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서평] 황석영 '할매'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6/01/03 [16:55]

[신간 서평] 황석영 '할매'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6/01/03 [16:55]

  장편소설 『할매』는 국내 최고의 이야기꾼 황석영이 2025년 12월 12일 첫 출간 이후 그해 말까지 5쇄를 찍은 인기소설이다. 나도 계간지 「창작과비평」지를 구독 신청하며 정기구독자 연말 깜짝 선물로 받게 된 이 책을 새해 첫날 단숨에 다 읽어보았다. 

 

  소설은 철새 한 마리가 물고 온 팽나무 열매에서 시작된다. 열매를 머금은 채 개똥지빠귀가 서해안 개펄에서 생을 다한 뒤 모래흙 속에 묻히게 된 씨앗은 한 해를 보낸 뒤에야 실 같은 뿌리에서 싹을 틔운다. 작가는 팽나무의 서사를 이렇게 예고한다. ‘바람과 햇빛과 물안개와 가랑비와 폭풍까지 견디며 버티어낸 어린 팽나무는 다시 겨울이 오자 추위에 죽어버린 듯, 삭풍 속에 꽂혀있는 메마른 작대기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이 팽나무는 스스로 죽음 같은 겨울의 정지와 봄마다 찾아오는 새 생명의 활기를 깨닫게 되었다.’-본문 31쪽-

 

  팽나무가 생겨난 지 250년 가까이 지났을 즈음, 사람의 세상은 조선이라는 왕국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두 차례 전쟁이 조선을 휩쓴 세상은 각박했다. 한 유민(流民)의 어린 자식은 스님의 손에 이끌려 구사일생 살아남아 몽각스님이 된다. 커서 속세인이 된 몽각은 만경강 샛강에서 처음 팽나무, 아니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할매를 만난다. 먼저 태어나 자신보다 오래 살 팽나무를 그는 할매라 불렀고 삶의 지혜를 할매에게서 배운다. 그리고 3,40년이 흐른 어느 날 갯벌로 걸어가 이름처럼 꿈에서 깨어나 꿈으로 되돌아갔다.

 

  할매가 300살이 되었을 무렵,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 이름은 하제(下堤)라 불렸다. 할매가 400살이 될 무렵에는 여자무당 고창댁이 들어와 할매를 ‘서낭당 할매’로 모셨다. 당골네 고창댁의 외아들인 배춘삼은 굿판을 벗어나 장터의 행상이 된다. 물건을 대주던  유분도 도사공(都沙工)의 요청으로 포교 나와 있던 토마스 신부를 중국 천진까지 태워다 준다. 이후 천주교 지회장인 유 도사공 가족은 아들 사무엘만 겨우 피신시킨 채 몰사당하고 만다.

 

  도사공의 시신을 거둔 춘삼은 하제로 돌아가지 않고 줄포에 새 터전을 잡고 정읍댁과 살림을 차린다. 외아들 경순에게 어려서부터 한학을 가르쳤으나 아들은 아버지 몰래 풍물을 배워 상쇠가 된다. 장성한 경순은 곰소댁과 혼인해 아들 성천을 둔 상황에서 농악패를 이끌고 전봉준의 동학 농민봉기에 나선다. 결국 우금치 싸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춘삼은 어린 손자 성천을 데리고 부안으로 이주한다. 

 

  세상이 급변하는 중에도 하제마을 할매는 그 자리를 지켰다. 함께 있던 작은 팽나무도 어언 300살이 되었다. 조선왕조는 국명을 대한제국을 바꿔 부활을 꿈꾸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합병당하고 만다. 일본은 군산부 불이간척지에 육군비행장을 만들고, 육군비행학교 조선분교를 군산에 설립했다. 알고 보니 6개월 속성 교육훈련은 가미카제 자살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두 그루 팽나무 중 작은 팽나무는 몇년 동안 사격훈련의 표적이 되어 썩어 죽어갔으므로 늙은 할매만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성천의 아들 동수는 1970년대에 방학 때마다 하제 포구의 외가에서 열흘 이상 묵곤 했다. 그새 마을 집들이 촘촘히 들어서서 가장 안쪽에 가려져 있던 팽나무 할매를 처음 보게 된 순간 기절초풍한다. 그 위용에 가위 눌린 조카는 외삼촌의 설명을 듣고서야 하제 팽나무와의 인연을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유분도 가족이 순교할 때 혼자 남겨진 아들 사무엘은 부여 칠갑산 장평골에 숨어 살았다. 그의 후손 유 방지거 신부는 정의평화사제회의를 이끌며 간첩단조작사건 유가족을 돕다가 새만금개발사업 반대운동에도 앞장선다. 해창갯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오체투지에 나서기도 했으나 새만금 물막이공사는 그대로 강행되었다. 지금 새만금 사업은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있다. 갯벌 생명체들의 씨를 말려 버렸음에도 간척지는 그 쓸모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 동수도 철새도래지이자 개펄 동식물들의 보고였던 서해안 생태계가 무너지는 걸 참지못해 유 신부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미군기지에 밀려 하제마을이 철거되는 자리를 둘러본 동수는 유 신부를 찾아간다. “거기 귀한 분이 살아 계십니다” “아니, 아직 안 나간 사람 있어?” “600년 사신 팽나무가 한 그루 있어요. 저는 수라갯벌 지킬테니, 신부님은 그 팽나무 할매 지켜주세요” 이튿날 하제로 달려간 유 신부는 나무 앞에서 분명히 나지막한 쉰 소리를 듣게 된다. “이놈아 어디 갔다 이제 오냐”고.

 

  작가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수도 장춘에서 태어나 해방 후 외가인 평양을 거쳐 서울 영등포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는 지금 군산에 산다.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일동은 한 달에 한 번 팽나무 제를 지내며 전국의 문화놀이꾼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며, 하제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및 문화재로 지정되어 아무도 함부로 베거나 없애지 못하게 되었다. 소설 속 유 방지거 신부는 문정현·문규현 형제 신부를 모델로 삼았으니 바로 위 문단의 실제 기여자는 두 분 문 신부님인 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몽각스님 일화는 『삼국유사』 ‘조신의 꿈’ 대목을 따왔고, 두 문 신부님의 선조가 순교자 집안이라는 귀뜸을 듣고서 소설 속에 천주교의 순교 과정을 넣었으며, 서학의 자극에 의한 점에서 동학과 관련한 인물도 설정했다 한다. 팽나무에 관해서는 양광희 향토사연구가의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하움 2021), 새만금 이야기는 김준 교수의 『새만금은 갯벌이다』(한얼미디어 2006), 최성각 작가의 『새만금,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돌베개 2004), 윤박경 연구원의 『새만금 갯벌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김곰치 작가의 『발바닥 내 발바닥』(녹색평론 2005) 중 「새만금예수님을 죽이지 마라」 등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힌다. 특히 황윤 감독의 다큐영화 「수라」(2023)는 이 소설에 그들의 이야기를 담겠다는 의욕을 불어넣어 준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대작은 이렇게 혼자가 아닌 여럿의 힘에 의해 탄생하는 법이다. 많은 사람이 작가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겐 인연과 관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로서도 작가가 보여준 600여 년간의 서사를 통해 가족은 물론 사회공동체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껴 볼 수 있었다. 새해 정초에 이 책 읽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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