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범도루트 7기의 단원으로 만주와 연해주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이 여행을 통해 말하고 싶은 내용을 4회에 걸쳐 글로 공유하고자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역사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4∼5년의 활동기간이었다면 우리의 무장독립투쟁은 1900년대 초에서부터 독립을 쟁취한 1945년까지 무려 40년 이상이 된다. 참여자도 수만 명에서 수십만 정도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
일제강점기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최초의 대승을 거둔 ‘봉오동전투’, 1920년 10월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등 만주독립군 연합부대가 신화를 만든 ‘청산리전투’, 지청천, 홍진, 신숙 등 한족자치연합회가 결성한 한국독립군이 시세영이 지휘하던 중국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을 이동하던 일본군 19사단을 대파한 ‘대전자령전투’ 등 일제강점기 ‘3대 대첩’을 비롯하여 독립을 위한 많은 무장투쟁이 있었다.
우리의 독립은 강대국들의 흥정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닌 그야말로 피땀으로 쟁취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레지스탕스는 기억하면서 왜 우리의 항일 무장 독립투쟁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최근 일본 관련 이슈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군함도와 사도광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최근 임명된 이상한 광복회장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얼마나 반인권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몰역사적인 행위인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독립군·광복군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하고 육군과 육사의 역사적 뿌리를 잇기 위해 2018년 3월 1일 생도 교육의 전당인 충무관 앞에 장병들이 사용한 실탄 5만 발의 탄피 300kg을 녹여 설치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바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비판과 반발이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육사 내 재배치로 가닥을 잡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소설 <범도>(방현석)를 읽었다. 붉은 벽돌 두께의 두 권을 날밤을 세워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를 대면하였다. 그리고 강제징용으로 끌려가다 만주로 가셨던, 그리고 거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던 부친의 고난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인들과 함께 범도루트를 가기로 결심하였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잠깐 사이에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향한 곳은 연길 시내에 있는 ‘연길감옥항일투쟁기념비’ 앞이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찾은 기념비는 1935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었다. 1935년 김명수가 주도한 길림 제4 감옥 파옥 투쟁은 결사대 17명이 참여하여 300여 명이 탈옥을 성공, 그중 49명이 안도현에 있던 독립군 기지에 안착하도록 만들었다.
두번의 시도가 밀고자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첫 시도를 주도했던 김훈은 연길시를 흐르는 하남대교에서 수장당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몸이 감옥에 갇혔으나 정신마저 시들소냐...오늘 비록 유린당하나 다음에 우리가 주인. 열린다 감옥문이 자유의 세계로”라는 노랫말을 새기며 하남대교를 숙연한 마음으로 건넜다.
두 번째 방문한 곳은 창동중학교 사은기념비였다. 사실 개인적으로 범도루트에 참여하게 된 가장 큰 동인은 다름 아닌 사은기념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교육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실력양성론으로 나약한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주장, 어쩌면 그것은 척박한 현실을 외면하는 소극적이며 도피적인 생각은 아닌가라는 비판과 의문이 있었다. 무장투쟁을 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교육을 통해서 힘을 키워 미래를 도모하자는 논리가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에서는 무장투쟁과 교육활동이 서로 결합하여 진행되었음을 창동학교 사은기념비가 생생히 전해주고 있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비포장의 동네 뒷길을 한참이나 간 후 멈춰 섰다. 기념비는 언덕 중간 지점에 후손들이 없는 무연고 무덤처럼 외로이 풀밭에 홀로 서 있었다. 1907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졌던 창동중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동학원은 1907년 즉 우리 민족이 간도로 이주한 지 40여년이 지날 무렵 와동지역의 유지들이 소학교를 만들었는데 훼손이 심하여 여러 스승들이 합심하여 중학교를 새로이 만들었다. 심혈을 기울여 여러 학생들을 교육하기에 힘썼으니 그들의 노고를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지경이다. 위대하도다 스승의 은혜, 아름답도다 창동이여! 이 학교 출신 200여명은 그 공로를 잊지 못하고 이 비석에 새기어 칭송하노라!”. 대리석에 새긴 사은기념비, 그리고 후면에 기록된 기념비 설립 의미를 담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답사여행 내내 생생한 해설을 담당한 방현석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에 독립군 부대가 100개 넘었고 1만 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농사짓다가 독립운동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무기가 절대 부족하였다고 한다. 영화 아리랑을 만들었던 나운규도 독립군에 지원했다가 무기가 없는 바람에 쫓겨났다고 하니 그 당시 상황이 이해될 듯하다. 총이 넉넉했더라면 영화 아리랑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리라.
총이 없었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 판 돈을 들고 도망왔던 최계립을 포함한 한상호, 정기선은 총기 마련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갔고, 마차를 습격해 마침내 탈취에 성공했다. 그러나 엄인섭이라는 밀정의 신고로 붙잡혀 교수형을 당한다. 이 당시 한상호는 20살의 창동학교 초임 교사였다. 지금과 같은 교사의 신분과 처우가 보장되지 않았던 이른바 ‘입살이 교사’였다. 월급이 있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입에 풀칠만 가능하였던 가난한 상황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또 한 사람. 교장 마진. 그는 충렬대 무장 조직을 이끌었고 이후 국민회 회장이 되었던 분이다. 그러나 이 사은기념비에는 한상호, 정기선, 마진. 이분들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았다. 기념비는 오로지 ‘위대하도다. 스승의 은혜’만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 당시 창동학교는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할 인물들을 양성하였던 핵심공간이었다. 학교는 미래이고 현재였다. 학교는 교육의 공간이었고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무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은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움직임이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은기념비 근처의 잡초들을 손으로 뽑으면서 관리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반성하였다. 그리고 “백발백중, 일격필살”을 외치며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 아쉬움을 안고 다음 행선지를 향했다. 다음 여정은 훈춘과 방천, 그리고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어졌다.
# 독자가 내는 소중한 월 5천원 이상의 자동이체 후원은 군포시민신문 대부분의 재원이자 올바른 지역언론을 지킬 수 있는 힘입니다. 아래의 이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시면 월 자동이체(CMS) 신청이 가능합니다. https://ap.hyosungcmsplus.co.kr/external/shorten/20230113MW0S32Vr2f * 후원계좌 : 농협 301-0163-7925-91 주식회사 시민미디어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