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리영희 선생과의 각별한 우정, 김형준 전 노루목카센터 대표

신완섭 기자 | 기사입력 2024/09/19 [09:08]

故 리영희 선생과의 각별한 우정, 김형준 전 노루목카센터 대표

신완섭 기자 | 입력 : 2024/09/19 [09:08]

  고 리영희 선생이 서울 생활을 접고 신도시 산본에 입주한 해는 1994년 66세 때였다. 그로부터 2010년 지병으로 타계하기까지 15여 년 동안 지역에서 선생과 사적인 우정을 쌓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전 노루목카센터 대표 김형준 씨이다. 한 번도 지면을 통해 소개된 바 없는 그를 만나 두 분의 우정어린 미담을 들어보았다. 

 

▲ 김형준 전 노루목카센터 대표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신완섭)  © 군포시민신문


  Q1 본인 소개를 간략히 부탁드립니다.

 

  1956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어요. 일찍이 상경하여 20대 초반에 서울 구로의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 입사, 1988년 퇴사하기까지 기계부에서 일했지요. 30살에 반장직에 올랐고, 같은 해부터 노사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고요. 군포에는 1985년 주공아파트로 이사와 쭉 살고 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21살 때(1976년) 자동차 정비사 자격을 따두었던 터라 이곳 금정역 일대에 ‘성일카 정비소’로 처음 문을 열었다가 신도시 입주가 한창이던 1994년 4월 노루목주유소에 딸린 ‘노루목카센터’로 확장 이전해 와서 주유소가 문을 닫던 2014년까지 20년간 계속했습니다. 지금은 제 사업을 접고 아들의 사업을 돕고 있습니다

 

  Q2 노루목카센터 개업과 리영희 선생님의 입주 시기가 거의 일치하는군요.

  개업한 지 몇 달 지났을 무렵, 선생님이 차량정비를 위해 저희 가게에 처음 찾아오셨어요. 이후에는 별다른 용무가 없어도 한 달에 1~2번꼴로 찾아오셔서 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거나 휴게실에서 신문만 보시다가 가시기도 하시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구독하던 J일보에 선생님 얼굴이 실려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척 내색을 하지 않다가 몇 달 뒤 여쭤봤더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업이 신문기자니 학자니 하는 사람들이야, 김 사장은 세상살이에 관해 그냥 내 말동무가 되어주면 고맙겠소” 하시더군요. 그 말씀처럼 선생님은 제 앞에선 정치나 언론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그저 일상적인 대화나 자동차에 관해 궁금한 것들만 여쭤보셨어요.

 

  Q3 선생님과 좀 더 친밀해진 계기가 있었나요

  선생님이 자주 찾아오셔도 카센터 특성상 정비할 차들이 밀려들면 북새통을 이루는 통에 말동무를 해 주는 것도 쉽진 않았어요. 그런 날에는 슬그머니 조용히 가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여러 날을 보이시지도 않고... 나중에 알고 보니 요양차 어디 지방에 다녀오시기도 하고, 사모님과 백두산에 다녀오시기도 하고, 가족 상봉을 위해 방북하시기도 하고, 노신의 고향 중국 소흥 일대를 다녀오시기도 하고 ... 건강이 썩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여행 다니시는 걸 즐기셨던 걸 알게 되었지요. 2000년 말부터 몇 년간 거의 뵙지를 못했는데, 나중에 말씀하시길, “집에서 글을 쓰던 중 아내가 장 보러 나간 사이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오른쪽 반신마비를 치료하느라 고생 좀 했다”고 하시더군요. 어느 정도 회복된 2006년에 카센터로 놀러 오셔서 제가 사는 전원주택 생활을 궁금해하시길래 그날 오후 잠시 카센터 일을 직원들에게 맡기고 대야미 속달동에 있는 제집으로 무작정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외출 중이라 차 한 잔도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했으나 선생님은 대단히 평온한 기분을 느끼셨다고 해요. 그 뒤 한 번 더 모시고 갔다가 2008년 9월쯤에는 정식으로 선생님 부부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물론이고 둘째 아들 내외와 손주들까지 다 동원해서요. 이날 기분이 좋아지셔서 단풍나무 밑에서 막걸리를 딱 한 잔 마셨는데, 사모님의 특별 승낙(?)에 무척 감사해 하시더라구요. 아, 그전에 선생님만 모시고 집에 들렀을 때의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제가 집에서 기르던 두 마리 애완견 중 포인트종에게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선생님께서 “저 백구(진돗개)에게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저 개가 서운해 하잖나” 하시던 말씀이 귀에 생생합니다. 

 

▲ 故 리영희 선생과 김형준 씨 가족 (사진=김형준)     ©군포시민신문

 

  Q4 가장 많이 회자되는 소문이 ‘경비행기 동승 사건’입니다만... 

  1994년 봄에 문을 연 노루목카센터가 1년이 지날 무렵 정비사업으로 제법 안정된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반큼 스트레스도 가중되어 마음 수양차 서예학원에 1년간 다녔고 몇 년간은 해동검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 어릴 적 꿈이 비행사였거든요. 1995년 어느 날 안산시 사리 옆을 지나가다가 경비행기 비행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단숨에 거금 5백만 원을 들여 5개월간 열심히 배운 끝에 경비행기 조종사 라이선스를 획득했지요. 그 뒤로 한두 달에 한 번꼴로 비행을 즐겼는데, 당시 고된 내 삶의 탈출구이자 해방구였지요. 1996년 말 저의 비행 장면이 찍힌 사진액자를 선물 받아 그걸 카센터 벽에 보란 듯이 걸어 두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선생님이 건강을 회복하신 2008년 어느 봄날, 여지없이 경비행기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지식을 총동원하여 “경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오토바이’입니다. 날개가 고정된 고정익형과 날개와 조종석이 분리된 체중이동형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기체의 밀도와 흐름을 잘 이용해야 하는 체중이동형이 난이도가 훨씬 높습니다. 비행기의 날개 끝이 위쪽으로 세워져 있는 윙넷(wingnet)은 공기의 와류(渦流,흐름) 해소가 목적이고요...” 이런 정도로 말씀드려도 사진 한 장과 설명만으로 다 이해할 리 없으신 선생님은 비행장을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며칠 뒤 또 경비행기 얘기를 꺼내시길래 “선생님, 오늘 제가 시간을 내어 선생님을 안산 사리 비행장으로 모시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자, 선생님은 “마누라 귀에만 안 들어가는 조건부로 동의함세” 하셨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신 선생님의 건강을 위협하는 짓은 일체 불허하는 사모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선생님의 호기심을 꺾기에는 저로서도 역부족임을 알기에 그날 선생님을 모시고 사리 비행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비행장에 도착한 선생님은 비행기체를 손수 만져보시며 비행 원리와 조종법을 이해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일기 상태가 대단히 양호했으므로 조심스럽게 “선생님, 비행기도 한번 타 보시겠습니까” 여쭙자, 이번에도 “마누리 모르게 탑승해 보는 걸로 함세” 하며 동의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보비행사인 저를 대신하여 비행은 베테랑 비행 조교에게 부탁했고, 그 부탁은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비행은 날씨만큼 순조로웠습니다. 고정익형 경비행기로 한 차례, 체중이동형 경비행기로 또 한 차례, 총 두 차례나 상공을 나는 장면은 제가 찍어드린 여러 장의 사진 속에 담겨있습니다. 

 

▲ 故 리영희 선생이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 (사진=김형준)     ©군포시민신문

 

  Q5 아마도 ‘경비행기 탑승 사건’은 선생님을 웬만큼 아시는 분들도 잘 몰랐던 토픽감일 겁니다. 이후에도 탑승하신 적이 있었나요?

  아뇨, 그날 두 종류의 경비행기를 번갈아 타 보신 것으로 끝냈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불과 두 해 전의 일이어서 선생님의 기력이 다소 떨어져 있었고, 선생님 사모님의 감시망(?)을 피해 위험한 짓을 감행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요(웃음). 그런데 그해 8월 두 분이 함께 제집을 방문했을 때 사모님이 경비행기 탑승 일을 알고 계시더라고요. 저보고는 비밀에 부치라 하시고서는 정작 당신은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셨던 것 같아요(웃음). 사실 경비행기를 탔던 그날도 2번의 무사 이·착륙 후 무척 기분이 좋아지셔서 비행 조교를 포함해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셨으나, 조교 선생님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처지라 저만 실컷 대접받은 기억이 납니다(웃음). 

 


  Q6 두 분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나요? 마지막 뵈신 때는 언제였는지요?

 

  네, 선생님은 그 뒤에도 틈틈이 제 가게에 오셨습니다.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전환시대의 논리>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두 권의 책을 선물로 주셨고요. 제가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건 서울 백병원 입원 때였어요. 그때가 아마 2010년 5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내와 함께 병문안을 갔었지요. 선생님은 반갑게 맞아주셨으나 건강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선생님께서 “김 사장, 나는 말야, 김 사장이 오랜 친구 같아서 하는 얘긴데, 세상에서 주사 바늘이 제일 무서워!” 하시더군요.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그런데 말씀 중에 ‘오랜 친구’라고 저를 지칭해 주신 점은 지금도 의아합니다. 27살 나이 차로나 사회적 경륜으로나 감히 선생님 입을 통해 친구라 불려도 되는 건지 지금도 무척 송구해지는군요. 

  선생님 돌아가신 뒤에도 고향에 들르거나 광주 근처로 가게 될 때면 5.18묘역에 묻혀계신 선생님 묘소를 자주 찾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쉬운 점은 묘비에 새겨진 선생님 모습이 좀 더 편안하신 모습이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15여 년 동안 봐 온 선생님의 모습은 늘 그랬으니까요.

 

   후일담_인터뷰에 응해주신 김형준 님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무척 신중하고 겸손하며 말수도 적은 분이다. 어느 날 일간지에 실린 선생의 사진을 보고 신분을 알게되고서도 한참 동안 모른 척 지냈을 정도로 순수한 교분을 중시하는 분이기도 하다. 아마 그런 모습에 반해 리영희 선생님은 서로 말동무가 되자고 마음을 열어주신 게 아닐까. 한결같았던 두 분의 15년 우정을 통해 사상가&언론가가 아닌, 인간 리영희를 조명해 본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날 리영희기념사업회(대표 김동민) 대외활동분과 임성용 분과장이 배석하여 대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김형준 님은 <리영희기념사업회> 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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