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4일차. 6시가 되니 눈이 떠졌다. 외국에 나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늦잠을 못 잔다. 잠이 안 온다. 시차, 긴장감, 설렘, 뭐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본전생각'이다. 씻고, 0층으로 내려가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했다. 뭐 그러려니. 바게트 빵, 과일, 치즈, 햄, 베이컨, 우유, 커피, 잼, 시리얼 등 등 등
원래 없어서 못 먹지 입에 안 맞아서 못 먹는 음식이 없는 체질이기는 하지만, 아침식사를 빵으로 대충 때우는 것은 별로 안 좋아 한다. 아침을 거르면 걸렀지 아침 식사에는 따뜻한 국이 있어야 제격이다. 어제 본 일식집 ‘오사카’가 생각났다. 아쉬운 대로 일본 ‘미소된장국’ 절실했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객실에 올라와서 밥솥에 밥을 했다. 가스버너를 아직도 못 구했지만 오늘 점심은 맨 밥에 마른 반찬이라도 해서 밥을 먹을 요량이다. 배낭 메고, 캐리어 각각 하나씩 끌고 내 손에는 밥솥도 들린 채, 길 건너 주차장으로 갔다.
스트라스부르에서 하이델베르크까지
정확하게 8시 출발. 킬로수 4512km. 일단 국경 쪽으로 그러니까 동쪽으로.
스트라스부르에 연결된 고속도로는 A4번과 A35번 고속도로. A35번 고속도로를 타도 대충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이지만 굳이 국경을 먼저 넘어 독일로 들어가 독일 고속도로 A5번을 타 기로 했다. 독일고속도로는 모두 무료다. 더구나 이른바 아우토반, 속도제한도 없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번 여행 중 최대의 헤맴 사건은 그렇게 잘못된 판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도에 보면 스트라스부르에서 정 동쪽으로 일강(ill)을 넘어 Kehl이란 지명이 있다. 이 곳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국경이고, 국경을 넘어서면 바로 독일 고속도로 A5번을 타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건 지도 사정이고, 일강을 넘어가는 다리가 없는 걸 어쩌랴. 일강을 넘어가는 다리가 있어야 하는데 강을 끼고 돌기만 하지.
그러다가 어쩌다가 우리도 모르게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그 다리가 Kehl로 넘어가는 다리 같았다. 아무튼 강을 건넜다. 그러나 길이 이상해진다. 이정표가 전혀 없다. 주위 풍경도 으슥하고. 어쩌겠는가? 계속 갈 수밖에. 안개는 자욱하게 끼어있는데 길은 이상한 데로 가고. 그렇게 가다보니까 어마 어마하게 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공장(대충 화학계열 공장) 정문으로 연결되더니 길 끝! 낭패다. 다시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다시 갔다. 다시 강을 건넌 것은 같은데 아까 건너왔던 곳은 아닌 것 같고. 나침반은 북쪽을 향해있고, 강을 끼고 있는 도시라 그런지 안개는 더욱 자욱해지고. 어차피 하이델베르크는 북쪽 방향이니 독일 고속도로건, 프랑스 고속도로건 고속도로야 나와라.
그런데 계속 가도 강변도로만 달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눈앞에 또다시 공포감을 엄습하며 나타난 거대한 건물. ‘유럽의회’였다. 유럽의회가 왜 이런 곳에 있지?
계속 차를 몰아갔다. 드디어 고속도로가 나왔다. 프랑스 고속도로 A35번. 고속도로로 올라탔다. 이때 시간이 출발한지 1시간 35분이 지난 9시 35분. 그런데 남쪽으로 간다. 우린 북쪽으로 가야되는데……. 잠시 정지. 지도를 보니 셀레스테(Selestat)이란 동네에서 국도 D424번이 독일 고속도로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래, 거기까지 가서 독일로 넘어가자.’
그리하여 우리는 셀레스테까지 가게 되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대충 유턴을 하려고 로터리를 찾았다. 유럽에서 잘 볼 수 있는 로터리. 회전교차로. 이거 참 편리하다. 교통량이 그리 많지 않은 곳에서는 좌회전도, 우회전도, 유턴도 너무나 편하게 할 수 있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첫 로터리를 만나 유턴을 하려 하는데 바로 그 로터리 옆에 론드 포인트(Rond Point)라는 할인매장이 있었다. 가스버너. 아직도 구입하지 못한 가스버너 생각이 났다. 매장 주차장으로.
가스버너, 있다. 그것도 무진장 여러 종류가. 부탄 가스통도 많았다. 그것도 무진장 여러 종류가. 가스는 한 통에 대략 1유로 정도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매장 내에 다양한 지도를 팔고 있었다. 마구 샀다. 비록 떠나온 동네지만 스트라스부르 지도도 사고, 니스, 모나코, 중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지도도 샀다. 모두 2만분의 1 지도로.
10시 40분 출발. 11시 정각! 드디어 라인 강을 넘었다. 이제 독일! 출발 후 3시간 만에 독일 국경을 넘었다. 국경 검문소 같은 것은 없었다. 프랑스와 다른 한 가지는 독일이 프랑스보다 도로표지가 잘되어 있다는 것! 국경을 넘자마자 보이는 가장 반가운 것! 'A5번 고속도로를 가려면 이리로 오시오'라는 고속도로 진입 이정표.
11시 22분 드디어 A5번 고속도로. 독일고속도로, 아우토반에 진입. 내친 김에 속도를 붙였다. 140. 160. 180. 200. 가볍게 200을 넘긴다. 220. 겁난다.
국내에서도 여행을 자주 다니다보니 고속도로를 애용한다. 그래서 내 차도 국내에서는 잘나간다는 티뷰론 터뷸런스. 국내에서도 곧 잘 시속 200km씩 속도를 내보곤 한다. 200km/h까지 속도는 잘 올라간다. 터뷸런스 순발력이 뛰어나다. 그것도 수동 트랜스미션. 그러나 차가 죽는 소리를 낸다. 시속 200km 이상으로 주행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불과 몇 초?
그런데 이 차는 시속 220km를 넘어도 잘 달린다. 내가 겁이 나서 속도를 줄이기는 했지만. 시속 170km. 푸조 206이 내 차를 추월한다. 배기량 1600cc가. 유럽 차 잘 나간다는 것이 괜히 잘나가는 것이 아니다.
12시10분. 적당한 휴게소를 찾아 들어갔다. 유럽 고속도로 휴게소는 다양하다. 그냥 쉬었다 가는 곳. 화장실이 있는 곳. 공중전화가 있는 곳. 우리나라 휴게소처럼 주유소, 식당, 매점 등등이 있는 곳. 어쨌든 휴게소가 매우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피크닉 테이블이 있는 휴게소로 들어갔다.
적당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방금 전에 산 가스버너 꺼내서 김치찌개를 끓였다. 호텔에서 해가지고 나온 밥이 아직 따뜻하다. 맛나게 먹었다. 비록 테이블 의자가 비에 젖어 서서 먹은 밥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자동차 여행의 진면목이지 않을까. 버너, 가스, 코펠 등 간단한 취사도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유럽에서도 김치찌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다는 것.
▲ 독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김치찌개를 끓여 먹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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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30분. 단 20분 만에 뚝딱 점심을 해먹고 다시 출발.
1시 11분. 목적지 하이델베르크가 31km 남은 지점. 다시 휴게소에 들어가 처음으로 주유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셀프 주유소가 많지만 그 때 당시에 내 손으로 차에 기름 넣어 본 것 처음이었다. 주유기 옆에 차 세워놓고 기름 넣고 주유소 매점에 가서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중요한 것은 계산을 끝내기 전에 주유기에서 차를 빼면 안 된다는 사실. 뒤에 아무리 많은 차들이 기다려도.
내가 주유기에 차를 댈 때 앞에 차 두 대가 있었다. 맨 앞차는 주유를 끝냈는지 차만 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리니 운전자가 매점에서 기름값 계산하고 양 손 가득 쇼핑까지 해서 나온다. 그래도 짜증내는 사람은 없고. 완전히 세월이었다.
우리 앞 차 주유.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나오셔서 주유를 한다. 다음 우리 차례. 48리터에 43유로 계산. 4006km에서 기름 가득인 상태로 차를 인도 받았는데 처음 주유하는 이때 킬로수가 4765km. 48리터로 759km를 탔다. 연비는 리터당 15.8km, 상당히 양호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 매점에서 지도를 사는 일. 스트라스부르에서와 같은 헤맴을 다시는 하지말자. 하이델베르크 도시 지도를 샀다. 2만분의 1지도. 도심은 1만분의 1까지 별도로 되어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작은 책자도 끼어있었다. 5.5유로.
자동차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지도.
어떤 도시를 들어가면 중심부에 있는 인포메이션에서 지도를 구한다?
나에게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도시 중심부를 어떻게 들어가느냐이다. 어디가 중심부인지. 거기를 갈려면 어찌 가는지 난감하다. 스트라스부르에서처럼. 그러므로 도시 들어가기 전에 지도를 먼저 구해야 한다. 주유소에서 구한 지도 덕분에 하이델베르그 입성은 아주 순조로웠다. 도시 구조 자체가 스트라스부르처럼 복잡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이라고 인식된 카를교 바로 옆까지 순조롭게 차를 가지고 들어갔다. 그 바로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너무나 순조로운 도심지 운전. 지도의 힘이 크다. 이 때 시간이 2시30분. 출발 후 6시간 20분. 누적 킬로수 4802km이었다. 4512km에서 출발했으니까 290km를 주행했다. 6시간 20분간.
전날 밤 호텔 객실이 따뜻하다 싶었는데 너무 건조했었나 보다. 부르터 오르던 입술에 아예 물집까지 잡혔다. 중심가 하우프트스트라쎄로 들어가자마자 약국부터 찾았다. 입술 연고제를 샀다. 아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약사까지도 측은하다는 듯이 나를 본다. 하우프트 거리 쭉 훑어보았다. 케밥집에서 치킨 케밥을 시켜 먹었다. 그런데 먹는 게 너무 고역스러웠다. 입술은 부르텄는데 있는 힘껏 입을 벌려야 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케밥 빵에 묻어나는 빨간 핏자국.
오후 4시 20분. 어제와 마찬가지로 해가 벌써 기울려고 한다. 고성(쉴로쓰)에 올라갔다. 버스 타고 올라가려다 마음이 급해 벤츠 택시 타고 올라갔다. 5.20유로에다가 팁 80센트까지 해서 6유로 줬다.
고성에서 누구라도 다 찍는 카를교를 사진 찍었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글쎄, 나에게는 기괴함을 느끼게 한다. 한 30분 소요하다가 고성을 떠나려니 교통편이 난감했다. 걸어서 내려가자니 한 30분 걸릴 것 같고. 버스를 기다리자니 언제 올지도 모르고. 그런데 택시가 저만치 서있다. 타고 보니 조금 전 우리를 태우고 왔던 택시였다. 장사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5시 30분 하우프트 거리에는 어둠이 깔렸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처음으로 하는 야간운전. 오늘은 어떻게든 로텐부르그까지 간다. 밤을 세는 한이 있어도 간다.
지도상으로는 무조건 동쪽으로. 37번 국도를 타고 네카강을 따라 가다보면 A6번 고속도로. 이걸 타고 동쪽으로 가다가 A7번 고속도로 만나면 북쪽으로. 그러면 우리의 목적지 로텐부르크가 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37번 국도타고 조금 가다보니 번화한 사거리.(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거기가 네카게문트. Neckagemund)
아주 좌회전, 비스듬한 좌회전, 비스듬한 우회전. 이른바 세 갈래길. 이정표에서 갑자기 국도 번호는 사라지고.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동쪽. 나침반이 가리키는 길은 비스듬한 좌회전. 나침반을 따라 갈 수밖에.
이때가 5시 45분.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이 사거리로 되돌아오기까지 2시간이 걸렸다. (5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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