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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바이칼, 시베리아를 가다] 다시 이르쿠츠크에서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싸이베리아 여행기’ (12)
 
신선임 안산선부중학교 교사   기사입력  2019/01/07 [07:53]

[편집자주] 대야미 속달동 주민 신선임 씨와 가족들은 지난 겨울 아프리카 여행에 이어 이번 뜨거웠던 여름에 러시아 바이칼 일대를 다녀왔습니다. 이에 매주 토요일 러시아 여행기 ‘생명의 바이칼, 시베리아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오늘은 드디어 알혼 섬을 떠나는 날이다. 풍광이 수려한 이곳을 떠나려니 아쉽기도 하면서도 푹신한 침대와 뜨거운 샤워 생각이 간절한지라 편리함의 혜택을 누리고 싶은 생각이 부끄럽지만 굴뚝같다.

 

아침 첫 차로 예약을 해 둔 터라 타트야나의 정성담긴 아침 식사를 하고 나니 이별의 정을 나눌 여유도 없다. 우리가 탄 미니버스는 어제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되어 버린 알혼의 비포장 도로를 마구 달리다가 페리로 갈아타고 다시 버스에 올라 타 이르쿠츠크를 향해 왔던 길을 돌아가는 여정이다. 알혼 섬 여행을 길게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가는 길에 각각 한 나절이 걸리기 때문이다.

 

▲ 이르쿠츠크로 향한 버스에서 펑크난 바퀴를 갈아 끼는 부리야트인 운전사     © 군포시민신문

 

신나게 달리던 버스에서 세상모르게 자던 우리를 보고 운전사가 갑자기 내리라고 한다. 바퀴에 펑크가 나서 갈아 끼워야 한단다. 기사가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 타이어를 내리니 사람들이 받아주고 너나 할 것 없이 협조적이다. 능숙한 솜씨로 바퀴를 빼내어 새 것으로 교체하는 동안 저 앞에 초등학교 운동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는 담이라고 따로 없이 운동장이 널찍해 보인다. 아이들은 너무나 신나게 뛰어놀고 있어 국도변의 빈한한 동네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느덧 이르쿠츠크에 닿았다. 며칠 전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알혼으로 떠나야 했던 남편은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했다. 밤기차를 타기까지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주 정부 청사가 들어서 있는 키로프 광장 주변으로 향했다.

 

도시의 남북으로 쭉 뻗어있는 레닌 거리를 앙가라 강이 있는 북쪽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키로프 광장에 다다르게 된다. 칼 막스 거리의 번잡함과는 달리 분수, 화단 등으로 잘 정돈된 분위기가 유럽의 여느 도시를 방문한 것 같다. 주 정부 건물 바로 뒤에는 2차 대전 참전 중 희생당한 군인들의 명복을 비는 영원한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다. 리스트뱡카와 같은 작은 마을 입구 어귀에도 2차 대전 참전 희생자의 위령탑이 들어서 있고 왠만한 주 정부에도 키로프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영원한 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다.

 

2차 대전은 소련의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의 희생이 6백만 명인데 비해 소련의 희생자가 2천 만 명에 달했으니 전쟁의 폐해를 말로 하기 힘들 듯하다. 1939년 독일의 침공으로  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던 폴란드 그다인스크에 있는 국립묘지에서 폴란드인의 묘비 수에 버금가는 러시아인들의 묘비가 인상적이었다. 20대 초반의 많은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 땅에 이렇게 묻혀 있으니 그들의 부모나 이웃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유럽의 파시즘을 막아낸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사람들의 피를 대가로 하는 전쟁이란 이미 전쟁광들의 추악한 광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 아이들이 이르쿠츠크 시청사 뒤편에 위치한 꺼지지 아     ©군포시민신문

 

러시아어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2차 대전의 희생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근거는 희생자로 추측되는 명단 위에 씌어 있는 1941~1945라는 숫자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이 숫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한 것도 모자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시기 조선은 그들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병참 기지로 전락해 있었다. 징병, 징용, 성노예의 형태로 인적, 물적 자원이 남김없이 전쟁에 동원되어 실려 나갔고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우리 역사의 암흑기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본토를 떠나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 있었는데 좌익 계열의 독립 운동 세력이 있었던 시베리아에 와서 우리 역사책에 등장하는 이르쿠츠크라는 지명을 더듬어 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키로프 광장을 향해 걸었던 레닌가 23번지에 들어서 있는 극장(당시 인민회관)은 고려 공산당 창립총회가 개최된 곳이다. 이로써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이 결성되는데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구별하여 이들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이르쿠츠크파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한다고 보아 러시아 한인을 당시 백군과의 내전이 한창인 볼셰비키 전선에 동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상해파는 민족독립과 항일투쟁이 최우선이며 시베리아의 한인 사회를 규합하여 반일 투쟁을 하는 것을 우선으로 두었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서로 대립하면서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고 지원을 얻고자 경쟁, 반목하는 한편 한인무장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을 벌여 같은 한인 독립군 간에 서로 총부리를 들이댄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을 낳게 된다. 그 결과 수많은 독립군이 죽고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삼일 운동 직후 고조된 반일무장투쟁의 열기가 꺾이게 된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당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벌어진 이 비극이 해방 이후 한반도가 겪은 극도의 혼란기를 예고하며 이로 인해 친일파들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살아남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면 크나큰 과장일까? 이들이 서로 대립하였지만 분열하지 않고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 하에 서로 화합했더라면 반일무장투쟁 세력이 총동원되어 일제 해방에 중요한 기여를 함으로써 건국을 오롯이 우리 힘으로 해 낼 수 있었다면 친일 세력을 소탕하고 민족혼을 바로 세울 수 있지 않았을까? 남의 나라에 와서 한 세기 전의 우리 역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어 본다.

 

▲ 레닌 거리를 따라 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리끼 두상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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