운영비는 누가 감당하겠냐고!”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통해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이 구분되지 않고 정치인과 성직자가 일치된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이란을 이슬람법에 기반한 정치체제로 제건할 것을 주창하였으며 서구화, 세속화 정책에 반대하며 국왕 팔레비에 맞서다 망명하게 된다. 망명지에서도 모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하층민과 상인층을 규합하여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였으며 이 후 1979년 2월에 귀국하여 임시 혁명 정부를 조직하게 된다. 그 해 10월, 추방된 팔레비 국왕의 소환을 미국에 요구하지만 거절당하자 대학생들의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이 점거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반이슬람 혁명파를 제거하고 이슬람 공화국임을 공고히 했다.
이란 혁명의 최고 지도자로서 이슬람 공화국을 이룩하였지만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여전히 칭송받을 거라는 생각은 사치스러움이 극치를 보여주는 영묘에 발을 딛는 순간 물 건너 간 일이다. 생전의 그가 아무리 청빈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들 극도로 치장된 그의 무덤을 보고 불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을 돌보지 않은 채 이상만을 강요하는 종교라면 과연 사람들에게 설득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묘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다행히 우리가 탄 역이 거의 종점에 가까워 앉아갈 수 있었는데 퇴근 시간과 겹쳐 플랫폼에 열차가 들어서기 무섭게 사람들이 밀려들어온다. 퇴근길의 고단한 사람들의 얼굴과 영묘의 황금돔이 겹쳐 보이면서 이 땅에 온 지 1398년이 되는 예언자 마호멧이 들려주고자 했던 알라의 뜻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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