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국 역사여행(4-2)
[기획 연재] 1944년 장준하의 장정을 따라가며...
이재범(문화재위원, 경기대 사학과 교수) | 입력 : 2015/07/23 [14:20]
육로장정 상해의 얼굴을 보고 서주로 이동하였다. 항공편으로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장준하는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쓰카타 부대를 탈출하였다. 실질적인 장정의 시작은 서주부터였다. 우리 일행뿐인 49인승 비행기는 1시간여 만에 서주에 도착하였다. 서주공항에는 6대의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의창까지 육로장정은 소형 버스로 진행되었다. 장준하는 이곳에서부터 1,800km를 육로로 의창에 도달했던 것이다. 서주에서의 첫 방문지는 중국군 공병부대였다. 장준하가 탈출한 쓰카타 부대가 있었던 곳이다. 군부대라 입구만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여야 했다. 비포장도로가 많은 중국의 육로를 소형버스로 달린다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더욱이 중국의 화로지대라고 하는 이 일대의 고온다습은 나를 충분히 질리게 했다. 장준하는 7월 7일 탈출하였으므로 그때의 고통이 느껴졌다. 불로하라는 작은 냇가에 도착했다. 이 불로하 부근에서 진혼제를 지냈다. 장준하는 탈출 후 불로하를 건넜다. 불로하라는 이름은 늙지 않는 강이라는 뜻이다. 청년 장준하의 늙지 앟는 청년 정신을 되새겨 보았다. 3일차에 방문한 곳은 임천이었다. 임천 제1중학교로 향했다. 임천은 행정단위로서는 우리나라의 군 단위 정도인 현이라고 하는데, 인구는 220만이라고 했다. 임천에서는 현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기념비 제막식을 마치고 우리는 평한선을 향했다. 평한선은 북평 - 무한을 잇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광선이 되었다. 북평이 북경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선로가 무한에서 광주로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장준하는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일군 초소를 중국군에 섞여 빠른 속도로 통과하였다. 그리고 노하구로 향했다. 노하구에서는 이종인 부대를 찾았다. 장준하는 이종인 부대에서 상당한 기간을 기거하였다. 이종인은 중국 군벌의 한사람으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처음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87년부터 항일운동 차원에서 이곳에 역사박물관이 세워졌다.
▲ 이종인 부대 역사박물관에서 © 군포시민신문 |
|
특이하게 여겨졌던 것은 이종인 역사박물관인데도 중심부에 손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공산당이 국민당 정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어떻든 이념을 넘어선 하나의 중국을 만들려고 하는 중국의 의식이 우리의 남북현실과 대비되었다. 차는 계속 달렸다. 때로는 차에서 내려 행군도 했다. 계속해서 나아갔다. 넓은 광야만이 보였다. 그렇게 해서 의창에 도착했다. 삼협 댐을 보았다. 엄청난 규모에도 놀랐지만, 그것을 계획한 중국인을 다시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일단 의창에서 육로장정이 끝났다. 장준하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양자강 상류로 거슬러 간다. 이제부터는 수로장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중국에 온 지도 벌써 5일이 지나고 있었다.
수로장정, 그리고 OSS 수로장정이 시작되었다. 이튿날 의창에서 탄 쾌속정은 삼협 댐 건설로 바다 같은 양즈강의 상류를 향해 나아갔다. 중경을 향해 가는 것이다. 배는 12시간 정도가 지나서 우리를 중경에 내려 놓았다. 중경은 중국 최대의 도시. 어두워진 중경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더위보다는 비가 더 나은 것 같았다. 중경시 중심부를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했다. 중경임시정부 청사터를 방문하기 위해서 지나던 차를 세우기도 했다. 임시정부터는 생각보다 보수가 잘 되어 있었다. 임시정부터를 대하니 나라 잃은 서러움에 북받쳐 이곳을 도착했던 장준하의 감격이 전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절망도 생각났다. 내로라하는 거물급 임정요원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 갈등의 틈바구니를 헤맸을 장준하를 떠올렸다. 무언가 답답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장준하가 다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서둘러 서안행 비행기를 탔다. 서안은 장안의 바뀐 지명이다. 거대한 진시황의 병마용이 있고, 양귀비 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장준하가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에 실망한 그는 미군 OSS를 찾았다. 서안은 당시 장준하가 OSS교육을 받던 훈련장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물류 보관장소로 변한 훈련장에서 장준하와 그의 동료들을 떠올리며 구보를 했다. 젊은 대원들은 역시 나보다 잘 뛰었다. 네바퀴째를 도는 대원들의 꽁무니에서 나는 세바퀴째를 헤매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흐르는 땀을 씻으며 장정의 대미를 장식했다.
울며 오른 태항산 서안에서 승차한 야간열차는 9일차 아침에 한단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장정은 끝났지만, 조선의용군 유적지를 찾아 남장촌을 방문했다. 남장촌은 당시 중국 공산당과 합작했던 조선의용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태항산에서는 조선의용군 600명이 중국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에게 몰살 당하였다. 그래서 태항산을 오르기 전 남장촌에서 간단한 강의를 통하여 조선의용군에 대한 의미를 살피고자 했다. 그것은 분명히 훌륭한 시도였다. 그런데 한참을 설명하던 강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겨 버렸다. 강사는 울고 있었다. 그가 울었던 대목은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울어야 하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강사는 먼저 조선의용군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중국 공산당과 합작한 것은 사상적 동기가 아니라 항일이라는 민족차원에서라고 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가 갑자기 질문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을 토벌하러 온 일본군 사령관을 아십니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강사도 마찬가지로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채 울고만 있었다. 당시 조선의용군을 토벌하러 온 사람은 조선인 출신 일본 장군 홍사익이었다. 홍사익은 일제강점기에 중장까지 진급하였다. 2차대전 종료 후 필리핀에서 전범의 한사람으로 처형되었다. 어떤 이는 그를 비극의 군인으로 그렸다. 그 뒤에 불행한 군인 박정희가 있었지만, 그 둘은 모두 일본의 황군 출신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의용군 토벌대의 최고 사령관은 일본 황군에 입대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나라 잃은 서러움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그래서 대원들도 모두 울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들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남장촌의 중국인 촌로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오랫만에 만난 이산가족들 같았다. 그들이 물었다. 왜 이제야 찾아 왔느냐고. 그리고 왜 남쪽에서 왔느냐고. 그들은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당연히 북에서 먼저 자신들을 방문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싸웠던 무정장군 휘하 세력은 북한에서 연안파 숙청 때에 사라졌다. 그 뒤로 이들에 관한 평가는 폄하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이후 멸공, 반공 등의 이데올로기 정국으로 말미암아 이들은 설 곳을 잃었다. 분단시대의 사각지대에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남장촌을 뒤로 하고 우리가 찾은 곳은 섭현 태항산이었다. 태항산에는 석정과 진창화의 무덤이 있었다. 태항산은 나무도 많지 않아 숨을 데가 없는 민등산과 같았다. 홍사익 부대는 이곳에 무차별 포격을 해댔다. 조선의용군과 중국 공산당은 갈 데가 없었다. 피신을 해도 민둥산 어디에서나 노출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이곳 태항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진혼제를 거행했다. 나무그늘 하나 없는 산이기에 한여름의 햇볕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래서 아주 더웠다. 그러나 더위보다는 포격에 스러져간 그들을 생각하자 터져 나온 슬픔이 더 컸다. 그래서 모두들 다시 울었다. 태항산을 오르면서도 울고, 올라가서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로 울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청년 등불 태항산을 뒤로 하고 북경으로 향했다. 지평선에 달이 걸려 있었다. 경이로운 것은 달 아래 걸려 있는 붉은 별이었다. 몇 만 년에 한 번 볼 수 있다는 화성과 달의 랑데부를 장정의 끝에서 볼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달과 화성이 만나 것처럼 장정은 장준하와의 오랜 기다림의 끝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귀국 전. 북경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번 여행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장준하라는 인물의 삶을 다시 짚어 보았다. 먼저 장정의 어려움이 시리게 느껴졌다. 나라 잃은 슬픔의 진정한 의미가 새겨졌다. 그가 만들었던 잡지 이름이 생각났다. ‘등불’이었다. 어둠을 밝히고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 그 등불이 바로 장준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위의 젊은 단원들을 보았다. 그들은 장정을 마친 청년들이었다. 갑자기 그들이 빛났다. 청년들이 빛나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등불이 되어 있었다. 장준하의 생각을 이어갈 젊은 ‘청년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꺼지지 않을 그 ‘청년등불’들이 내 주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버스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커다란 ‘등불’하나가 중국 대륙의 중심을 가로질러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北京’이라고 새겨진 공항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장준하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 삶의 과정을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기 위하여’라는 말로 표현했다. 일상의 물질적 삶을 꾸리기에도 바쁜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 어려운 명제이다. 그래서 나는 무진기행(霧津紀行, 김승옥의 단편)의 마지막 글귀를 떠올렸다. 그것이 폐만 끼치고 떠나야 할 나를 어느 정도 변명해 줄 것 같기에․․․.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