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역사기행기-5일차 뤼순구

동네 형님 두 분과 떠난 여행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4/11/26 [08:26]

2024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역사기행기-5일차 뤼순구

동네 형님 두 분과 떠난 여행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4/11/26 [08:26]

 동네 형님 두 분과 아래의 일정으로 4박 5일간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성도이자 제1의 도시인 선양시를 시작으로 랴오닝성 제2의 도시인 다롄시 및 뤼순커우구에서 마무리했던 닷새간의 여행을 일정 순으로 기록해 본다.

 

  일정: 10/11~12 선양(瀋陽)/랴오양(遼陽) - 10/13 퉁화(通化)/지안(集安)/환런(桓仁) - 

        10/14 단둥(丹東)/다롄(大連) - 10/15 뤼순커우구(旅順口區)


 

  5일차(10/15, 화) 뤼순구     

 

  아침 7시경에 체크아웃한 뒤 아침 식사는 뤼순 가서 먹기로 하고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택시 잡는 데 한참 애를 먹었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백옥산 풍경구(白玉山 風景區)’에 도착한 시각이 8시가 좀 지난 시각이었으니 1시간을 꼬박 달려온 셈이다. 정상 부근의 주차장에 내려 정상부 지점까지 올라보면 거대한 탑이 하늘을 찌를 듯 세워져 있다. 이 탑은 1904년 2월 8일 이곳 뤼순항에서 일본함대가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 러일전쟁이 1905년 9월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러시아가 패배를 인정하며 승리를 맛보게 된 일본이 이듬해인 1906년 전쟁 발발지인 이곳 산 정상에 세운 ‘러일전쟁승전기념탑’이다. 탑을 반 바퀴 돌아가 보면 뤼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침 중국해군 순시선 1대가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어서 러일전쟁이 시작된 그 날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뤼순은 한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가는 곳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중근 등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며 뤼순감옥과 뤼순관동재판정을 찾아가는 반면, 일본인들은 그날 이후 선조들의 공적(?)을 떠올리며 이곳 승전탑을 찾는다고 한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은 중국 정부는 탑을 허무는 대신 잘 보존하는 것도 모자라 일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케이블카까지 설치해 주었다니 어이가 없다. 배알도 없이 그렇게 버는 돈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묻고 싶다. 

 

▲ 백옥산 정상에서 바라본 뤼순항 전경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백옥산 주차장에서 택시 기사와 상의 끝에 뤼순감옥까지 대절 택시 역할을 해주기로 약속받았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관동법정지(址)’를 먼저 가보기로 했으나 행선지를 ‘관동사령부지(址)’로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졸지에 관동사령부 자리에 가게 되었다. 그 당시의 건물 동만 남아있을 뿐 볼거리가 전혀 없었으므로 곧바로 ‘뤼순감옥 박물관’으로 가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 감옥 근처의 식당 앞에 우리를 내려주고 대절 택시를 보냈다. 아침 식사를 끝낸 뒤 매고 있던 배낭을 1시간만 식당에 맡기려 부탁했으나 젊은 직원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바람에 L 사장이 열 받아 버럭 고함을 지르는 짧은 소동(?)이 벌어졌다. 겨우 달래어 식당을 빠져나왔지만, 그 정도 선심도 못 베푸나 싶어 나로서도 무척 기분이 나빴다. 

 

  다행히 뤼순감옥 입구는 5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여서 그곳 무료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무겁잖은 걸음으로 감옥 내부와 부속 박물관 건물들을 차례로 속속들이 둘러보았다. 뤼순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동북3성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지었다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면서 중국·한국·러시아 사람들을 더 많이 수감하기 위해 1907년까지 증축했다. 1906~1936년 동안 수감자는 11개국의 항일운동가 2만여 명에 달했고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주로 수감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곳을 '뤼순일아감옥구지(日俄監獄舊地)박물관'으로 명명해 항일운동의 주요국가문화재로 지정 관리해왔으나,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 방문을 불허해오다 2009년부터 외국인에게 무료 개방하고 있다. 

 

▲ 뤼순감옥박물관 안중근전시관 입구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외국인 개방 때부터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공조해 전시실 우측에 600평방미터 규모의 '국제항일열사전시관'이라는 별도의 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흉상 및 항일운동 사료와 기사들을 정리한 전시물들을 전시, 사실상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전용 전시관으로 꾸며준 것이다.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 한인애국단 유상근, 최흥식 등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과 사료들을 소개하는 총 4개의 소규모 전시실로 나뉘어 전시하고 있어서 마치 우리나라 전시장에 와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감옥 내부도 안중근 의사 방을 유일하게 갖춰 줄 정도로 중국인들의 안 의사 존경의식이 우리 못지않음을 헤아리게 된다. 그 외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중국의 근대전쟁사를 여러 동의 건물에 시대순으로 전시해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관람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이날 우리는 1시간가량 이곳에 머물렀다. 

 

▲ 뤼순감옥 내 안중근 별실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뤼순감옥에서 나와서 ‘뤼순관동법정지’로 달려갔다. 이곳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경, 하얼빈역에 하차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가슴 속 태극기를 꺼내 “코레아 우라(에스페란토어로 대한독립만세)”를 만세 삼창한 안중근 의사가 당시 일본관동법정이 있던 이곳으로 끌려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언도받은 곳이다. 30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이 운집해 법정 규모가 가장 컸던 2층 고등법원에서 최종 평결이 내려질 정도로 당시 안 의사 의거는 세계적 토픽감이었다. 같은 해 3월 26일 31세를 일기로 뤼순감옥에서 처형되기까지 안 의사는 법정에서 15가지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 이유를 당당하게 밝혔고 수감 중에는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까지 했다. 2층 전시실 안 의사 사진 바로 옆에는 살아생전 주은래 수상이 남긴 “안중근 의사의 쾌거 이후 항일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한 남아의 기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글귀가 실려있다. 참으로 그가 존경스럽다.

 

▲ 뤼순관동법정지 내 주은래 수상 코너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다롄공항으로 가기 전 시간 여유가 있기에 마지막으로 멀지 않은 ‘만충묘(萬忠墓) 기념관’를 찾았다. 이곳은 5년 전 뤼순 첫 방문 때에도 다녀갔던 곳으로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1894년 11월 21일 뤼순을 침입해 나흘간 무려 2만여 명을 도륙했다. 그들은 도륙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체를 7일간 태운 후 유골을 백옥산 동쪽 기슭에 묻었다. 이후 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일본은 뤼순에서 물러갔고 전쟁 발발 2년 뒤에 청 왕조는 이곳에 '만충묘'라는 비석을 세우고 조의를 표했다. 전시물 중 긴 작두로 목을 잘라 도륙하는 일본군의 사진과 도륙당한 사람들의 유골이 나뒹구는 장면을 보면서 다시금 일제의 잔혹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전시관을 빠져나오면 유골을 합장한 만충묘가 나타난다. 무참히 죽어 나간 넋들의 원혼을 달래는 짧은 묵념을 하고 내려와 공항 방향으로 택시로 달리다가 이름 모를 바닷가 근처 맛집에서 마지막 만찬을 가졌다. 

 

▲ 만충묘 모습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뤼순에서 다롄공항으로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은 40여 분에 불과해서 탑승시간(오후 6시 30분) 2시간 반 전인 오후 4시도 채 안 되어 공항 내로 들어섰다. 다들 휴식을 취하는 사이 나는 그간 찍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생각 정리에 들어갔다. ➀도착 후 첫 방문지인 랴오녕성박물관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이 도도하게 역사의 뿌리를 내리며 거대한 중화사상의 줄기를 형성해 온 과정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➁선양고궁과 청 태조·태종의 두 왕릉을 둘러보며 이민족들의 중국 통일로 말미암아 오히려 주류인 한족 사회에 역동성을 불러일으켰음을 느껴보았다. ➂심야 침대열차로 이동해 밟아본 지안-환런의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며 고구려인의 활달했던 기상과 숨결을 한껏 느껴보았다. 만약 고구려가 한반도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면 대륙 깊숙한 데까지 영토를 넓히고 일찍이 우리가 중원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➃단둥 압록강 단교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의 모습이 그리도 외롭고 안타깝게 여겨졌던 건 분단 민족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➄다롄 시내의 화려한 불빛은 우릴 유혹했으나 허우대만 멀쩡한 중국의 속살이 드문드문 보이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인식을 심어준 반면, ➅뤼순에서 목격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목숨 바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분발해야지 하는 다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일본관동법정지에 전시된 문구 중에 “前事不忘 後事之師(전사불망 후사지사)”란 성어가 있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지나간 일을 잊지 말아야 훗날의 교훈이 될 것이다’ 정도일 것이다. 돌아와 확인해 보니 어원이 『전국책(戰國策)』에서 나왔다고 하며, 근년에 시진핑 주석이 일본의 역사 왜곡과 침탈을 부정하는 불손한 태도를 보고 이 말을 인용해 비판했다고 한다. 작금에 와서 과거 우리나라 지사들의 독립정신을 부정하고 친일 언사를 서슴지 않는 일부 몰지각한 시정잡배들을 보며, 이번 랴오닝성 일대 역사탐방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한 매우 뜻깊은 기행이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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