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잃어버린 210일, 팔순소년병 김인환 회고록' 을 연재한다. 8월 13일자 기사 "보초 하나가 뚫리면 나라 안보가 뚫린다"의 주인공 김인환(군포시, 82세) 어르신의 6.25 전쟁 경험을 담은 기획 연재물이다. 글쓴이가 소년병으로 징집되었던 1950년 8월 20일을 떠올리며, 2015년 8월 20일에 첫 회 시작으로 매주 연재한다.
부대 편성을 하는데, 김은태 형과 같이 있고 싶어 항상 함께 움직였다. 그 결과 보병 제2사단 제32연대 1대대 4중대 2소대 2분대 HMG탄약수로 편입됐다. 부대가 주둔한 산양초등학교는 집에서 약 30리 정도 거리였다. 집 소식이 궁금해 지역 주민에게 부탁해 내가 이곳에 있음을 집에 알렸다.
뜻밖에도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다. 내 소식을 전해 듣고 아들을 보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떡을 빚어 오신 것이다. 어머니는 육군정양원에 입원 중 면회 온 형님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간신히 안심은 들었지만, 이제 지척에 와있다고 하니 얼마나 막내아들이 보고 싶었는지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학생복을 입혀 피난을 보냈던 막내아들이었다. 그런 막내아들이 군복을 입고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부둥켜안고 놓지를 못했다. 내 몸을 어루만지며 "부상 입은 곳이 어디며, 지금은 아프지 않고 괜찮냐"고 묻는데 목이 메여했다. 다 나아 건강하니 안심하라고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놓지를 못했다.
어머니는 자나 깨나 전장에 보낸 아들을 위해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노심초사하며 아들에 대해 희생하는 사랑을 떠올리자, 아무리 효도를 해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리라 생각됐다. 어머니는 부대장에게 부탁해 하룻밤만 아들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장성해도 어리게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어린 나를 안고 하루 밤을 보내고 싶었을 것으로 생각됐다. 집에서 해온 떡을 부대원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잠시나마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을 맛볼 수 있어, 행운아라 생각됐다. 민가에서 하루 밤을 묵은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나를 만나기 위해 부대 앞에 왔다. 잠깐 작별인사를 하는데 또 눈물을 흘렸다. 겨우 하는 한마디 말은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였다.
어머니는 "몸조심하라"는 말을 미처 못 하고 목이 메어 더 말을 못했다. 아무걱정 말라고 말씀드리며 손을 놓았다. 학교 뒷산에 올라 훈련을 하며 고향으로 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전장에 두고 가는 길이라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는 모습이 보였다. 찬바람에 치맛자락이 날리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산모퉁이를 돌아나가니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뵙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마음으로 빌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가시는 길마다 눈물을 뿌리시며 가셨으리라.
<저작권자 ⓒ 군포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댓글
|
기획·연재 많이 본 기사
|