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건너 훈춘 땅으로 이주한 밀양 박씨를 만나다[중국 뤼순(旅順)을 다녀오다_ 첫째 날]오전 11시 20분 중국남방항공 다롄(大連)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로 채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거리지만 중국근대사와 우리의 항일투쟁사가 묻어나는 유서 깊은 뤼순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공항에 마중 나오신 박남권 할아버지(이하 박 선생)의 길 안내로 세 번의 전철을 갈아타고 2시간가량 걸려 종착역인 뤼순신항(旅順新港)역에 도착했다.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전철 입구에 놓인 물품검색대. 공항에서나 있을 법한 물품검색이 시내 곳곳의 전철역에서도 시행되다니... 의아스러웠지만 넓은 국토면적에 다수의 민족들이 얽혀 살다보니 생겨난 제도인 듯하다.
이곳은 다롄시 뤼순구(旅順口)에 속하는 신도시라서 여기저기 건설의 흔적들로 어수선한 느낌이다. 박 선생이 거주하는 인근 아파트에 들어서니 그의 아내 여선옥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두 분은 모두 조선족으로 길림성 태생이지만 다롄에 직장을 구한 셋째 딸 내외를 따라 다롄을 거쳐 이곳으로 이주한 지 4년 여 된다 하셨다.
방문선물로 가져간 한국산 김과 과자를 비롯해 내가 저술한 몇 권의 책과 안중근의사 옥중집필서적과 그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제작된 밀양 박씨 족보책 등을 꺼내니 배낭이 헐빈하다. 이른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맑은 소고기국에 수육, 김치와 마늘장아찌, 무채, 멸치고추볶음 등 영락없는 우리 식 반찬들인데, 샹챠이(香菜)로 맛을 내는 게 차이였다면 차이랄까, 푸짐한 반찬에 마오타이주(茅台酒)를 몇 잔 따라주시니 피로가 싹 가신다.
박 선생은 1942년(향년 77세) 생으로 두만강과 인접한 훈춘 회룡봉촌(回龍峰村)에서 태어나 연길에서 중어(中語)를 가르친 교사 출신이다. 몇 년 전 우리말로 <두만강변에 서린 애환-밀양 박씨의 100년 이주사>란 책을 중국 현지 출판사에서 펴낸 것이 나와 인연이 되었다. 한국에서 돈벌이를 하는 조카 승군씨의 소개로 한국에서 책을 펴낼 경우 내게 출판권을 부여한다는 계약을 2년 전에 체결하였으니 말이다.
이 일로 해서 한 번 찾아뵈어야지 하던 차에 올해를 넘기기 전에 찾아온 것이 이번 방문의 이유이다. 그러니까 그는 1909년 다섯 남매와 손주들을 몽땅 이끌고 함경도 경흥 땅에서 두만강 건너 훈춘 땅으로 이주했던 박의도(1864-1925)의 4대째 후손으로서, 현재 7대까지 이어가고 있는 가문의 이주사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우린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밤늦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미 그의 책을 두 번 읽은 나로선 조선족식 어법이나 표현, 생소한 지리적 명칭 등 궁금했던 내용들을 차례차례 여쭤보았고, 그는 관련 자료집들을 보여주며 나의 이해를 북돋워 주었다. 대화 중 언뜻언뜻 내비치는 가문과 고향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멀리 이역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단 한 번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잃은 적이 없다 하신다. 항일투쟁으로 목숨을 잃은 여러 열사 선조를 두었고, 나라 잃고 남북 분단에 휩싸여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된 기구한 가족사에도 불구하고 솟구치는 그의 열정은 마치 밟힐수록 더욱 강해지는 질경이 같다고나 할까.
어둠이 깊어갈수록 빛은 밝아지는 법, 내일 뤼순감옥과 법정 등 안중근 의사의 최후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하였기에 취기가 더 오르기 전에 술자리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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