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귀화한 왜장(1)[기획 연재] 국가의 체면 때문에 역사를 왜곡해서는 안된다편집자 주 - 최근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 드라마되어 임진왜란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임진왜란시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약 못지않게, 조선에 귀화한 왜장의 역할과 후대 권력에 의한 역사왜곡에 대한 경기대 사학과 이재범 교수(문화재 위원)의 기고문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조선에 귀화한 왜장 사야가
김충선(金忠善,1571년~?)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 본명은 사야가(沙也加). 본관은 김해.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可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침입하였다가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였다. 그 뒤 경주․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孫時老)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을 가상히 여긴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이어서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에 승품되었다. 뒤에 야인들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랑하자 종군을 자원하여 10여 년 동안 방수(防戍)에 봉직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년) 정헌대부가 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그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스스로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 나아가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의 녹리(鹿里)로 돌아왔다.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저서로는 1798년(정조 22년)에 간행된『모하당집』3권이 전한다.
위의 설명에 따르면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 휘하 장수의 한 사람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가, 조선에 귀화한 항왜(降倭)의 한 사람으로 조선인이 된 뒤에는 조선에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 인물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김충선이 한일관계사의 쟁점의 하나로 부각되었을까?
김충선은 왜장이 아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또한 조선 땅에서 조선인으로 계속 생활하면서 점차 번성해져서 문집 발간 등 현창 사업을 통하여 시조인 김충선 추모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그가 시조가 되어 이루어놓은 가문 또한 우리나라의 그 어느 가문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집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 땅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김충선과 그의 가문 및 문집이 근대 일본에서는 큰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1910년 일본의 조선병탄 의지가 최고조에 달했던 무렵, 일군의 일본 학자들은 김충선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 그의 『모하당문집』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의문 제기의 동기는 그들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애국심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 나미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 아오야기 쓰타나로(靑柳綱太郞), 아오야기 쓰타나로(靑流綱太郞) 등의 역사가들이 가장 적극성을 띠고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이들이 문제시한 대상은 서로 달랐으나, 김충선과 그에 관한 사실이 조작되었다는 데에는 모두가 의견이 일치하였다. 이들에게는 ‘문록 ․ 경장전쟁(임진 ․ 정유왜란)’에서 적군인 조선군에게 자진 투항하였다는 ‘사야가=김충선’이라는 존재의 실존 그 자체조차도 납득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충선은 사망한 지 300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일본인들의 불타는 애국심에 의하여 다시 지상으로 끌려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 문제될 것 없는 김충선이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일단 무엇인가 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과연 문제가 되었던 구체적인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아오야기가 주재하는 조선연구회는『고서진서(古書眞書)』 간행의 제2기 제15집으로『모하당집』1책을 내놓으면서, 아오야기 자신과 나이토,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후쿠다 긴지로(福田幹次郞), 노부슌(延浚), 야마지 조이치(山道襄一),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 등의 의견을 모아 책머리에 수록하였다. 이들의 견해는 정도에 따라 크게 온건과 강경의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
온건론을 주장하는 나이토는 왜란이 끝날 무렵, 일본군 철수 시 일본군 중에는 조선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김충선의 존재는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문집은 후대 사람들의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아사미도 사야가나 김충선의 실존 가능성은 있으나 문집은 날조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후쿠다와 노부는 김충선을 긍정하였다. 이들은 문집의 진본 여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었으나, 대체로 김충선의 존재는 긍정하는 자세였다.
그러나 후자의 야마지, 가와이, 아오야기 등은 정밀한 고찰을 통하여 적극적인 반론을 폈다. 야마지는『모와당문집』은 일본군 중의 비천한 잡졸이 포로가 되어 살기 위하여 지었든가, 아니면 왜구와 조선인의 혼혈아인 가짜 일본인이 자기 변호를 위하여 만들었거나, 아니면 조선 남부의 유생 등이 민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만든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가와이도 이를 일본군 대패의 사실을 날조하여 적개심을 고무시키기 위한 위서라고하면서, 당시 그러한 배신자가 있을 턱이 없으며, 사야기는 매국노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아오야기는 가코의 부하 가운에 이러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야가가 실존 인물이라면, 삼포에 살고 있던 혼혈아이거나 왜구와 연결된 조선인 부랑아일 것이라고 하면서, 모하당은 이것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앞서 두 사람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 이후의 이 분야 연구에 영향을 미쳐서 일본에서 연구된 항왜(降倭) 관련 논문들에 일본측 사료만 이용하고, 한국측 사료는 이용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첨지사야가’는 인정하지만, 김충선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 않는 추세이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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