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떴지만 어제 마신 술로 머리가 띵하다.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혼자 아침산책을 나섰다. 무작정 길을 걷다보니 공사현장이 나오고 끝까지 거친 길을 빠져나가니 멀리 바다가 아스라이 보이고 항만 도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돌아와서 여쭤보니 여기가 중국 조선업의 중심지라 한다. 우리의 해외경쟁공업단지를 내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아침식사는 중국식으로 유타오(油條; 긴 모양의 밀가루반죽을 기름에 튀겨낸 빵)와 깨죽을 든든히 먹고 박 선생과 구 뤼순지구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미리 언질이 있었지만 가는 내내 우리나라 콩나물버스를 방불케 하는 고성과 난장이 이어졌다. 매년 고성장을 거둬 경제는 날로 좋아지고 있다지만 질서의식은 아직 수준미달이다.
종점까지 1시간가량 걸려 도착하니 인근에 ‘만충묘(萬忠墓)’가 있다. 전 리펑 총리가 직접 쓴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설명을 듣자하니 1894년 갑오년에 일본놈들이 들이닥쳐 이곳 여순에 살고 있던 양민 3만 명을 도륙했다는 것이다. 이때 목이 잘려 나간 시신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수습된 시신들만 합장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그곳이란다. 난징대학살 못지않게 대량살상을 저지른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뜻에서 경건히 고개 숙여 참배를 하였다.
다음 행선지는 ‘백옥산탑(白玉山塔)’. 길 건너 노변으로 줄지어선 아침시장을 비집고 들어서니 ‘白玉山’이란 안내판이 나온다. 30여분 한참을 산길을 오르다 보니 돌계단이 끝나는 산 정상에 높이 67m의 거대한 석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일본이 1907년에 세운 승전기념탑이라 한다.
산 아래로 한눈에 내다보이는 군항은 당시 일본과 러시아가 치열한 해전을 벌인 곳이고 이 일대에선 양 육군의 교전도 격렬했다. 어렵게 승리를 이끌어냈으니 일본이야 승전탑을 저리 우람하게 세울 만도 했겠지만, 이후 해방이 되고도 탑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도 모자라 다녀가기 편하도록 케이블카까지 설치한 중국인들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다. 저들은 배알도 없나. 나 같으면 탑을 허물어 그 자리에 중국인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탑을 세우고, 한쪽 모퉁이에 일본이 세웠던 승전탑 조각을 보존시켜 역사의 교훈으로 삼도록 할 걸, 쓴웃음을 지으며 산을 내려왔다.
다시 대로 건너 지하도를 지나 당시 안중근 의사를 심문했던 ‘여순고등법원’ 건물을 찾았다. 당시 건물모습 그대로 기념관으로 개방하고 있는데, 1909년 10월 26일 한일합방 한 해 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그해 11월 초 이곳으로 압송되어 사형을 언도받은 곳이다. 그때의 압송 마차와 말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고, 안 의사의 유품과 재판법정이 따로 전시되고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서인지 한글로 부기되어 있어서 별도 설명이 없어도 둘러보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오전 일찍 집을 나서 세 곳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정오가 지나가고 있었다. 박 선생은 백화점들이 모여 있는 중심상가의 물만두식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붐비는 걸 보니 꽤 유명한 식당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메뉴판의 가격은 대부분 20위안 전후다. 18위안(한화 3천원)짜리 새우야채물만두를 시켰는데 양도 푸짐하고 맛도 일품이다. 집에서 챙겨 오신 백주(白酒)까지 들이키니 불끈 힘이 솟는다.
남은 오후 일정은 시내버스를 타고 ‘여순 형무소’ 둘러보기. 형무소에 도착하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입구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이유인즉 30분 간격으로 단체 무료관람을 시켜서란다.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30,40명과 떼를 지어 해설사의 중국어 안내를 받으며 형무소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도 단연 눈에 띄는 곳은 안중근의사의 독방이다. 해설사가 한참을 설명할 정도로 비중 있게 다루는 모습과, 돌다보니 우리 일행을 제외하곤 관람객이 모두 중국 사람인 점을 눈치 채고 이들의 역사의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박 선생은 중국인의 기질을 ‘만만디’로, 우리 한국인의 기질을 ‘다혈질’로 단정하여 이야기를 푸셨다. 안 의사의 혈기로 100만 중국인을 놀라게 했지만, 순국 1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은 그때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선 만충묘와 백옥산탑의 이질감이 떠나질 않는다. 일본인의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처럼 이들 중국인의 속마음도 헤아리기가 어렵다.
이날 집으로 돌아와 박 선생으로부터 이곳에서 펴내진 안중근 관련 책자들을 전해 받고 중국인들이 얼마나 안 의사를 존경하고 칭송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칭다오맥주로 목을 축인 뒤 본인 책의 한국 출간 문제로 한참 동안 토론했다. 중국 건국70주년을 맞는 내년 중에 발간되었으면 좋겠다는 의사와 함께, 한국독자의 구미에 맞게 교정 각색하는 것에 대해 전권을 주겠다는 뜻도 비쳤다. 나 역시 밀양 박씨 일가의 중국 이주사를 통해 한민족의 애환을 제대로 그려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날도 늦은 밤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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