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時雨 53회: 바다 이야기

[연재] 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기사입력 2018/07/04 [10:13]

시우時雨 53회: 바다 이야기

[연재] 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입력 : 2018/07/04 [10:13]

늦은 회의 뒤 한 잔 걸치는 술자리는 따스하기도 하다. 낡은 백열전구아래, 양은냄비에는 어묵이 끓고 둥근 테이블에 양복쟁이들이 둘러앉는다. 나무로 짠 옛날식 미닫이문 유리창 너머로 어둠이 짙어간다. 비가 내린다. 

 

몇 순배巡杯나 오갔을까. 취기醉氣로 발갛게 익어가는 낯에 흥이 돈다. 분위기를 좀 더 이어가고 싶던 부장님이 여세를 몰아 이끈 곳은 다름 아닌 ‘바다 이야기’였다. 자고나면 동네마다 헤엄치는 물고기 떼 간판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늘어가던 2005년 이야기다. 도대체 뭣에 끌려 소시민들이 그리 열광할까. 놀고 즐기며 궁금증도 풀어보자는 김 부장의 제안이 그럴 듯 했다. 

 

입구 환전소에서는 손님이 낸 현금에서 10%를 뗀 나머지를 상품권으로 돌려줬다. 몇몇 사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발면을 먹고 있는 휴게실을 지나 홀hall로 들어섰다. 창문하나 없이 사방이 막혀 있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구석구석에 설치된 공기청정기가 걸러내고 있었다. 짙은 화장에 허벅지 옆으로 길게 찢어진 치마를 입은 아가씨들이 음료를 날랐고,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이들은 고객들의 질문을 받고 잔심부름도 했다.

 

▲ 장마비가 잠시 그친 지리산 풍경    (사진=백종훈)

 

성인오락실은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다. 대리님이 귀엣말로 ‘슬롯머신’이라고 알려줬다. 화면에 문어, 해마, 해삼, 복어, 조개가 줄줄이 나와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버튼을 눌러 같은 무늬가 일렬로 나오면 상금을 탄다고 했다. 시시하고 지루했다. 대충 상품권을 다 털어 넣고 사람 구경에 나섰다.

 

중년 아주머니가 가슴 앞주머니에 상품권 한 다발을 꽂고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단추를 두드리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꽁지머리에 개량한복 차림의 한량도 보인다. 어떤 이는 혼자서 한 줄에 늘어선 기계 모두를 접수했다. 각 누름단추 위에 재떨이를 걸쳐놓고 한 걸음 떨어져 앉았다. 어디 하나라도 대박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자세다. 일군一群의 남자들은 어슬렁거리며 한동안 잭팟jackpot이 안 뜬 머신을 찾아다닌다. 통계를 활용한답시고 머리 써서 하는 배팅이다. 

 

약속했던 한 시간이 지났다. 직장 동료들이 다시 모였다. 몇 푼이라도 건진 분들은 환전소에서 상품권을 돈으로 바꾸며 다시 수수료 1할割을 냈다. 

 

게임장 주인은 따고 잃는 비율을 설정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당연히 자기가 버는 구조로 세팅한다. 거기에 환전비를 덤으로 챙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횡재橫財를 기대하며 현란한 도박장 불빛을 좇아 너도나도 덮어놓고 덤벼들다 패가망신하기 일쑤다. 

 

세상은 강자들이 깔아 둔 놀이터요. 그들이 짠 규칙이 지배한다. 거기에 눌려 하루하루 허겁지겁 살아가던 약자들이, 일확천금으로 신분상승을 노리며 잡은 지푸라기가 ‘바다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게임 판 뒤에서도 어김없이, 가진 자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고 있었다. 한탕을 노렸던 지친 인생들의 주머니는 그렇게 또다시 털렸다. 

 

마음에 탐욕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꿈틀거리는 한, 악랄한 강자들이 놓아둔 덫에 걸려들고야 만다. 그러나 2,500여 년 전에 이미 부처님께서는, 반야般若지혜로 금강저金剛杵를 들어 탐심을 떨쳐내시고 당신을 꾀려는 덫마저도 부셔버렸다. 그리고 중생들에게 말씀하셨다. 진리에 눈 뜬 선한 강자와 어리석은 약자가 서로 가르치고 배워, 내 안의 집착과 나를 유혹하는 덫을 끊고 자유의 언덕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이것이 부처님이 정한 게임의 룰rule이다. 더디더라도 이뤄내야 할 미륵불 세계 용화회상龍華會上의 진면목이다.  

부처님 법法바다에 반야용선般若龍船 띄우고 

사방의 남녀동지 인연 따라 모여서 

진리의 돛대 달고 정의正義의 노 저으니

이상理想의 피안彼岸으로 지체 없이 가누나

힘을 모아 이 법선法船을 운전해가자 

성스럽다 우리들은 부처님 일꾼

– 원불교 성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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