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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時雨 51회: 나는 나의 일을 할뿐
[연재]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기사입력  2018/05/29 [09:52]

서울 북촌 은덕문화원. 새벽을 여는 고요한 손길이 부지런하다. 지붕위로 올라 기와에 얹힌 솔잎을 쓸어내린다. 시산侍山님은 뜨락 가운데, 용을 닮아 옆으로 길게 누운 소나무를 전지剪枝 한다. 긁개로 낙엽과 가지 부스러기를 치우며 마당에 가느란 자국을 냈다. 양지바른 장독대 곁 주방에서는 손님 치를 음식장만이 한창이다. 침묵, 절제, 정성. 살아있는 가람伽藍은 그러하다.

 

좌산 종사님이 머무시는 인화당仁和堂에 법향法香이 은은하다. ‘한민족평화통일연대’초청강연 일정으로 서울에 오신 어른을 뵙자는 발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을 이었다. 그 중 인상 깊은 한 사람이 있다. 

 

문화체육부장관 유인촌씨가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호들갑스럽게 인사하고 떠난 얼마 뒤, 대문으로 모닝 승용차가 들어왔다. 뒷좌석에서 그가 내렸다. 청와대 국정기획 수석비서관 P다. 미간이 찌그러지고 가슴이 아려왔다. 몸은 바로 달려가 그의 따귀를 치라 하는데, 마음이 멈추라 황급히 말렸다.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그가 나를 모를지라도 나는 그를 잊을 수 없다. 2000년 4월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바리케이드 맨 앞에 내가 있었고 바로 맞은편에 행정학과 교수 P가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9년 전 그 일이 생생이 피어났다. 흩어졌던 분노까지도.

 

▲ 은덕문화원 (사진=은덕문화원)  

 

그 시절 봄이면 여느 대학에나 늘 있어온 등록금투쟁으로 대학본부를 점거한 학생들은 법인사무국에서 뜻하지 않은 문건을 발견했다. 교수 개개인의 인맥, 학맥, 사생활이 낱낱이 기록되었고, 정치 성향에 따라 ‘문제교수’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직원노조, 강사노조, 조교협의회, 총학생회 및 운동권 각 정파의 동향과 대응책이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몰래 촬영된 사진에 붙어있는 포스트잇마다 집회 참석자 이름이 빼곡했다.

 

학교당국는 전자를 단순 인사존안파일로, 후자를 조작된 가짜문서라고 주장했다. 반면 학생회는 전자를 인권침해이자 정치사찰로, 후자를 심각한 노동조합 탄압으로 규정했다. 기자회견 후, 이 사건은 주요 일간지 사회면에 여러 날 실리며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학교법인을 운영하던 삼성이 이미지 추락으로 입은 피해가 2조원에 다다른다는 괴담이 돌았다. 삼성에 다니던 졸업생 이름으로 성대에서 삼성이 곧 손을 뗄 것이란 벽보가 붙기 시작했다. 삼성과 함께 하는 학교발전을 지지하는 측과 학내 민주주의를 우선에 둔 진영 사이에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전기 끊긴 추운 건물에서 불안한 점거를 이어가던 어느 날. 멀리서부터 차차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에 눈을 떴다. 그들은 대성로를 오르며 벽에 붙은 대자보를 사정없이 찢고 플랜카드를 뜯었다. 직원과 교수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수는 처음이다. 늙은 교수들은 뒤로 물러서 있고 나머지 모두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 천막을 부수고 연장으로 유리문을 깨 농성장을 쳐들어왔다. 선두에 입학처장 P가 있었다.

 

이후, 국회의원,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 고용노동부장관, 기획재정부장관으로 승승장구 하는 P를 TV에서 볼 때마다, 징계와 생활고에 시달렸던 선후배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나는 단순가담자라 문책 대상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항의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은덕문화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P를 보자 일어난 울분 뒤에는, 처벌 받는 동지들을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미안함이 숨어있었다. 그렇다. 나는 P에게 화火내며 동시에 자책했던 것이다. 그를 적대하는 마음이 도리어 나를 태웠다. 이렇게, P를 향한 호통의 절반은 거꾸로 나를 짓눌렀다. 후폭풍으로 되살아난 옛 일과 슬픔이 숨 막히게 나를 옥죄였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국가정보원에서 특수 활동비를 상납 받은 의혹으로 검찰조사 받는 P가 보도되었다. ‘장충기 문자’로 드러난 삼성에 아부하는 꼭두각시 엘리트 명단에도 P는 등장한다. 여전히 분하고 마음이 쓰린 걸 보니 아직 채 사그라지지 않은 진에瞋恚의 불꽃이 남았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녹여내는 노력으로부터 근원적 치유治癒는 시작된다. 날로 선善을 행하며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가는 참회는 그 방법이며, 여기에서 비롯한 용맹한 정의행正義行이야말로 나를 살리고 세상을 보듬어 안는 길이다. 격분하기보다는 부처님의 자비로 그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하는 ‘나’이기를, P로인해 연상되었던 오래전 그날에서 풀려나 더 이상 자학自虐에 빠지지 않는 ‘나’이기를 기도한다.

 

참회와 기도, 그리고 정의행. 나는 나의 일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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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29 [09:52] ⓒ 군포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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