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時雨 50회: 하늘 위 하늘 아래

[연재]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기사입력 2018/04/30 [09:22]

시우時雨 50회: 하늘 위 하늘 아래

[연재]나는 그대안의 당신이요, 그대는 내안의 또다른 나입니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입력 : 2018/04/30 [09:22]

하릴없이 되풀이되는 인계동 생활에 식상했다. 마침 들려오는 소식이 반갑다. 회사는 과천에 열 새 매장 초대점장을 물색 중이었다. 그 자리가 탐나 자청했다. 서울대공원점은 유동인구가 엄청나 대중의 이목이 몰릴 수밖에 없어,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支店 가운데 하나다. 자연, 임원진의 기대가 컸다. 반면  직원들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구태여 익숙한 일을 놓고 함부로 덤빌 정도의 일은 아니라 여겼다. 잘 된다 해도 본전이고, 오히려 실패로 입을 타격이 더 컸다. 게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오픈점포다. 그러나 나는 겁이 없었다. 뭐든 해내고 싶었다.

 

▲ 서울대공원 초입(사진출처=서울대공원 홈페이지)     © 군포시민신문

 

부점장 김성창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알바생 샛별이와 부임지로 이동 했다. 개점을 준비하는 선배직원들의 손길이 이미 바빴다. 부장님까지 손수 나섰다. 비록 점장으로 왔지만 신입사원인 내 역할은 애매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뿐, 어지러운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조절해 갈 권한은 없었다.

 

입점을 앞둔 분주한 움직임을 날카롭게 주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장 앞에 물건을 내 놓자마자 고성이 들려왔다. 길 가에서 장난감과 김밥, 생수를 파는 노인들이다. 생존권 문제라 지자체에서도 그분들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가게 안에서만 판매하기로 암묵적 합의가 이뤄졌다. 그 자리에서 빈손으로 밀려난 상인들도 주변을 서성였다. 상가 이권을 가지고 있는 상이군경회와 본사가 맺은 계약에 그들 몫은 없었다. 권리금은 법으로 보호되지 않았다.

 

갖가지 팔 것들을 빠짐없이 선반에 채웠다. 재고도 넉넉했다. 은행에서 잔돈을 충분히 바꿔뒀다. 전산시스템 점검도 마쳤다. 밤샘 작업으로 피곤하나, 정신은 되려 말똥했다. 나뭇잎 푸르고 햇살 가득한 봄날이었다. 떨렸다.

 

바야흐로 소풍시즌이었다. 꼬마손님들이 하염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개미떼 같았다. 아이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아나는 제품이 없었다. 가져다 두기 무섭게 비워져나갔다. 창고가 텅 빌 지경이었다. 잔돈이 동날까 전전긍긍했다. 술 담배 없이, 낮 장사로만 매출 800만원을 넘겼다.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가맹점이라면 모를까, 직영점장에게 휑한 매대賣臺는 질책 사유였다. 고객에게 제공할 상품이 언제나 마땅히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신규점이라 예측할 데이터가 없었다. 별다른 조언도 없었고, 입사 1년차 직원에게 경험은 당연히 부족했다. 불안감이 들었지만 일매출을 더 높이고자 물류센터에 상당한 양의 물품을 주문했다.

 

아뿔싸! 전날과 영 다르다. 소풍 없는 날이었다. 미처 몰랐다. 배송트럭 여러 대가 엄청난 짐을 내렸다. 하지만 재워 둘 곳이 없다. 물릴 수도 없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나고 냉장식품이 야외에 방치됐다. 감당이 안 됐다. 허둥지둥 어쩔 줄 몰랐다. 과장님이 헐레벌떡 차를 몰고 왔다. 영업사원들을 급하게 호출해, 상하기 쉬운 것부터 인근 점포로 나르게 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목엔 핏대가 섰다. 망연자실한 나를 불러 세우고 질타를 퍼부었다. 그럴 만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구했다. 지나는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김 과장은 화를 내면서도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했다. 결핵으로 첫 직장을 잃고 한 해를 방황하다 어렵사리 얻은 일자리였다. 실업의 늪을 벗어난다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업하리라 했을 만큼 절박했었다. 잘 해보고자는 의욕이 강했다. 그래서 실책이 더 아팠다.

 

지금 와서 보면 그깟 일 쯤, 욕먹고 며칠 속 좀 상하면 그만이라 하지만, 그땐 그게 전부로 보였다. 마치 경력에 큰 흠집이라도 생긴 듯, 만회할 수 있다면 못할게 없다 여겼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겠다고, 그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릎 꿇었다. 작은 이익에 자존감을 기꺼이 포기한 노예나 다름없었다.

 

불문佛門에 든 지 십년. 그날의 어리석은 중생은 어디로 갔는가! 메아리 없는 골짜기에서 나오리니, 약자들에게 더 이상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자고,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자에게 조아려야 했던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 이웃을 기억하고 사랑하자고, 이제 그들을 지켜드리는 우리가 되자고, 같이 해보자 이르리라. 하늘 아래 하늘 위,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소중한 한 생명이니까.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天上天下 唯我獨尊

온 세상이 모두 괴로움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三界皆苦 我當安之

- 고타마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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