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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칼럼] 대한민국 국회와 민주주의, 이대로 좋은가?
 
김동민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외래교수   기사입력  2018/05/11 [10:10]
▲  김동민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외래교수    

민주주의는 결코 좋은 제도가 아니다. 먼 훗날 훌륭한 민주주의로 완성되는 날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온 민주주의는 실패다. 이상과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좋은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인간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존재여야 한다. 이 둘은 또한 상보적이어서 합리성이 발휘되어야 좋은 제도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꿈이다.

 

현실을 직시해보자. 대한민국 국회는 민주주의를 담보하고 있지 않다. 야당은 해방 후 비정상의 역사를 비로소 정상으로 돌려놓게 될 남북정상의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을 거부하고 있으며, 청년 일자리 등을 위한 추경예산 심의도 거부하면서 오로지 드루킹 특검만을 고집하며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사퇴서 수리도 방기하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의 권리는 털끝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1 야당 원내대표란 자는 도무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단식투쟁이란 걸 하다가 꼴랑 8일 만에 병원에 실려 갔고, 바른미래당 의원들 역시 이유를 알 수 없는 철야농성을 한다. 이러한 추태를 보면서도 국민들은 속수무책이다. 국민이 주인이고 국회의원은 공복이라는 게 민주주의인데 이게 민주주의인가?

 

▲ 드루킹 특검 수용 촉구하며 단식을 선언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사진=자유한국당)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이것은 개뿔, 신화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유일한 제도라고 해서 지어낸 말이요, 주권자를 현혹시키는 함정이다. 선거는 차차선의 선택으로서 필요악이다. 더 좋은 선택이 있을법한데 하지 않는다.

 

선거는 우선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아 피 터지도록 싸우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원수가 된다. 최고의 지성이라는 대학의 총장 선거도 그렇고 언론사에서도 그렇다.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된 것도 선거의 결과다. 지역감정도 선거를 위해 조작된 것이다. 승자독식의 선거에서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승자도 패자에 대해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승자들끼리 나누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이들이 이성적으로 보이는가?

 

홍준표 대표를 비롯하여 야당 국회의원들의 막말과 몰지각한 행동은 인간에 대한 회의를 증폭시킨다. 선거지상주의는 심지어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호하게 만든다. 민주당은 좀 나은가? 자기 자신의 이익, 즉 국회의원직의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서라면 김진태 의원과도 러브샷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세비를 올린다든지 국회의원 소환제라든지 3선 제한 같은 요구가 있다고 할 때는 똘똘 뭉친다. 서로 존경한다는 상투적인 표현의 정체는 그것이다.

 

선거권의 연령을 18세로 낮추자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이성은 자기에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따진다. 사실은 선거연령 상한제도 필요하다. 19세기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보통선거권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할 때 인간의 수명은 40세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만 하더라도 평균수명은 60세 정도였다. 그러니 상한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냉정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는가.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우선 인간은 이성적 존재인 것은 맞는데, 그 이성이란 것은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계산적인 능력으로서의 이성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유전자에 각인된 인간의 본성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 가족에게 이익이 되는 것, 소속 집단에 이익이 되는 것,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험하디 험한 자연 속에서 경쟁하며 생존해야 했던 인간의 숙명이다. 이타적인 행위도 이익이 될 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래로 데카르트를 거쳐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 권위를 누려왔지만, 과학은 그것이 사상누각이란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은 제한적으로만 합리적이며 감성이 이성을 압도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성은 신화적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듯이 그런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이성의 기능을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며 환경에 맞서 생존하고, 잘 살고, 더 잘 사는 데 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성은 궁극적으로 무정부적 욕망의 야만적 힘을 치리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가, 적어도 절대다수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때라야 민주주의는 가능할 것이다.

 

직업정치인들이 이해관계를 떠나 집단적으로 이성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결국은 시민의 몫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국회를 해산시켜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주권자의 힘으로 사이비 민주주의를 파괴해야 한다. 파괴해야 새로 세울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무정부적 야만적 힘을 치리할 때가 되었다. 2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촛불혁명의 정신도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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