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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바다 vs 불멸의 바다' 답사기(2)
이순신 장군과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신완섭   기사입력  2019/08/19 [09:29]

8월 16일(금)

아침 5시반에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혼자 해안선 산책을 나섰다. 동피랑 마을입구를 지나 쭉 걸었다. 동피랑은 ‘동(東)+비랑(비탈의 통영사투리)’의 합성어로서 통영 동녘에 위치한 산동네 마을이다. 강구안 바다 풍경이 일품인 이곳에 예술인들이 모여 벽화마을을 형성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나는 그 반대편인 남망산 조각공원에 올랐다. 입구에 김춘수 시비(詩碑)가 나를 반기고 오르다 보니 초정(艸丁) 김상옥의 시조비와 청마(靑馬) 유치환의 시비도 보인다. 내친김에 내가 좋아하는 초정의 <봉선화> 시조 한 편을 감상해 보자.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손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이른 아침 강구안을 맴도는 갈매기 떼와 어선들이 오가는 해변 길을 걸으며, 마침내 남망산에서 통영 예인들을 만나는 기쁨을 맛본 나로선 어젯밤 숙취를 싹 가시게 하는 청량감을 만끽하였다. 서둘러 숙소로 달려와 서호시장 원조 시락국(다른 일행들만 단체 식사 ㅠㅠ) 대신 근처 식당에서 ‘시락국+충무김밥’으로 아침 끼니를 때우고 정각 8시 바로 앞 여객선터미널에서 한산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달려가길 30여 분, 해갑도(蟹甲島)와 1963년 지어진 거북선등대가 우릴 반긴다. 두억항에서 함께 싣고간 차로 <한산대첩기념비>로 향했다. 입구 해안마을 어귀에 ‘문어포(問語浦)’, 즉 한산대첩 때 패배하여 한산도로 기어든 400여 명의 왜군이 길을 물었다는 유래에 관한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동백숲길을 5분가량 오르니 기념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사람들의 발자취가 드문 듯 초라하기 그지없다. 사연인즉, 1979년 10월 28일 제막식을 이틀 앞두고 탑 건립을 지시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바람에 제막식 행사는 취소되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홀대를 받아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 때마저도 제막식을 거부하는 바람에 제막 없이 방치된 비운의 기념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념비의 주인공보다도 기념비를 만든 사람에 의해 역사의식이 달라질 수 있나, 씁쓸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제승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   제승당(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20여 분을 달려간 <제승당(制勝堂)>, 충무공 이순신의 사령부가 있었고 사당이 모셔졌던 운주당 터로서, 1740년(영조16)에 통제사 조경이 이 옛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지었다. 충무사와 영정, 한산정, 대첩문, 수루 등을 재정비하며 1976년 성역화되었다. 활터가 있는 한산정에서 박 작가는 다같이 눈을 감은 채 마음의 화살을 겨누게 하고 각자의 소원을 빌라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수루에 올라서는 함께 간 오희연 명창이 ‘閑山島歌’를 불러 주위를 숙연하게 하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다시 통영항으로 돌아와서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 입구 근처의 <착량묘(鑿梁廟)>를 참배했다. 착(鑿)은 ‘뚫다’란 의미로, 사당이 세워진 언덕 아래에는 인위적으로 바닥을 파내 바닷길을 넓힌 착량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1599년(선조32) 주민들이 수군들과 자발적으로 초옥을 세워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위업을 기렸는데, 1877년(고종14) 이순신의 10세 손인 이규석 삼도수군통제사가 초옥을 기와로 얹어 고쳐 짓고 묘호도 착량묘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방문지였던지라 일행 모두는 다시 한번 엄숙히 머리 숙여 장군의 넋을 기렸다. 

 

올라오는 길에 산청IC를 잠시 빠져나가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미꾸라지를 곱게 갈아 맑게 내놓는 추어탕에 지리산막걸리로 목을 축이니 그제서야 남해안 이순신 유적지의 잔영이 하나둘 머리속을 빠져나온다. “임진왜란 해전 유적지의 기념물은 모두 일본 동경을 향해 만들어져 있어요. 잊지 않고 경계하자는 뜻이지요. 그런 불구대천의 원수들이 경제보복을 가해 오는데, 그놈들 편을 드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잖아요.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김병덕 선생의 일갈, 근처 문익점 기념관을 차로 돌며 붓통에 담아온 목화씨 한 알만큼 소중히 새겨야 하리라.

 

차가 금산IC로 빠져 <칠백의총(七百義塜)>에 다다랐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중봉(重蜂) 조헌 선생과 의승장 영규(靈圭) 대사가 이끈 7백여 명의 의병이 조국 강토를 지키기 위해 1만5천여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유해를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이순신이 바다를 지켜낸 것처럼, 칠백의병은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필사적으로 결전을 벌여 모두 순절하였지만 전라도 땅을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지시를 내린 이래 유해를 거둔 칠백의총, 위패를 모신 종용사, 의병장 조헌의 사적을 기록한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기념관 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친일의 행적이 뚜렷했던 박정희였건만 국가적으로 위대한 군(君)으로 세종대왕을, 위대한 신(臣)으로 이순신을, 위대한 민(民)으로 칠백의병을 선정하여 매년 참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토착왜구 세력이나 친일 세력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도 일행 모두 묵념하여 호국영령들을 기렸다.

 

저녁 7시 반 못 미쳐 서울 도착, 초를 다투듯 다녀온 답사를 마무리 짓는 뒤풀이를 가졌다. 다들 매우 뜻깊은 여행이었음을 감추지 않는다. 특별히 Y엔지니어링 회사 대표의 특명(?)으로 참가하게 되었다는 두 여직원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통해 리더와 팔로워의 입장차를 좁히려는 노력과 창발 정신을 느끼고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술잔이 돌자 다음 답사는 이순신이 여진족을 막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러시아 땅의 녹둔도(鹿屯島)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순신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고자 하는 답사단의 무한 질주에 깊은 경의를 보내며 이틀간의 답사기행문 정리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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