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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바이칼, 시베리아를 가다] 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츠쿠에서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싸이베리아 여행기’ (2)
 
신선임 안산선부중학교 교사   기사입력  2018/09/13 [08:30]

[편집자주] 대야미 속달동 주민 신선임 씨와 가족들은 지난 겨울 아프리카 여행에 이어 이번 뜨거웠던 여름에 러시아 바이칼 일대를 다녀왔습니다. 이에 매주 토요일 러시아 여행기 ‘생명의 바이칼, 시베리아를 가다’를 연재합니다.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르쿠츠쿠(Иркутск)의 아침은 매연으로 가득하다. 한국과 일본에서 흘러들어온 중고차와 버스 등이 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전차 뜨람바이(трамвай)와 함께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도로 포장과 인도 보수 등으로 여기저기 공사 중이어서 아이들과 함께 걸어 다니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데카브리스트 기념관(Музей Декабрист)인 볼콘스키의 집(Дом Волконских)이었다.

 

▲ 앙가라 강변을 걸어가는 중에 발견한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두상(사진=신선임)     © 군포시민신문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에 있으면서도 유럽의 문화 수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 말로 12월을 의미하는 ‘데까브리(Декабрь)에서 유래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해 프랑스까지 진격하게 된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이 제정 러시아 황실의 부패에 대항하여 1825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들 중 주모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살게 되었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아무 교통수단이 없는 시베리아 설원을 헤치며 1년 넘게 가야하는 것이었다. 유형 초기에는 광산에서 일하는 노역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이들의 유형은 유배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간 활동이 보장된 생활을 하면서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귀족 문화를 꽃피우고 시베리아에 유럽의 수준 높은 문화를 소개했다는 말로 여행 책자는 끝을 맺는다.

 

▲ 이르쿠츠크 주 향토박물관의 역사관 분관 아쨀 이스또리에서(사진=신선임)     © 군포시민신문

 

시베리아 땅에 ‘수준 높은’ 유럽 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 데카브리스트 덕분이라면 원래 여기에 살고 있었던 토착민의 문화는 보잘 것 없는 야만적인 것으로 폄하할 위험이 있다. 지금은 러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높은 인구를 구성하지만 17세기 우랄 산맥을 넘어 러시아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곳에는 부리야트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들이 터를 잡고 살던 땅이었다. 이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은 러시아 제국의 정교화 정책과 소련의 집단 농장화로 인해 사라지고 이런 흔적은 박물관 유리 안에 박제되어 남아 있다.

 

앙가라(Ангара) 강 방향을 향해 칼막스 거리(ул. Карла Маркса)를 거의 끝까지 가다보면 이르쿠츠크주 박물관(Иркутский Областной Краедческий Музей)을 찾을 수 있다. 역사관인 아찔 이스또리(Отдел истории)에는 이르쿠츠크 지역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생활상의 변천을 엿볼 수 있는데 1층에는 부리야트인들의 생활도구, 어린 아이들의 장난감, 사냥도구, 민속 의상, 샤먼들의 무구 등의 정교한 장식이 전시되어 있다. 같이 전시를 보던 아이가 어떤 물건이 ‘전시’될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본다. 자기 물건도 나중에 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는지 궁금해 하며 말이다.

 

글쎄. 무언가 사람이 손으로 정성껏 만들었을 때 그것이 전시될 수 있지 않을까? 샤먼들의 옷 하나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저걸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싶을 정도로 무수한 손바느질이 촘촘히 들어가 있고 아이들 장난감 하나하나도 손으로 제대로 깎은 정성이 보인다.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물건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물건이란 돈 주고 사는 것으로 전락하여 쉽게 얻어지고 쉽게 버려진다. 생활의 모든 것이 사람의 손을 통해 직접 만들어졌던 시대에는 생산이 느리고 적게 만들어지기에 귀할 수밖에 없고 귀하기에 아껴 쓰고 대를 이어 물려주는 미덕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주위 환경을 덜 파괴할 수 있어 오랫동안 지구를 ‘있는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하다. 박물관조차도 영어에 인색하여 설명이 러시아어 일색이니 대충 눈으로 사물의 용도 등을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박물관에 모인 전시품에서는 적어도 사람 냄새가 나는 오래된 미래의 모습이었다.

  

박물관을 나서면 앙가라 강을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3세(Александр Ⅲ)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그는 1891년 3월 17일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칙령으로 공포하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건설에 대한 공으로 이렇게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사실 착공식을 주관하고 철도 건설 및 시베리아 개발에 관한 전권을 행사한 것은 아들인 니콜라이 황태자였다. 그는 착공식이 열리는 블라디보스톡(Владивосток)을 가기 위해 상트 뻬떼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에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그리스를 거쳐 러시아 군함에 올라 인도양을 지나 홍콩과 일본을 경유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일본에 머물 때 일본 경찰에게 저격을 당했지만 러일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측의 적극적인 조치로 외교전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착공식에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나타난 황태자는 다시 지난한 길을 밟아 되돌아갔고 수개월에 걸친 그 여정이 이후 제정 러시아 황제가 될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구체제를 고수했던 짜르는 20세기 초 러시아를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비켜갈 수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이 완공된 지 1년 뒤인 1917년 2월, 제정 러시아 마지막의 황제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는 폐위되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져 우랄 산맥 근처의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되었다가 이듬 해 가족과 함께 살해되니 냉정한 역사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내일 그 열차를 타러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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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3 [08:30]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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