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주말엔 문화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군포 역사·문화기행] 묘지기행(2)
네 번 이장한 호암 이기조 묘역
 
이진복 기자   기사입력  2019/07/10 [09:12]

[군포시민신문=이진복 기자] 군포시 산본동 산 1152-11, 일명 철쭉동산 위에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 호암 이기조(1595-1653) 선생 묘역은 네 번이나 이장한 묘역이다. 

 

▲  호암 이기조 묘역   ©  군포시민신문

 

이기조 선생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선(子善), 호는 호암(浩菴). 이희백(李希伯)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이대수(李大秀)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현영(李顯英)이며, 어머니는 유사규(柳思規)의 딸이다. 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이기조 선생은 광해군 7년(1615)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고, 인조 13년(1635)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때는 많은 덕을 쌓아 송덕비가 세워졌다.

 

▲  호암  이기조 신도비    ©  군포시민신문

 

묘지는 부인 고령신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는 향로석과 상석이 있고, 좌우로는 동자상 문인석 망주석이 1쌍씩 있다. 묘비는 1925년 을축대홍수 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묘역 앞에는 숙종 31년(1705)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현석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지은 것이다. 

 

1989년 8월 30일 군포 산본지역이 안양 평촌지역과 함께 수도권 주택난 해소책으로 택지건설사업지역으로 설정됨에 따라 경기도 기념물 제121호 호암 이기조 선생 묘역의 현상변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1992년 호암 이기조 선생 묘역을 이장할 때 발견된 묘지석(원지 12매, 후지 2매)의 내용에 의하면 원래의 묘역을 영조 4년(1728)에 다시 이장하여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2년 충간공 이기조 선생의 합장묘가 현 철쭉동산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묘역이 조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신도비와 이장할 때 발견된 묘지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경기도 장단 한산이씨 이기조 선영 일대   ©  군포시민신문

 

1653년 8월 27일 충간공 이기조 선생이 공조판서의 명을 받고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객사하여 1653년 10월 경 선영인 장단의 고기(庫基)에 귀장(歸葬)을 하였다. 1672년 묘가 좋지 않다고(胥原不利)하여 과천 수리산 태을봉의 동쪽 기슭으로 천장하였다(1차 이장). 전부인 광주이씨(1597-1618, 한은 이덕형의 손녀)는 장단 선영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후부인 고령신씨(1604-1673)는 ‘공과 더불어 같은 무덤에 장사지냈고 지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부인 광주이씨는 1618년 큰아들 송령(松齡, 1618-1666)을 낳다가 죽었고, 후부인 고령신씨는 3남 7녀를 낳았고 1673년에 죽었다. 

 

▲  호암 이기조 지석(전면)   © 군포시민신문

 

1673년 9월 9일 후부인 고령신씨가 횡성에서 객사하여 1673년 11월 25일 과천 수리산에 충간공 옆에 함께 부장하였다. 1679년 7월 충간공 이기조 지석(원지 12매)를 번조하고, 1686년 둘째아들 성령(星齡, 1632-1691)이 현석 박세채에게 신도비문을 부탁하고 1705년 8월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1708년 4월 14일에 다시 죽산부 서쪽 20리 국사봉 서쪽 자락으로 개장하고(2차 이장) 고령신씨 부인을 부장하였다. 그리고 다시 죽산으로 이장한 지 21년이 지난 1728년 8월에 다시 과천으로 이장하였다.(3차 이장) 이곳이 제1차 이장한 바로 그 지역은 아니지만, 그 근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도비의 내용이나 묘지석에 특별히 제기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2년 군포시 신도시 개발에 의해 1992년 철쭉동산 지역으로 이장하게 된 것이다.(4차 이장)

 

▲   호암 이기조 지석(후면)  © 군포시민신문

 

이처럼 호암 이기조 선생의 묘가 자주 이장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충간공의 묘가 이롭지 못하여 장단이 선영임에도 불구하고 명당자리가 많은 과천 수리산으로 이장하고, 이후의 이장 역시 보다 좋은 명당을 찾기 위한 후손의 풍수관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충간공 사후(1653년) 6째 사위 정상징(鄭尙徵: 정제두의 아버지)이 죽고, 1654년 7째 사위 김념(金淰)이 죽었으며, 1656년 봄에 셋째 아들 두령(斗齡)이 죽고 1657년 4월에 그 처가 죽었다. 그리고 1664년 넷째 아들 영령(永齡)이 23세에 죽는 상황에서는 좋은 명당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암 이기조 선생의 묘역이 선영인 장단 고기에서 과천 수리산으로 이장을 할 때인 1672년에는 큰 아들 송령이 죽고, 장손자 명주(明冑,1634-1656)도 죽었다. 따라서 이 천장의 주관은 둘째 아들 성령이 관여할 때이다. 그리고 고령신씨 역시 당시 고령(69세)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충간공 이기조와의 합장을 위한 천장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충간공 이기조의 신도비를 보면 둘째 아들 성령이 현석 박세채에게 부탁하여 짓게 하고, 글씨는 손자 명필(明弼, 4남 永齡의 아들)이 썼으며, 전액은 외손자 영의정 신완(申琓, 넷째 딸의 아들)이 썼다. 이들은 모두 후부인 고령신씨의 후손인 것이다. 

 


# 독자가 내는 소중한 월 1천원 구독료는 군포시민신문 대부분의 재원이자 올바른 지역언론을 지킬 수 있는 힘입니다. # 구독료: 12,000원(년간·면세)/계좌 : 농협 301-0163-7916-81 주식회사 시민미디어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9/07/10 [09:12] ⓒ 군포시민신문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